[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6월 13(일)
[녹]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에제 17,22-24)
제2독서(2코린 5,6-10)
복음(마르 4,26-34)
이 땅에 하느님 나라 싹 틔우는 한 톨 씨앗 되리라
예수님이 비유하신 겨자씨는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상징
주님의 협력자인 신앙인들은 참 생명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말씀 실천에 헌신해야
■ 아주 작지만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희망의 상징, 겨자씨
언젠가 휴가를 떠나신 주방 자매님을 대신해서
아이들에게 미역국을 끓여준 기억이 납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끓여보는 미역국이라,
열 명 정도 먹으려면 대충 이 정도 미역을 넣으면 되겠지,
생각하고 마른 미역을 넉넉히 큰 들통에 집어넣고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는데,
마른 미역은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 큰 들통에 넘쳐나는 것입니다.
열 명이 아니라 백 명도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엄청난 양의 펄펄 끓는 미역국을 본 아이들과 자원봉사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겨자씨의 확장성, 팽창성을 예로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희망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지금은 비록 작고 미약하지만
큰 성장과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상징으로서 소개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이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코 복음 4장 30~32절)
작다는 것을 강조할 때 어떤 표현을 합니까?
그 표현이 상황 상황에 따라 참으로 다양합니다.
봉급이 작을 때 ‘쥐꼬리만 한 봉급’, 방이 작을 때 ‘콧구멍만한 방’,
가게가 작을 때 ‘구멍가게’, 눈이 작을 때 ‘단추 구멍만한 눈’,
밭이 작을 때 ‘손바닥만 한 밭뙈기’그런데 유다인들은
작은 것을 말할 때 겨자씨 만하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만큼 겨자씨는 크기가 작습니다.
씨앗의 직경은 대개 0.2mm정도랍니다.
겨자씨는 11월경에 뿌리는데,
씨앗에서 싹이 나오면 채소처럼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키가 커가면서 가운데 줄기가 점점 굵게 자리 잡으면서
마치 나무처럼 커지기 시작합니다.
겨자는 이스라엘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자라지만,
특히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갈릴래아 지방에서 많이 서식합니다.
유채꽃 빛깔의 길쭉한 꽃도 피는데,
2~3월경 갈릴레아 호숫가를 산책하다 보면,
온 산과 들이 겨자 꽃으로 인해 노랗게 물듭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 한 가지는
그 작은 씨앗이 특별한 투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성장을 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 자라면 2~3미터는 물론이고,
기후가 좋은 요르단강 기슭이나 갈릴레아 호수 주변에서는
3~4미터 높이까지 자라나, 무성해진 가지 사이로
새떼들이 날아와 앉기까지 한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인 교회,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폭발적인 확장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장의 속도나 위세가 대단한 겨자씨를 비유로 드신 것입니다.
결국 언젠가 도래하게 될 최종적이고 궁극적 구원,
결정적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 말씀의 성장,
교회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해야 할 예수님의 협력자들인 것입니다.
엄청난 하느님의 나라이지만,
그 시작은 바로 ‘오늘날의 겨자씨 한 알’인
우리 각자로부터 시작됩니다.
나란 존재, 때로 죄 투성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 각자 안에는 은총의 겨자씨 한 알이 뿌려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의 씨앗을 멋지게 싹 틔워야겠습니다.
한 그루 명품 나무로 성장시켜야겠습니다.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매달고 그늘도 만들어 세파에 지친
어린 새들이 날아와 쉬도록 만들어야겠습니다.
■ 우리 안에 심어진 생명의 씨앗을 잘 가꿔나갑시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한 신자분의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습니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느냐? 누가 돌아가시기라도 했냐?’
여쭸더니, 아니나 다를까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던
애완견이 세상을 떠나서, 막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강아지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한번은 마당에서 키우던 잡견 강아지가 병에 걸려
시들시들 앓다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급성 장염이었는데,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동물병원에 데려가
엑스레이 사진도 찍어보고, 주사도 맞춰보고 그랬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생명이 다한 녀석을
마지막으로 품에 안아보았는데,
그때 저는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과 생명이 끊어진 것이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모습,
그렇게 생기 있고 귀여운 모습이었는데,
죽고 나니 그런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온 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렸습니다.
바라보기도 싫었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
이거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더군요. 생명이 붙어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지속되어야 사랑스럽습니다.
숨을 쉬고 있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땅 위에 스스로 두 발로 서있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정말이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생명의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최초에 심어진 그 씨앗은 겨자씨만큼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사랑이 하느님 사랑과
부모의 사랑에 힘입어 무럭무럭 성장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군요.
우리 안에 심어진 생명의 씨앗이 무럭무럭 우리 안에서 자라나
우리 밖으로 성장해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생명도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어진 다양한 가능성의 씨앗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충만하게 실현시킬 때 우리 생명도 커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다 똑같은 수준의 생명이 아니더군요.
그저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생명,
자기만 알고 자기만 챙기는 이기적 생명은 차원이 아주 낮은 생명입니다.
그에 반해 참된 생명은 육적인 생명에 영적인 생명이 추가되는 생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통합되고 완성된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건네시는 생명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 안에 구체화시키는 인생이야말로 참 생명의 삶을 사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 순간 우리는 지상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제주 황사평성지
[한주간 전례]
2021년 6월 14일 (월)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38-42
우리의 오른뺨을 때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재판까지 걸어서 우리의 속옷을 가져가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는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요?
같이 걷자고 우리에게 부탁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요입니다. 강제성을 지닌 상황이지요.
