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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1월 15 (일) [녹] 연중 제33주일 / 세계 가난한 이의 날

Berardus 2020. 11. 14. 05:54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1월 15 (일)
    [녹] 연중 제33주일 /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제1독서 (잠언 31,10-13.19-20.30-31) 제2독서 (1테살 5,1-6) 복음 (마태 25,14-30)
    ‘좋은 기다림, 나쁜 기다림’ 감사하는 마음과 성실함이 없으면 근거 없는 공포로만 이어져 하느님 당도하실 시간 기다리며 훌륭하고 지혜롭게 살면 진정한 자유와 존엄 누리면서 기다림의 결실 보상받아 주어진 삶 받아들이고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항상 간직해야

        얼마 전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든 생각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이렇게 모두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마음을 모으는 거구나…. 코로나19의 종식만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사라져가는 시간의 뒷모습만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시간의 앞모습을 성실히 맞이할 준비가 아닐까 합니다. 마치 버스의 앞모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듯이…. 오늘 전례의 본문은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복음)의 대조를 통해 어떻게 기다려야 제대로 기다리는 것인지를 정확히 알려줍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행복한 삶’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다림’도 누구나 예외 없이 경험하는 시간이지만 기다림의 ‘결과’는 분명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 복음의 맥락 지난주에 선포된, 미리 깨어 준비하는 기다림에 대한 주제가 이번에도 이어집니다. 비유가 전개되는 큰 맥락은 비슷한데, 모든 것을 결정지을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이제 그 주인의 도착이 거의 다다랐음을 알립니다. 다만 주인의 도착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도착이 구체적으로 언제일지 알 수 없다는 것, 주인을 기다리는 이들 중 몇몇은 확실한 신뢰와 전망 속에 성실히 준비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것, 결국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인이 와서 최종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것 등입니다. ■ 착함과 악함 비유에는 주인과 세 명의 종이 등장하며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깁니다.”(마태 25,14) 이때 “각자의 능력에 따라”(15절)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한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세 번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가 주어집니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19절) 되는데, 두 명의 종들은 “착하고 성실한 종”(21.23절)으로 평가받습니다. 주어진 탈렌트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받은 선물을 잘 활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인은 종들이 벌어들인 외적 성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은 종에게나 두 탈렌트를 벌은 종에게나 동일한 평가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1.23절) 주인은 거저 받은 탈렌트에 대한 감사와 성실함이 있었는지의 여부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악’하다고 언급한 부분에 주목하게 되는데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5절)라며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종을 과연 ‘악’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유의해서 보면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받은 한 탈렌트를 그냥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24-25절) 이 대답은 현실에 대한 부정적 판단과 왜곡이 ‘악’임을 알려줍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사실과 다른 거짓과 오해가 모든 문제를 발생시킨 악의 근원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완고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심지 않고 뿌리지 않는) 인색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고, 동시에 그러한 왜곡은 근거 없는 공포로 이어집니다. 주인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이기적 보신(保身)주의가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게 하는 무능함과 비굴함을 갖게 한 것인데, 이처럼 불합리하고 부당한 공포가 유혹과 유감의 실체가 됨을 알려줍니다. ■ 빛의 자녀와 훌륭한 아내 복음에서 제시된 두 부류의 사람들(“착하고 성실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의 대조를 제2독서에서는 “빛의 자녀”와 “어둠에 속한 이들”로 표현합니다.(1테살 5,5) 이 구분이 시작되는 지점은 ‘시간과 때’에 대한 이해인데(1절) 이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마주하느냐에 따라 빛의 자녀로 살게 되기도 하고 어둠의 자녀로 살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그리스어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이며, ‘크로노스’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이성적으로 측량할 수 있는 시간을, ‘카이로스’는 측정하거나 계획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결정적이며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언제주인이 올지 누구도 알 수 없기에 그 알 수 없이 지나가는 시간은 ‘크로노스’이지만 주인이 당도하는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시간의 종말’은 크로노스이지만 ‘종말의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일상을 ‘카이로스’로 사는 지혜를 제1독서는 ‘훌륭함’으로 묘사합니다. “훌륭한 아내”의 모습을 통해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데 그녀가 훌륭한 이유는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30절)이기 때문입니다. 소통의 불가능성은 현대인들에게 자주 발견되는 한계이며 걸림돌입니다. 소위 ‘불통’이라고 불리는 현상은 대체로, 상대에 대한 의심이나 왜곡 때문에 발생하는데 불통 자체도 문제이지만 사실 더 심각한 것 은 그로 인해 삶을 허비하고 스스로를 무기력한 좌절과 우울로 빠지게 하는 퇴행입니다. 1탈렌트는 6000데나리온 정도에 해당하고,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기에, 1탈렌트를 받았다 해도 사실은 매우 큰돈을 받은 것입니다. 그다지 부당한 대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에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9절)라고 경고하십니다. 지나치게 과민한 부정과 왜곡은 불합리한 공포와 불안을 가져다주지만 겸손과 신뢰, 그로 인한 공감과 집중은 진정한 자유와 존엄을 가져다줍니다. 현실과 주변의 조건을 곡해하여 갈등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성실하고 용감한 자세로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더 좋은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훌륭한’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결정적인 순간, 그 ‘카이로스’에 불현 듯 구원이 다가와 그동안의 견딤과 기다림의 결실을 보상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물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를 삶의 중심에 둘 때에 정립되는 가치입니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기 때문입니다.(잠언 31,30) -김혜윤 수녀- ▲전북 승티리소재 되재성당 [한주간 전례] 2020년 11월 16일 (월) [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8,35-43 오늘 복음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눈먼 이가 예수님께 청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복음의 이 장면은 유일하게 예수님을 직접 다윗의 자손으로 표현합니다. 메시아를 나타내는 이 표현에는 임금의 모습으로 다스리시러 오시는 구원자의 표상이 담겨 있습니다. 이 호칭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내용이 단순히 눈을 뜨게 하는 치유가 아니라 믿음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눈먼 이의 모습에서도 믿음을 드러내는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위의 만류, 아니 좀 더 강하게 말한다면 주위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시어, 눈먼 이는 다시 보게 됩니다. 다시 보게 된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위하여 예수님께 청하고 부르짖습니다. 