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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1월 1일 (일) [백] 모든 성인 대축일

Berardus 2020. 10. 31. 07:15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1월 1일(일)
    [백] 모든 성인 대축일

    제1독서 (묵시 7,2-4.9-14) 제2독서 (1요한 3,1-3) 복음 (마태 5,1-12ㄴ)
    행복을 선택하는 용기가 있는가? 그리스도 ‘행복 선언’은 우리를 회심의 길로 초대하기 위한 것 구약에서 행복이란 주님의 계명을 꿋꿋이 지키는 것을 의미 저마다 자신의 상황에 맞는 요소들을 실천해 나가면서 온유하고 겸손하며, 양심을 지키고 평화를 이루는 삶 살아야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시편 112,1) 이 묵상을 준비하고 있는데 깊은 우울감에 빠진 지인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말씀을 가르치면서 행복하세요? 저는 지금 세상이 뽀얗게 보여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우리 삶에 가져온 변화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삶에서 추방했던 주제인 고통, 죽음과 내세의 삶, 부활, 참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함께 나누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행복론」이라는 책을 쓴 것도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집에 머물러야 할 때였습니다. 행복의 본질과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것은 건강한 자아를 지니고 살도록 돕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시어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십니다. ‘참된 행복의 교육자’인 예수님은 우리 신앙 자아, 곧 하느님 자녀의 틀을 빚고, 하느님 자녀로서 우리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성장시킵니다. ■ 복음의 맥락 행복선언(마태 5,1-12)은 세 가지 구조로 돼 있습니다. 첫째는 행복하여라 선언, 둘째는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태도, 셋째는 이 행복의 근거입니다. 하느님 현존과 그분의 역사하심은 처음부터 마지막 행복까지 모든 참된 행복의 근본이며 전제입니다. 행복선언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 인생을 인도하는 예수님의 시편입니다. 예수님이 “행복하여라”를 후렴처럼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고정관점이 하느님 판단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회심하도록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 행복하여라? 참된 행복선언은 예수님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오랜 전통과 맥을 잇습니다. “행복하여라”로 번역된 그리스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는 고전 그리스어에서 신들의 상태,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신약의 ‘마카리오스’를 이해하려면 행복의 상태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 구약 히브리어 ‘아세르’(רשא)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히브리어의 어원은 ‘가다’, ‘앞으로 나아가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행복은 주님의 길, 그분 계명을 지키는 삶의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저는 꿋꿋이 걷고 당신 길에서 제 발걸음 비틀거리지 않았습니다.”(시편 17,5) 행복선언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선택하고 살아야 할 지침입니다. ■ 행복하려면 선택해야 할 태도 예수님은 이어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 실천해야 할 여덟 가지 태도를 가르치는데, 이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열어야 하는 문과 같습니다. 각자 상황과 은사를 존중하는 예수님은 우리가 ‘저마다 자기 길에서’ 도움이 되는 요소를 실천하며 거룩한 사람이 되기 원했을 것입니다. “행복선언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63-69항) 제 상황에서 특히 마음에 깊이 남는 것은 세 가지 행복입니다. 첫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가난한’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토코스’(Φτωχóς)의 어원은 ‘거지, 걸인’입니다. 빈손이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외부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가난할 때만 하느님 섭리에 의존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절절히 깨닫습니다. 마음이 꺾인 사람, 가난한 사람은 우월감을 느끼거나 완고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온유와 겸손이라는 말은 구약 역사 안에서 슬퍼하는 이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박해와 모욕을 당한 이들이 지닌 하느님을 신뢰하는 태도인데, 이는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받았던 최고의 걸인 예수님과 하느님 자녀의 본질적인 상태를 함축합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하느님이 그에게 하늘나라, 곧 하느님 자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움직였던 것과 같은 영을 갖고 살아가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둘째,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우리 마음은 나약함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더러워질 위험이 있습니다. 내 안에, 다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보려면 매일 마음의 거울을 정성스럽게 닦아야 합니다. 십계명, 성경 말씀, 교회 가르침, 기도, 봉사는 모두 흐려진 양심의 거울을 닦는 수건입니다. 화답송인 시편 24편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거행하던 전례를 묘사하는데, 하느님 사시는 곳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이의 조건을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제일 중요한 조건은 하느님 얼굴을 찾고 깨끗한 손과 결백한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시편 24,3-4) 매일 다윗처럼 기도합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셋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행복선언의 모든 태도가 필요하니 가장 어렵습니다. 하느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다른 어떤 행복보다 가장 뛰어나고 귀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이웃과 조화를 이루는 선한 영혼의 상태입니다. 평화와 반대되는 것은 미움, 분노, 질투, 격분, 위선입니다. 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하느님 자녀라고 불립니까? 그는 타인에게 평화를 선물하며 평화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닮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행복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자신 안에서 육과 영 사이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 성인, 행복의 촉진자 모든 성인들의 축일에 행복선언을 자기 삶으로 해석한 성인들 생애를 떠올립니다. 바오로부터 체칠리아, 에디트 슈타인, 성삼의 엘리사벳, 마더 데레사 등 성인들 생애는 대부분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행복이 아니라 실패입니다. 참으로 메마르고 비극적인 생애입니다. 그러나 고통 안에서 희망을 증언한 성인들은 ‘행복의 촉진자’로서 후세대에 ‘희망하는 것의 행복’을 유산으로 남겨 줬기에 행복합니다. 성인들은 오늘도 우리가 저마다 자기 길에서 행복선언의 길을 선택하도록 용기와 영감, 행동하도록 하는 힘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동반과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임숙희(레지나)- [한주간 전례] 2020년 11월 2일 (월) [자]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 그들 가운데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11,25-30 구약 성경에서 지혜와 슬기는 인 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로 표현됩니다. 이 선물을 통하여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다른 어떤 선물이 아닌 지혜를 청한 솔로몬이나, 지혜 문학이 들려주는 삶에 대한 성찰들은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참된 선물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지혜 문학은 지혜와 하느님의 뜻을 연결시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곧 지혜이고, 지혜를 얻는 가장 쉬운 길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 곧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식과 생각에 가려져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오히려 복음에서 철부지로 표현된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 늘 예수님의 말씀은 한 발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초대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멍에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참된 안식을 위한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를 얻는 길이고, 하느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은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사람들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3일 (화) [녹]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4,15-24 하느님의 초대와 그것에 대한 거부는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주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사람들은 그 초대에 기쁘게 응답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초대와 사람들의 거부를 주제로 합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언제 열리는지 미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준비되었을 때, 때가 되었을 때, 주인은 이미 초대받은 이들에게 잔치에 오라고 알리지만 사람들은 초대를 거부합니다. 