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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1월 8일 (일) [백] 연중 제32주일.(평신도주일)

Berardus 2020. 11. 7. 20:12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1월 8일 (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주일)

    제1독서 (지혜 6,12-16) 제2독서 (1테살 4,13-18) 복 음 (마태 25,1-13)
    말씀, 그리스도인의 놀이터 삶은 악(惡)과 힘들고 끊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아 믿음으로 주님 사랑에 복종하고 단련하면 승리할 수 있어 성경은 하느님이 마련해주신 놀이터, 말씀 속에서 기쁨 찾아야

        이런 세상을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고작 미물에 불과한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그 동안 쌓아 온 인간의 규범이 망가진 기분입니다. 하찮은 바이러스에게 바깥 생활을 차단당하고 보니 긴 세월동안 축적했던 인간의 사회론이 묵살당한 기분도 듭니다. 함께 어울려 형성하던 우리의 갖은 행위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로 둔갑했고 더불어 누리던 행복과 기쁨을 반납당한 이즈음, 이 낯선 공간에서 어찌 지내시는지요? 삶은 악과의 끊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하느님을 향해서 깨어 살아가는 것은 악과의 힘든 투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악을 해명하지 않으십니다. 악을 설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으십니다. 악한 세력을 없애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처럼 악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그 렇게 하늘의 힘으로 악에 맞서서 승리하라 하십니다. 악에 대한 승리는 악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 안에서 생성되는 것임을 몸소 살아내라 하십니다.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복종”시키는 단호함을 챙기라하십니다. 부디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강권하십니다(1코린 9,27 참조). 그런 의미에서 더욱 오늘 독서 말씀이 심오하게 들립니다.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에 따순 위로가 듬뿍 담겨있으니까요.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예지라는 것, 오롯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사모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니까요. 솔직히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내던 우리입니다. 제발 한가하게 ‘멍’을 때릴 수 있는 여유를 우리는 갈망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 시간도 충분히 은혜입니다. 은총의 때입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서 주님과 훨씬 더 친해질 수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 없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결코 그분을 알아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지 못하기에 더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기에 더 알고 싶어 해야 옳습니다. 그 래서 저는 요즘에 성경을 통해서 오붓하게 그분과 깊게 교류하려 애쓰며 지냅니다. 그분과 조우하며 힘을 얻어야만 이겨낼 수 있는 사안이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께 아뢰며 봉헌하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임을 수없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손님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가게를 지나며 우리 주위에 널려있는 절망의 민낯을 보는 듯 했습니다. 많은 교우님께서 겪고 계신 어려움이 불쑥 다가왔습니다. 어서 두려움을 벗기고 희망의 옷을 입혀드리고 싶었습니다. 온 세상을 덧칠하고 있는 어둠의 그림자를 얼른 씻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교우님들께 간곡한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자주, 눈을 감고 하느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더 자주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며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채워”(로마 5,5)주시는 성령을 체험하기 바랍니다. 좋으신 우리 아빠 아버지로부터 세상의 것들에 실망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부여받으시길 원하고 원합니다. 아울러 그 동안 시간이 없어서 미뤘던 성경읽기에 도전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영의 놀이터입니다. 그분께서 마련해주신 영의 놀이터에서 탄탄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놀이터에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 중에도 최고의 축복을 얻어내는 비법이 숱합니다. 힘든 가운데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붙들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하는 비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주님께서 주신 삶의 교과서입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 땅에서의 행복은 ‘천상행복의 그림자’일 뿐임을 알고 있는 지혜인입니다. 때문에 우리 안에는 하느님을 끝없이 갈망하는 마음이 자리해 있습니다. 저는 이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이야말로 훗날, 이 땅에서의 여행을 마친 당신 자녀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영혼에 심어주신 내비게이션이라 믿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엉뚱한 길에서 헤매지 않도록, 곧장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귀향할 수 있도록 세워놓으신 하늘 길의 이정표라 믿습니다. 하느님 자녀의 자긍심으로 세상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붙들어주는 주님의 손길이라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마음을 반듯하게 펴서 원상복귀 시킬 수 있는 능력자이십니다. 마음의 허기를 그분 사랑으로 채우도록 합시다. 그분 사랑에 벅차오른 마음으로 복음을 자분자분 살아내는 향기를 지니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꾸며주신 세상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는 주님의 조력자가 되어 봅시다. 평신도 주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꾸며주신 말씀 놀이터, 성경의 애용자가 되어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말씀으로 하늘의 힘을 충전 받아 계속 타오르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장재봉 신부- [한주간 전례] 2020년 11월 9일 (월) [백]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이다.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낸다. [복음묵상] 요한 2,13-22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모든 복음서에서 전할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또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많은 사람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성전 정화 사건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께서 세상에 머물러 계시는 장소로 생각되던 성전은 더 이상 없습니다. 실제로 성전은 기원후 70년에 파괴되었고 그 이후 새로운 성전은 건립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전을 대신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시고 하 느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은 하느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사건 또한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허물어지지 않는 성전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10일 (화) [백]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레오 교황은 400년 무렵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440년 식스토 3세 교황의 뒤를 이은 그는 행정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깊 이 있는 설교로도 유명하였다. 레오 교황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일치와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재임 중인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 에우티케스, 네스토리우스 등의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교회를 수호하였다. 461년에 선종한 레오 교황을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7,7-10 대부분의 고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시대에도 이스라엘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는 종속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심히 일을 끝내고 돌아온 종에게 주인 자신이 먹을 음식을 먼저 준비하라는 주인의 모습은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 모든 일을 마친 뒤에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서는 지금 우리가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주인과 종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 당시 주님을 위하여, 주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나타내는 적절한 비유가 주인과 종의 관계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일하며 ‘누구를 위하여’ 행동할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일하거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인을 위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뿐입니다.