또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며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충실하게 따르는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다른 이들도 하느님을 경험하고 그분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된 눈먼 이의 이야기는 우리를 위한 믿음의 이야기가 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17일 (화) [백]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엘리사벳 성녀는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성녀는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엘리사벳은 남편이 전쟁으로 사망하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하여 기도 생활과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1231년 스물넷의 이른 나이에 선종한 엘리사벳 성녀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19,1-10 자캐오는 세리이며 부자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세리들은 세금을 징수하면서 부당하게 이득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로마는 세금을 효율적으로 거두어들이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세금 징수원으로 고용하고 세금이 덜 걷히면 세리들이 물어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제도는 자연스럽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외면 받았고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를 이롭게 하는 민족의 반역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자캐오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데에서 이미 그가 사람들에게 큰 죄인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살았을 그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캐오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기쁨은 벌써 자캐오를 변화시킵니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가 변화되는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자캐오가 이전의 삶을 바꾸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국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기쁨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이전의 것을 바꾸어 이웃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힘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서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18일 (수) [녹]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9,11ㄴ-28 루카 복음서가 전하는 미나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서의 탈렌트의 비유와 같습니다. 화폐의 가치에는 차이가 있지만 비유가 전하는 내용은 거의 비슷합니다. 미나는 당시의 그리스 화폐로 탈렌트보다 작은, 100 드라크마(= 데나리온)의 가치를 가지는 동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길을 나서면서 자신의 종들에게 한 미나씩 나누어 줍니다. 그 귀족은 명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알려 줍니다.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오늘 복음의 비유는 아무런 벌이를 하지 못한 종에 초점을 둡니다. 다른 종들은 성실함으로 칭찬받지만 그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 종의 생각은 이러하였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재능을 활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은 사용한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의 미나로 열 미나와 다섯 미나를 벌어들이는 종들처럼 재능은 쓰면 쓸수록 더 많아지고 풍성해집니다. 단순하게 하느님을 냉혹하시고 벌하시는 분으로만, 엄하신 분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재능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19일 (목) [녹]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9,41-44 오늘 복음 내용은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다음에 나옵니다. 제자들과 군중은 임금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오시는 예수님을 맞아들이며 환호합니다. 그런데 환호하는 군중과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우셨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군중과 예수님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예루살렘은 실제로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하여 파괴됩니다. 예수님의 예고는 그대로 이루어졌고 복음서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매우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전하시는 말씀은 예언자들의 선포를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며 하느님의 슬픔을 표현합니다(예레 9,1; 13,17; 14,17 참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이 표현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이름을 암시합니다. 예루살렘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 이름에는 ‘평화’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 예루살렘은 그다지 평화롭지 못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곳이며, 사도들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한 곳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환호하던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예고대로 파괴되고, 아픔을 간직한 곳은 기쁨을 선포하는 곳으로 변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 삶에 때로는 기쁨이 있고, 그 안에서 때로는 절망을 경험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께서는 희망을 통하여 구원을 향한 여정을 이끌어 가십니다. 지금도 하느님의 구원 업적은 우리 안에서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20일 (금) [녹]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9,45-48 유다교에서 성전은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제사의 의식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제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사제들은 조를 나누어 돌아가면서 성전에 머물며 봉사하였습니다(1역대 24장 참조). 그렇다고 성전이 제사를 바치는 곳만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이자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루카 복음서에서 성전은 가르침의 장소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만이 아니라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은 사도들과 신앙인들에게 기도의 장소였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십자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행동은 성전만이 아니라 유다교의 제도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성전이 참의미를 잃고 수단과 도구로만 사용된다면 종교의 모든 제도는 하느님을 잊은 채 인간의 이익만을 위하여 남습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삶의 태도와 생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다만 나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신앙은 가치를 잃습니다. 그 가치를 되돌려 놓는 것이 정화의 참뜻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1월 21일 (토)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하였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성모님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전해 온다. 이날은 본디 6세기 중엽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2,46-50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혼란스러워합니다.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고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면 당시에 ‘형제’라는 표현이 지금보다는 넓은 의미로 이해되었고 사촌들에게도 적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관계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형제자매로 생각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보여 주고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죄인으로 여겨지던 이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이것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과 마찰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과부들도 돌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을 공동체 안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계에서 벗어나시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가십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도 이런 새로운 관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새로운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이 가지는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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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차 추워지는 날씨입니다. 단풍은 이제 낙엽이 되어 산과 들, 길가에 흩날리고 청소하는 아저씨의 빗질이 바빠지는 요즘입니다. 이번 주일 누군가 이웃을 위한 한 가지 선행을 계획해 보면 어떨까요?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