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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5월 30(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Berardus 2021. 6. 1. 06:35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5월 30(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제1독서 (신명 4,32-34.39-40)

제2독서 (로마 8,14-17)

복음 (마태 28,16-20)

성령 안에서 자유인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물
항상 삼위일체 하느님 깊이 인식하며 친교하는 삶 살아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꽃’)

집 근처 아파트 재개발을 위해

모두 철거한 장소에 교회가 있는데,

그곳의 빨간 장미 넝쿨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완벽한 꽃 색깔은 그 자체로 하느님을 찬미하게 합니다

. 며칠 뒤에는 포크레인이 이 꽃도 잡초처럼 뽑아버리겠지요.

오월의 장미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바라봐 주고 이름을 불러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듯

삼위일체라는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

한 분이신 하느님의 세 위격이라는 그분의 정체도

우리가 그 신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살아내려고 노력할 때

우리 신앙의 근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베풀어지므로,

세례 때 고백하는 신앙의 진리들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位格)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가톨릭 교회교리서」 189항)

■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는 나

복음에서 부활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분이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사명을 줍니다.

이 단락에서 마음을 끄는 것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 원어의 자구적 의미는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나’(ἐγὼ μεθ’ ὑμῶν εἰμι)입니다.

‘에고 에이미’(ἐγὼ εἰμι)라는 말은

탈출기에서 모세가 하느님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

그에게 계시한 이름 ‘야훼’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야훼라는 이름에는 “나는 모든 것을 창조한 창조주다.

나는 모든 일을 발생하게 한 원인이다.

나는 항상 함께 있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두려워하며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의 사명을 위해 가장 필요한 무기로

금과 은이 아니라 그분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복음은 제1독서와 2독서에 비추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호렙에서 약속의 땅 문턱에 이르기까지

주님이 어떻게 자신들을 인도해왔는지를 회고하면서

그 결과로 하느님의 법을 경청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신명 4,39) 규정과 계명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으로 하느님 외에

다른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살도록 하기 위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규정과 계명은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인간이 생생한 하느님 체험에서 멀어지게 하고

종으로 만들어버리는 도구가 됐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율법의 종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자유인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에 대해 말합니다.

이 단락은 삼위일체를 ‘구원 경륜’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곧 삼위일체는 구원 역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삶의 여정에서

삼위일체의 활동이 가져다주는

여러 결과를 성찰하게 합니다.

바오로는 자기 서간 곳곳에서 성령이

그리스도인 삶의 원천임을 확신을 가지고 표현합니다.

바오로에게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현존에 대한 지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2,20)에 요약돼 있습니다.

바오로는 성령 체험을 그리스도 체험과 연결합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체험됩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체험과 분리하여 성령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결합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며,

유일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이 아들

그리스도에게 준 권한(마태 28,18 참조)과 같은 권한에 참여할 수 있게 하면서

세례부터 종말 때까지 하느님 자녀의 신분을 완성합니다.

성령은 단독으로 활동하지 않고

항상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일을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통해 행동하고 성령에 의해 대표됩니다.

여기서 성령은 삼위의 한 위격이라기보다

인간과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을 함께하는 어떤 인격적인 존재로 보여집니다.

바오로는 후대 교회에서

체계화한 삼위일체 교의처럼

삼위를 위격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근본적으로 하느님 아버지,

그분의 아드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활동하는 하느님 영의 상호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더욱 깊이 알고,

그리스도의 삶을 자기 삶의 규범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돼 하느님 사랑으로 살고 있다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우리 안에서 움직이는 성령의 친교를 체험한다면

우리는 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위해 뭔가 아름다운 일을 할 것이며

고통받는 형제자매를 위해 함께 나누고 기도할 것입니다.

■ 사랑과 은총과 친교의 삶

“언제 어디에서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더 깊이 인식하고 체험하는가?”

그 자리는 매일 반복되는 미사라고 생각합니다.