그러니 천 걸음을 같이 걷지 않으면 보복이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이 또한 우리와 사이가 좋은 사람이 보여 주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우리와 친하고 가까운 사람이라도
우리의 오른뺨을 때리고 속옷까지 원하며,
천 걸음을 함께 가자고 한다면 우리의 기분은 좋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와 좋지 않은 관계에 놓인 사람이 그런다면 어떨까요?
기분이 나쁩니다. 편안하고 행복한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분 나쁘게 하고 불편하고
불행하게 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지칭하십니다.
그리고 이 악인과 맞서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며칠 전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걱정하시며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난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행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줄 알았던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니 황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과
우리가 예수님께 바라는 모습이 이렇듯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스럽고 불편하게 만들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악을 이겨 내는 길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십자가의 여정으로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불편함과 부당함,
그것이 바로 악을 넘어서는 길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15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43-48
신자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가장 잘 지켜야 하는 계명이지만,
동시에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냥 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네요.
참 어렵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다시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사랑과 관련된 구절만 살펴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에는
사랑에 네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둘째는 ‘스토르게’입니다. 이것은 혈연으로 연결된 사랑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품으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주는 사랑은 이웃에게도, 원수에게도,
곧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이 내가 원하는 사랑, 내가 좋아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전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떠오르는 태양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조건 베풀어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지요.
그럼 우리 함께 하늘의 태양을 보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함께 맞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태양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하느님께서 무조건 베푸시는 사랑임을 기억해 봅시다.
태양을 보면서, 비를 맞으면서,
그 사랑을 나와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하여 원수에게까지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향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16일 (수)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1-6.16-18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자 행하는 자선은 자선이 아닐까요?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게 자선을 베푼다면,
그것은 거짓된 자선일까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며,
단식을 알리면서 하는 단식은 헛된 단식일까요?
이것도 의로움이며 자선이고, 기도이며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게 행한다고 하여 그 의로움이,
자선이, 기도가, 단식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의 정의가 아닌,
그 행위를 통하여 얻는 상의 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받은 상’과
아버지에게 ‘받을 상’의 차이를 알려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은 현재적이고 즉각적입니다.
의로움을 행하였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바로 보람을 느끼고 기분도 좋아집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받을 상’은 어떤가요?
그 상은 현재가 아닌, 나중을 위한 상입니다.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습니다. 마음은 뿌듯할 수 있지만,
내 행위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들 수 있습니다.
좋은 일, 착한 일을 하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을 상’보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받을 상’이
더 좋은 상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로 여겨지고
빠르고 즉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한 번쯤은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거스르며,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받을 좋은 상’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숨어서 나를 바라보아 주시는
아버지를 우리가 함께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17일 (목)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7-15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주님의 기도’가 오늘 복음 말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만나게 되는 가슴 뛰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고백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고백함으로써,
우리 서로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 주며,
우리는 형제 자매가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가족 공동체 안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공동체로 모아 주시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친절하게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는 ‘용서’라는 가르침 안에서 분명해집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용서는
하느님만이 홀로 하실 수 있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창조하다’와 함께 하느님만의 능력을 나타내는 어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용서’라는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도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큰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잠시,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며 우리에 속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 사람(들)을 떠올려 봅시다.
떠올리기도 싫을 수 있습니다. 그냥 밉습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며 주신 특권,
‘용서’를 하느님 안에서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이며 도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18일 (금) [녹]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19-23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유산이요 선물이었습니다.
떠돌이 유목 생활 중에도, 이집트 종살이 시절에도,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절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내려 주신 선물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에 감사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갔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역사적 부침을 겪으면서 땅을 잃기도 하고
다시 찾기도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구약에서 땅은 그들의 신앙과 삶을 보여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땅을 향하였습니다.
이처럼 땅은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고,
삶의 풍요와 안정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역사와 신앙을 담고 있는 보이는 터전이었던 땅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머무시고 마련하여 주신 자리,
곧 하늘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땅은 사고팔지만,
하늘을 사고파는 사람은 없습니다.
땅은 더 차지하려고 욕심을 내지만,
하늘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려는 생각은
우리를 구약의 세계에 머물게 만듭니다.
아무도 욕심내지 않고, 아무도 사려 하지 않으며,
아무도 차지하려 하지 않는 하늘의 시민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내 마음이 머무는 곳, 우리 신앙인의 마음이 향하는 곳,
그곳은 땅이 아닌 하느님께서 계신 하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19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24-34
원시 시대에는 그저
생명을 유지하려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외부의 위험에 노출된 신체를 보호하고자 옷을 입었습니다.
과연 오늘날에도 생명을 유지하려고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다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라는 질문이 아닌,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라고 질문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싫어하는 음식이 아닌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고자 하겠지요.
그럼 초대된 그 사람은 어떨까요?
다른 사람이 초대해 준 자리에 아무 옷이나 입고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초대한 자리가 어떤 자리며, 어떤 복장을 해야 하는지 당연히 고민할 것입니다.
여기서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옷을 입는 것은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을 고민하며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상의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목숨을 위해서, 우리의 몸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맛집에서 맛난 음식을 먹었다고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연장해 주지 않습니다.
남들이 주목하는 멋진 옷 때문에 우리의 몸이 소중해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었느냐, 어떤 옷을 입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찰이 나를 더욱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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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중순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느샌가 부활시기를 끝내고 연중시기 입니다.
부활의 기쁨에서 일상으로 돌아온 요즘
한창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코로나19를 이길 수 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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