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심과 마찬가지로 성모 성심,
곧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은 그분의 인격을 지칭하며,
성모님의 인격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으로 표현되는데,
오늘 복음에서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요시야 임금 시절부터 열세 살 이상의 모든 유다인은
민족의 고유 명절인 파스카 축제,
초막절, 오순절 등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해야 했는데,
순례를 하는 동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소년 예수가 남자 쪽에서,
요셉은 그가 여자 쪽에서 돌아오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나자렛에 가까이 다다랐을 때에 부모는
소년 예수가 자기들과 함께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찾아다니다가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다시 상봉하였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일성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였습니다.
이에 대해 소년 예수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퉁명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전합니다.
이에 앞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셨을 때에도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그 아기에 대하여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는데,
이때 다른 이들은 목자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놀라워하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19)라고 루카 복음은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 줍니다.
마리아는 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을까요?
버릇이 나쁜 아들을 교육시키려고 기회를 보면서 마음에 고이 간직했을까요?
분명 아니지요! 조용히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고자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사실 성모님은 일생 동안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조용한 삶,
숨겨진 삶을 사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 안에서
성모님께서 하신 역할은 이 사실을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 잔치에서 모두들 자기 일에 몰두하다 보니 잔치의 전체 흐름을 볼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술이 떨어진 사실도 모르고 있었지만,
성모님은 전체를 보고 계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들 예수님께 알려 주십니다.
성모님처럼 전체를 보려면 묵상과 관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앞만 바라보면서 내달리려는 경향이 다분히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고 되새기기 위하여 잠시 멈추어 서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여유와 관상의 시간이 절실한 요즈음입니다.
아울러 성모님에 대한 믿음과 신심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명상하도록 이끄는
요람이라는 사실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