미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마칩니다.

교회는 온갖 다양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다정한 인사를 건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 인사를 들을 때 가장 깊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여러 관계와 일, 희망과 두려움이 혼합되고 파편화된 일상이

하느님 앞에서 하나로 정돈되고 일상은

하느님 현존의 장으로 반짝이는 것을 느낍니다.

“흠숭하올 삼위일체의 하느님,

제 자신을 완전히 잊고 마치 제 영혼이 이미 영원 안에 있듯이,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당신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소서.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성녀)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령으로

성자를 잉태하신 성모님께서 우리가 삼위일체의 하느님 안에

깊이 잠겨 살아가도록 우리를 위해 전구해주기를 간청합니 다.

아멘!

-임숙희(레지나-

▲제주도 용수공소



[한주간 전례]

2021년 5월 31일 (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해마다 5월 31일에 지내는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

(루카 1,39-56 참조)을 기념하는 날이다.

5월 31일을 축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다.

성모 마리아께서 천사의 메시지를 따라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이러한 이웃 사랑은 위대한 두 인물이 만나는 자리가 된다.

[복음묵상] 루카 1,39-56

유다 전통에서 ‘시온의 딸’은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뒤에 선포한 신탁으로

다시 세워진 하느님의 백성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유배에서 돌아온 ‘남은 자’들이며,

종말에 메시아를 맞이한 예루살렘(즈카 9,9 참조)을 의미합니다.

구원 역사 안에서 성모님께서는 메시아 예수님에 관한 구절들에서

새로운 하와로서 불순종이 아닌 순종의 신앙인으로 나옵니다.

메시아를 잉태하시고 이스라엘을

재건하시는 성모님께서는 시온의 딸의 전형이며,

세상의 어느 것보다 하느님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모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시는’(루카 1,35),

마치 구약 성경의 커룹들이 감싸고 있는

‘계약의 궤’(탈출 25,20 참조)처럼 표현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라고 노래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말하였듯이

“은총이 가득한” 행복한 여인이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마리아보다

엘리사벳이 더 행복한 여인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문화 안에서 엘리사벳은 늙도록

아이를 가지지 못한 여인이었기에,

창피함과 부끄러움 가운데 일생을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늦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었고,

당당하게 한 여인으로 서게 하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의 잉태는 축복이라기보다는

염려스럽고 걱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그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일이며,

걱정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과 그의 태 안의 세례자 요한은

기쁨 속에서 성령으로 가득 차 마리아를 칭송합니다.

이에 성모님께서는 겸손하고 온화하게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라고 노래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자신의 삶에서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더라도 우리가 체험하는 많은 만남을 통하여

주님의 은총을 발견하는 것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6월 1일 (화)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유스티노 성인은 100년 무렵

팔레스티나 나블루스의 그리스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그리스 철학에 몰두하던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입교하여 신앙의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성인은 에페소에서 유다인 트리폰과 종교 토론을 하고

이를 토대로 「트리폰과 나눈 대화」를 저술하였으며,

로마 황제와 원로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책도 펴냈다.

로마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기도 한 성인은

165년 무렵 다른 6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마르코 12,13-17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을 향한 부정의 감정을 드러내는 ‘올무’에서 시작하여

‘감탄’이라는 긍정적인 장면으로 전환되는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주목할 점은, 올무가 감탄으로 바뀌는 그 자리에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한 모함을 마주하는 가운데,

어떤 화려한 언변이 아닌 하느님을 통해서 대답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의 복음은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게 해 줍니다.

첫째,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신앙의 의문들,

신앙과 삶의 질문들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통해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바탕으로 우리가 지닌 신앙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올무’를 씌우려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신앙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우리는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은가?’,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라는 올무를 마주하게 되고,

결국 올무에 걸리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마주하고,

우리가 던지는 신앙의 의문에 대한 답은 하느님 안에서만

해결됨을 오늘 복음은 알려 줍니다.

