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행복을 선택하는 용기가 있는가?
연중 제31주일·모든 성인 대축일·
제1독서 (묵시 7,2-4.9-14)
제2독서 (1요한 3,1-3)
복음 (마태 5,1-12ㄴ) 그리스도 ‘행복 선언’은 우리를 회심의 길로 초대하기 위한 것
구약에서 행복이란 주님의 계명을 꿋꿋이 지키는 것을 의미
저마다 자신의 상황에 맞는 요소들을 실천해 나가면서
온유하고 겸손하며, 양심을 지키고 평화를 이루는 삶 살아야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시편 112,1)
이 묵상을 준비하고 있는데
깊은 우울감에 빠진 지인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말씀을 가르치면서 행복하세요?
저는 지금 세상이 뽀얗게 보여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우리 삶에 가져온 변화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삶에서 추방했던 주제인 고통,
죽음과 내세의 삶, 부활, 참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함께 나누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행복론」이라는 책을 쓴 것도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집에 머물러야 할 때였습니다.
행복의 본질과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것은
건강한 자아를 지니고 살도록 돕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시어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십니다.
‘참된 행복의 교육자’인 예수님은 우리 신앙 자아,
곧 하느님 자녀의 틀을 빚고, 하느님 자녀로서
우리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성장시킵니다.
■ 복음의 맥락
행복선언(마태 5,1-12)은
세 가지 구조로 돼 있습니다.
첫째는 행복하여라 선언,
둘째는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태도,
셋째는 이 행복의 근거입니다.
하느님 현존과 그분의 역사하심은
처음부터 마지막 행복까지
모든 참된 행복의 근본이며 전제입니다.
행복선언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 인생을 인도하는 예수님의 시편입니다.
예수님이 “행복하여라”를 후렴처럼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고정관점이
하느님 판단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회심하도록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 행복하여라?
참된 행복선언은
예수님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오랜 전통과 맥을 잇습니다.
“행복하여라”로 번역된 그리스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는
고전 그리스어에서 신들의 상태,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신약의 ‘마카리오스’를 이해하려면
행복의 상태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
구약 히브리어 ‘아세르’(רשא)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히브리어의 어원은
‘가다’, ‘앞으로 나아가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행복은 주님의 길,
그분 계명을 지키는 삶의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저는 꿋꿋이 걷고 당신 길에서
제 발걸음 비틀거리지 않았습니다.”(시편 17,5)
행복선언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선택하고 살아야 할 지침입니다.
▲세바스티아노 리치 ‘산상설교’ (일부)
■ 행복하려면 선택해야 할 태도
예수님은 이어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 실천해야 할
여덟 가지 태도를 가르치는데,
이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열어야 하는 문과 같습니다.
각자 상황과 은사를 존중하는 예수님은
우리가 ‘저마다 자기 길에서’ 도움이 되는
요소를 실천하며 거룩한 사람이 되기 원했을 것입니다.
“행복선언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63-69항)
제 상황에서 특히
마음에 깊이 남는 것은 세 가지 행복입니다.
첫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가난한’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토코스’(Φτωχóς)의 어원은 ‘거지, 걸인’입니다.
빈손이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외부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가난할 때만 하느님 섭리에
의존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절절히 깨닫습니다.
마음이 꺾인 사람, 가난한 사람은
우월감을 느끼거나 완고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온유와 겸손이라는 말은
구약 역사 안에서 슬퍼하는 이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박해와
모욕을 당한 이들이 지닌 하느님을 신뢰하는 태도인데,
이는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받았던 최고의 걸인
예수님과 하느님 자녀의 본질적인 상태를 함축합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하느님이 그에게 하늘나라,
곧 하느님 자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움직였던 것과 같은
영을 갖고 살아가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둘째,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우리 마음은 나약함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더러워질 위험이 있습니다.
내 안에, 다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보려면
매일 마음의 거울을 정성스럽게 닦아야 합니다.
십계명, 성경 말씀, 교회 가르침, 기도,
봉사는 모두 흐려진 양심의 거울을 닦는 수건입니다.
화답송인 시편 24편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거행하던
전례를 묘사하는데, 하느님 사시는 곳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이의 조건을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제일 중요한 조건은 하느님 얼굴을 찾고
깨끗한 손과 결백한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시편 24,3-4)
매일 다윗처럼 기도합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셋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행복선언의 모든 태도가 필요하니 가장 어렵습니다.
하느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다른 어떤 행복보다
가장 뛰어나고 귀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이웃과
조화를 이루는 선한 영혼의 상태입니다.
평화와 반대되는 것은
미움, 분노, 질투, 격분, 위선입니다.
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하느님 자녀라고 불립니까?
그는 타인에게 평화를 선물하며
평화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닮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행복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자신 안에서 육과 영 사이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 성인, 행복의 촉진자
모든 성인들의 축일에 행복선언을
자기 삶으로 해석한 성인들 생애를 떠올립니다.
바오로부터 체칠리아, 에디트 슈타인, 성삼의 엘리사벳,
마더 데레사 등 성인들 생애는
대부분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행복이 아니라 실패입니다.
참으로 메마르고 비극적인 생애입니다.
그러나 고통 안에서
희망을 증언한 성인들은 ‘행복의 촉진자’로서
후세대에 ‘희망하는 것의 행복’을
유산으로 남겨 줬기에 행복합니다.
성인들은 오늘도 우리가 저마다 자기 길에서
행복선언의 길을 선택하도록 용기와 영감,
행동하도록 하는 힘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동반과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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