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이 땅에 하느님 나라 싹 틔우는 한 톨 씨앗 되리라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에제 17,22-24)
제2독서(2코린 5,6-10)
복음(마르 4,26-34)
예수님이 비유하신 겨자씨는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상징
주님의 협력자인 신앙인들은
참 생명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말씀 실천에 헌신해야
■ 아주 작지만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희망의 상징, 겨자씨
언젠가 휴가를 떠나신 주방 자매님을 대신해서
아이들에게 미역국을 끓여준 기억이 납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끓여보는 미역국이라,
열 명 정도 먹으려면 대충 이 정도 미역을 넣으면 되겠지,
생각하고 마른 미역을 넉넉히 큰 들통에 집어넣고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는데,
마른 미역은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 큰 들통에 넘쳐나는 것입니다.
열 명이 아니라 백 명도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엄청난 양의 펄펄 끓는 미역국을 본 아이들과 자원봉사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겨자씨의 확장성, 팽창성을 예로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희망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지금은 비록 작고 미약하지만
큰 성장과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상징으로서 소개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이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코 복음 4장 30~32절)
작다는 것을 강조할 때 어떤 표현을 합니까?
그 표현이 상황 상황에 따라 참으로 다양합니다.
봉급이 작을 때 ‘쥐꼬리만 한 봉급’, 방이 작을 때 ‘콧구멍만한 방’,
가게가 작을 때 ‘구멍가게’, 눈이 작을 때 ‘단추 구멍만한 눈’,
밭이 작을 때 ‘손바닥만 한 밭뙈기’그런데 유다인들은
작은 것을 말할 때 겨자씨 만하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만큼 겨자씨는 크기가 작습니다.
씨앗의 직경은 대개 0.2mm정도랍니다.
겨자씨는 11월경에 뿌리는데,
씨앗에서 싹이 나오면 채소처럼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키가 커가면서 가운데 줄기가 점점 굵게 자리 잡으면서
마치 나무처럼 커지기 시작합니다.
겨자는 이스라엘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자라지만,
특히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갈릴래아 지방에서 많이 서식합니다.
유채꽃 빛깔의 길쭉한 꽃도 피는데,
2~3월경 갈릴레아 호숫가를 산책하다 보면,
온 산과 들이 겨자 꽃으로 인해 노랗게 물듭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 한 가지는
그 작은 씨앗이 특별한 투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성장을 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 자라면 2~3미터는 물론이고,
기후가 좋은 요르단강 기슭이나 갈릴레아 호수 주변에서는
3~4미터 높이까지 자라나,
무성해진 가지 사이로 새떼들이 날아와 앉기까지 한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인 교회,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폭발적인 확장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장의 속도나 위세가 대단한 겨자씨를 비유로 드신 것입니다.
결국 언젠가 도래하게 될 최종적이고 궁극적 구원,
결정적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 말씀의 성장, 교회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해야 할 예수님의 협력자들인 것입니다.
엄청난 하느님의 나라이지만,
그 시작은 바로 ‘오늘날의 겨자씨 한 알’인 우리 각자로부터 시작됩니다.
나란 존재, 때로 죄 투성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 각자 안에는 은총의 겨자씨 한 알이 뿌려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의 씨앗을 멋지게 싹 틔워야겠습니다.
한 그루 명품 나무로 성장시켜야겠습니다.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매달고 그늘도 만들어
세파에 지친 어린 새들이 날아와 쉬도록 만들어야겠습니다.
△‘겨자씨의 비유’ (이콘).
■ 우리 안에 심어진 생명의 씨앗을 잘 가꿔나갑시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한 신자분의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습니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느냐? 누가 돌아가시기라도 했냐?’ 여쭸더니,
아니나 다를까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던 애완견이 세상을 떠나서,
막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강아지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한번은 마당에서 키우던 잡견 강아지가
병에 걸려 시들시들 앓다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급성 장염이었는데,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동물병원에 데려가
엑스레이 사진도 찍어보고, 주사도 맞춰보고 그랬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생명이 다한 녀석을
마지막으로 품에 안아보았는데,
그때 저는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과
생명이 끊어진 것이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모습,
그렇게 생기 있고 귀여운 모습이었는데,
죽고 나니 그런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온 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렸습니다.
바라보기도 싫었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
이거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더군요. 생명이 붙어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지속되어야 사랑스럽습니다.
숨을 쉬고 있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땅 위에 스스로 두 발로 서있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정말이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생명의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최초에 심어진 그 씨앗은 겨자씨만큼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사랑이 하느님 사랑과
부모의 사랑에 힘입어 무럭무럭 성장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군요.
우리 안에 심어진 생명의 씨앗이 무럭무럭 우리 안에서 자라나
우리 밖으로 성장해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생명도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어진 다양한 가능성의 씨앗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충만하게 실현시킬 때 우리 생명도 커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다 똑같은 수준의 생명이 아니더군요.
그저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생명,
자기만 알고 자기만 챙기는 이기적 생명은 차원이 아주 낮은 생명입니다.
그에 반해 참된 생명은 육적인 생명에 영적인 생명이 추가되는 생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통합되고 완성된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건네시는 생명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 안에 구체화시키는 인생이야말로
참 생명의 삶을 사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 순간 우리는 지상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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