둘째, 예수님의 대답처럼,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황제에게 세금은 바칠 줄 알면서,

하느님께 하느님의 것을 돌려드릴 줄은 모릅니다.

‘성공’과 ‘부’(富)라는 이 시대의 황제에게

우리는 많은 세금을 바치면서 살아갑니다.

부귀영화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아까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반면에 하느님께 속한 것은 어떠한가요?

주님께 속한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도 않고,

자연스레 하느님께 드릴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런 우리에게 시편의 저자는 소리 높여 외칩니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시편 24[23],1).

세상과 세상을 채우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2일 (수) [녹]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18-27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두가이들도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 시작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그들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전달되었는지,

또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이 지닌 본질에는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잘못된 출발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마르 12,18)이라고 명확하게 언급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성경책에 기록된 죽은 하느님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는 있었지만,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아닌,

자신들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상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우리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 같은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만나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성경 속 등장 인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전례 안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않았는지요?

기도할 때만 하느님을 찾지는 않았는지요?

하느님은 성경 속이나 전례 안에서만,

또는 기도할 때만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3일 (목)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복음묵상] 마르코 12,28ㄱㄷ-34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우리는 ‘계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십계명이 포함되고, 그 밖에 우리에게

신앙인의 의무로 주어진 것들이 포함됩니다.

많은 계명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우리는 이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나요?

“예.”라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복음 말씀은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마음, 목숨, 정신

그리고 힘’을 다할 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마음, 목숨, 정신과 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나의 모든 것을 사용할 줄 아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나 자신의 온전한 몰입입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가장 큰 두 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나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하느님께서 흙먼지로 손수 빚어 만드시고,

숨과 영을 불어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데,

나에게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를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출발점,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4일 (금) [녹] 연중 제9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35-37

6월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제1독서 말씀으로 토빗기를 만납니다.

토빗기의 중요한 신학은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은 반드시 하느님의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선을 베풀고 기도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편할 때 선택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은 모습으로 하느님을 섬겨야 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함을 알려 줍니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따른다면,

복을 받고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토빗기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도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선택이

가져올 수 있는 불편함과

어려움 또한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독서에서 만나는 장면은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간 토빗이

다시 보상을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을 알고

믿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토빗이 살던 시절에 하느님을 알았던 사람은

토빗과 그의 아들 토비야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갔지만,

그 고백을 삶으로 실천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 앞에 다가오는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 마음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지만,

동시에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익이나 성공보다

손해를 입는다는 마음의 가난함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부족함을, 가난함을 인정하면서 주님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도 토빗과 토비야의 여정을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5일 (토) [홍]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보니파시오 성인은 675년 무렵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된 그는

수도회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성인은 특히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마인츠의 교구장이 된 보니파시오 주교는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세웠다.

성인은 선교 활동에 주력하다가 754년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었다.

1874년 비오 9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주교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복음묵상] 요한 12,24-26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 가는 씨앗’을 통하여 추수철에

많은 결실을 내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자주 나옵니다

(마태 13,3-9; 마르 4,3-9 등 참조).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를 부활과 영원한 행복에 적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5,35-44 참조).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목숨을 바쳐 많은 이에게

자신의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들의 모범은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 성인들과

오늘 기념하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자들은,

테르툴리아누스 교부가 말한 대로 ‘교회의 씨앗’임이 틀림없습니다.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의 온갖 회유와 궤변에도,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

”(5월 29일 성무일도, 독서 기도, 제2독서)

하느님을 결코 배신할 수 없음을 담대하게 밝히며,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루카 21,15)로,

소중한 목숨을 바쳐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증언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 앞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도

이 세상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증언합시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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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지나고 6월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아침, 저녁의 기온이 싸늘하다가
오후 나절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온이 올라 갑니다.
날씨의 변덕만큼이나 코로나19도 잠잠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의 6월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유월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