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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0월 25일 (일) [녹] 연중 제30주일

Berardus 2020. 10. 24. 06:22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0월 25일 (일)
    [녹] 연중 제30주일

    제1독서 (탈출 22,20-26) 제2독서 (1테살 1,5ㄴ-10) 복음 (마태 22,34-40)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사랑이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것 모르면 충실한 신앙인이 될 수 없어 자기 중심주의에 빠지지 않고 친교와 일치 이루는 길 걸어가야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빛’을 선물로 주시려고 우릴 부르십니다. ‘진리 안에 사랑’으로 자유를 누리게 해주십니다. 사랑의 문화를 가꾸기 위해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돕는 소명에 응답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하느님은 ‘자비의 얼굴’이십니다(탈출 22,26). 주님께서는 이방인, 과부나 고아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주십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을 보호해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하고 미소한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테살로니카 교회의 모습을 전합니다(제2독서).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와 형제애를 나누는 삶이 그리스 지역교회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신자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을 기다리는 그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랑의 교회입니다. 세기 초 이스라엘의 종교단체였던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율법의 준수를 지상 생명으로 여겼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가 주님과 부활 논쟁 끝에 말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파가 한데 모였습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대표로 주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스승님,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유다 율법(모세 오경, 토라)에 기록된 계명에 밝은 율법 학자가 이런 질문을 하다니요? 바리사이파는 토라에 613개의 계명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 가운데 행하라는 명령은 우리 몸의 뼈와 장기의 수(248)와 같고, 해서는 안 되는 금령은 한해의 날 수(365)와 같답니다. 어느 누가 이들 계명의 법정신과 상대적 중요성을 알고 기억하겠습니까? 율법 교사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은 ‘하느님 사랑’(신명 6,5)입니다. 둘째 계명인 ‘이웃사랑’(레위 19,18)도 이와 같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 (마태 22,40) 하시며 정설을 펴십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양한 인간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입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십계명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이는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공동체 생활의 근본 규칙입니다. 초기 교회의 모습에서 보듯이 신앙의 조상들은 그룹 중심으로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느님의 이미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모른 채 충실한 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회의 성사와 기도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친교 속에 한 분이신 것처럼 기도와 성사로 친교를 이루는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보답하라고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이웃사랑은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웃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 13,9)입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마태 5,17)입니다. 사랑의 손길이 이웃에 따뜻이 전해질 때 사랑은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루카 10,29 이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생 여정에서 주님께서 만나게 해주시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이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웃사랑의 기준은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많은 사람이 참된 자신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존심의 결여나 열등의식, 자기학대나 비하와 증오도 문제이지만,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매사에 자기 것만 챙기는 탐욕과 일등에 집착하는 ‘자기중심’에 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묵상집 「사랑」을 읽고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예의 바른 행동이고, 이웃을 소유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줍니다. 우상에 사랑을 빼앗기지 않고 이웃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희생이며, 마음의 문을 열고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용서하고 화해합니다. 사랑은 영원하기에 인내하는 가운데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친교와 일치를 이루는 성덕의 길로 나아가는 여정임을 마음에 새깁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2 코린 6,16)입니다. 기도와 성사로 사랑의 계단을 오르고,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내려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입니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한주간 전례] 2020년 10월 26일 (월) [녹]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3,10-17 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될까요?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탈출 20,11ㄱ). 그런데 피곤을 모르시는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휴식을 취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를 알려면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왜 창조하셨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안에 넘치는 사랑을 아끼지 않으시고 누군가에게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창조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먼저 창조하신 것은 인간에게 풍요로운 환경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렛날, 그분께서는 그 인간을 드디어 만나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분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온전히 만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안식일은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과 일치’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율법은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허리 굽은 여인은 안식일에 회당에 있었는데도 도저히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사정을 헤아리셔서 그 여인에게 손을 얹으시어 낫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인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손길로 병마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분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반면 회당장은 굳이 안식일에 치료를 해야 하냐며 분개합니다. 그는 안식일의 참의미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27일 (화) [녹]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3,18-21 1955년 12월 1일,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사는 흑인 로자 파크스가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기사의 요구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들은 버스 이용을 거부하며 항의하였고, 마틴 루서 킹을 중심으로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이 전개됩니다. 결국 법원은 로자 파크스의 벌금형을 무효로 하고 몽고메리 버스의 인종 차별을 없앨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듬해에는 공공 운송 수단에서 인종 차별은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고, 1964년에는 공공시설에서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연방 시민권법이 제정됩니다. 