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자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하느님께 더욱 다가서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표현합니다. 겸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런 삶의 태도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의 선택으로 결정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종의 겸손과 순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11일 (수) [백]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마르티노 주교는 316년 무렵 헝가리 판노니아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는데,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곧바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그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에는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이며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마르티노 주교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17,11-19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병에서 낫게 된 기적은 이렇게 짧게 표현됩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유일하게 병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람대로 병에서 치유됩니다. 그 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한 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의 감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그는 구원을 얻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은 치유와 구원에 대하여 말합니다. 나을 수 없는 병에서 치유된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이 곧장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가 구원으로 이어지는 그 사이에는 ‘감사’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많은 것을 청하지만, 그 기도와 청원이 모두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도와 청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자주 체험하고는 합니다. 우리는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청하는 것에는 익숙하고 감사하는 것에는 더딘 우리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청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비와 감사는 하나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12일 (목) [홍]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요사팟 주교는 1580년 무렵 우크라이나의 동방 교회 가문에서 태어났다. 장사보다는 영혼 문제에 관심이 더 많았던 그는 뛰어난 상인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수도원장까지 맡아 수도회 개혁을 주도하였다. 주교가 된 뒤에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가 1623년 이교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1867년 비오 9세 교황이 요사팟 주교를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7,20-25 복음서에서 말하는 가장 큰 주제는 하느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 역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비유는 대부분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보다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올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둡니다. 사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을 궁금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리사이들은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지 질문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라고 답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어느 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양한 비유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빵 속의 누룩처럼,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상상하지 못할 만큼 크게 자라는 작은 겨자씨처럼 쉽게 우리 눈에 띄지 않지만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으로 찾을 수 없습니다. 저기 또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지 묻기보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13일 (금) [녹]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7,26-37 구약 성경이 전하는 노아의 방주나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모두 죄에 따른 심판으로 재앙을 묘사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생각과 일만을 일삼았고, 이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없애 버리시기로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때에 물로, 소돔에는 불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십니다. 두 이야기에 공통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위하여 재앙을 내리시지만 노아와 롯을 구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재앙 가운데서도 의로운 이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도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에 예고 없이 심판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디’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지 예수님께 여쭙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죄와 악이 가득한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사람들의 모습을 반복하여 묘사하는 오늘 말씀은 일상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에서 죄와 악을 피하고 선과 정의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14일 (토) [녹]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8,1-8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는 대조와 역설을 통하여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도 그러한데,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는 핵심 내용을, 굳이 다른 설명이 없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하느님이 서로 대비됩니다. 이 둘은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유 속의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재판관에게 한 과부의 호소는 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과부는 끊임없이 재판관을 찾아가 졸라 댑니다. 그제야 재판관은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하고 마음먹습니다. 비록 귀찮음 때문이지만 계속 졸라 대는 과부의 청은 불의한 재판관마저도 마침내 올바른 판결을 내리게 만듭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판관과 선 하고 자비하신 하느님 사이에 차이가 생겨납니다. 불의한 재판관조차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데,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판결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제 비유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인 과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바라는 과부의 간절함은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 리에게 그런 간절함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분명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간절함으로 주님께 기도하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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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가에 낙엽들이 흐트러지는 요즘입니다. 진한 녹색을 자랑하던 잎 파리가 차즘 노란색, 주황색으로 물들어 단풍이 들었다 싶으면 어느 샌가 후두 둑 떨어집니다. 올 해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아 서서히 정리해 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