이미 초대받은 사람들은 밭을 사고, 겨릿소를 부리고, 장가를 들었다는 다양한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처음에 초대하지 않았던 이들을 불러 그의 집을 가득 차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또한 이 비유는 처음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던 유다인들이 아닌 다른 이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어떻게 포함되었는지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초대하셨고 우리는 초대받은 사람들이지만 초대받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때가 되었을 때, 하느님 나라가 준비되었을 때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유가 말하듯이 그 시간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준비와 응답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지금 초대에 준비하고 응답하기 위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초대에 우리가 제대로 응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4일 (수) [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1538년 이탈리아 북부 지방 아로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비오 4세 교황이 그의 외삼촌이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찍부터 학문 연마에 힘썼으며, 사제가 되어 훗날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된 뒤에는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제도적인 지원책을 마련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584년에 선종한 그를 1610년 바오로 5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4,25-33 공관 복음에서 제자가 되는 것을 말할 때, 공통적인 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우선 무엇이 나의 십자가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 뒤를 따르기를 요구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쉽지 않지만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따르는 모습 안에서 제자로서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예가 들어 있습니다. 탑을 세우는 사람은 공사를 마칠 수 있는지 계산해 봅니다. 탑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전투에 나서는 임금은 상대방의 전력을 헤아려 싸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아 무런 승산이 없다면 화해를 청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 예시들은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식별이 필요하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탑을 세우는 사람이나 전투에 나서는 임금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은 그것을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렇게 ‘내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것’을 지는, ‘나’에 연연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5일 (목) [녹]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5,1-10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하느님 나라의 선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가르침을 통하여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던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이런 모습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보여 주신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그 단면을 보여 줍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물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볼멘소리지만, 오히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을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죄를 용서하시고, 죄인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화해하시며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드러내시려고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와 화해를 나타냅니다. 지금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의 의미와 비슷합니다. 죄인들도 하느님의 식탁에 초대받은 자녀들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죄인을 받아들이고 친교 안에 함께 머무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일 수도 은전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나 은전 아홉 닢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한데 모여 친교를 나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식탁에 모두가 모인다는 것은 하늘에서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분명 기쁜 일입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행동에 동참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6일 (금) [녹]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6,1-8 많은 사람이 오늘 복음의 비유를 읽으면서 의문을 가질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해 보이는 집사를 칭찬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비유 속의 집사처럼 자신을 내쫓는 주인에게,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는 사람에게 집사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불의한 집사의 비유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상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찾습니다. 불의한 집사는 그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자기 자리를 잃게 된 집사는 ―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표현되지는 않지만 ― 세상의 셈법대로 자신을 위하여 행동합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동은 정의에 따른 것도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주인과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그런 집사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집사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의 행동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찾아가는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신앙인들 또한 믿음 안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찾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 안에도 영리한 사람들이 있듯이 우리도 신앙 안에서 영리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도 줄 수 없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리함보다 더 영리하게 우리의 구원을 찾고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7일 (토) [녹]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6,9ㄴ-15 루카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 비교하여 재물을 사용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부유함을 좇기보다 가난을 실천하고, 이웃들과 재물을 나누라고 권고합니다. 이렇게 가난과 나눔을 강조하는 것에서 당시 공동체 안에 그만큼 빈부 격차가, 부와 가난의 문제가 심각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참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동체 안의 이런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현실적이고 실천을 강조하는 가르침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루카는 재물을 도구처럼 표현합니다. 신앙인들은 재물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재물을 많이 모으고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눔은 재물을 사용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재물은 분명 삶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누구도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목적이며 재물은 도구일 뿐입니다. 재물이 목적이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세상 안에서 재물을 다루며 살아가지만 어디에 목적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목적과 도구를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방향을 잃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삶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일깨우며 언제나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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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성월입니다. 누구나 한 번은 맞게 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 의미를 되짚어 보는 달이기도 합니다. 또 돌아가신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 이웃들을 떠올리고 기도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위령성월 중 11월 2일은 교회 전례력에서 모든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인 ‘위령의 날’입니다. 이날은 무엇보다 아직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이 빨리 정화돼 복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인대축일 다음날을 위령의 날로 지내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성인들을 먼저 기념하고 그 다음날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짙어가는 가을과 함께 먼저 가신 분들을 떠 올려 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