로자 파크스의 작은 행동이 많은 흑인에게 힘을 주었고 인종 분리법 폐지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주 조그마한 겨자씨와 같아서 처음에는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을 정원에 심으면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작은 행동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겨자씨와 같은 작은 실천 하나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겨자씨를 이 사회라는 정원, 우리 가정이라는 정원에 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심을 때 정녕 하느님 나라는 자라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몸소 겨자씨가 되시어 골고타라는 정원에 묻히시고 당신 스스로 썩어 없어지심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십자 나무를 남기시지 않으셨습니까?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28일 (수) [홍]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시몬 성인과 유다 성인은 열두 사도의 일원이다. 시몬 사도는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었다가 제자로 선택되었다. 그는 주로 페르시아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약 성경』의 유다 서간 저자인 유다 사도는 유다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도는 예수님의 친척일 가능성도 있다. 예수님의 형제로 언급되는 복음 구절에 같은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마태 13,55) [복음묵상] 루카 6,12-19 몇 년 전에 나온 공익 광고 내용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태극기를 다는 국경일 하루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국가 대표 축구 경기를 보는 90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순국선열을 위하여 묵념하는 1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독도에 관한 뉴스를 접하는 그 순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나라 사랑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 광고 내용을 하느님 나라의 백성에게 맞추어 바꾼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그 짧은 순간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가를 부르며 감동을 받는 순간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비신자인 배우자가 오늘도 성당 가냐고 구박을 할 때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힘든 일이 생겨서 주님께 기도를 해야 하는 경우에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외국에 가면 누구나 다 애국심이 생기고, 국가 대표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도 성당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순간 교회의 대표, 하느님 나라의 국가 대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사도란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 열두 명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녕 사도들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통하여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도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29일 (목) [녹]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3,31-35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이 평화로운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에 의하여 도시가 함락되어 성전이 무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약 100년 뒤에 도시가 재건되었으나 이후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등 주변 강대국에게 침탈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왜 예루살렘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을까요? 예루살렘은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을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우상 숭배를 마다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이를 비판하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지만, 그곳 주민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언자들을 박해하거나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루카 19,42)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언자들 가운데 최고의 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그곳에서 목숨을 바치시고자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그들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그곳 골고타산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하시며 평화의 길을 선포하십니다. 또 그곳에서 부활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라고 인사하시며 당신의 평화가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십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30일 (금) [녹]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4,1-6 문제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혼인을 준비하면서 예식장은 어떠해야 하고, 혼수는 얼마만큼 해야 하고, 답례품은 무엇을 해야 하고, 혼인식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혼인하기 전부터 신랑과 신부가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혼인식의 본질은 서로의 사랑을 진심으로 확인하는 데에 있지, 예식을 ‘성공적인 이벤트’로 잘 치르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레지오 마리애 단장이 신입 단원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였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이 사람이 내가 이제 갓 입단하였다고 무시하는 것이 틀림없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도 문제를 본질적으로 풀려고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도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치료 행위가 금지된 안식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안식일 법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니, 이날만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안식일의 본질을 보셨고,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자꾸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문제를 엉뚱하게 풀어 나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31일 (토) [녹]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4,1.7-11 예전에 어느 선배 신부님이 다음과 같은 묵상 내용을 나누어 준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가 땅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모든 것이 너무나 작게 보이고 하찮게 보입니다. 신부님은 이를 보면서 ‘세상에서 목에 힘을 주고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을 이처럼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반면 비행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땅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산, 강, 건물, 자동차 등 모든 것이 분명하고 크게 보이며, 각각의 형태를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늘에만 머무시지 않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를 작게만 보시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 잘 아시고자, 더 잘 이해하시고자 내려오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되시는 겸손을 갖추셨던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낮은 자리는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 필수적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자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정녕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을 낮추시어 그들이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이끄시고,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을 높이시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음을 겪으신 당신과 함께 부활의 삶을 누리도록 인도하십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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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가을날이 요즘 연속되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과 살짝 비치는 단풍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번 주말에는 조경봉사나 할까 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