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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신앙유산(信仰遺産)] 서울대교구 /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식 터

Berardus 2020. 10. 20. 13:11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식 터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식이 거행된 서울 수표교 이벽의 집 인근에 기념표석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 1754 ~ 1785)의 집에서 세례식이 최초로 거행되어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가 성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2011년 8월 28일 기념표석을 세우고 이어 9월 26일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이벽의 집은 수표교 남쪽, 현 기념표석 청계천 건너편으로 추정되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곳에 설치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은 북경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Grammont, 梁棟材, 1736~1812, 요셉) 신부에게

1784년 2월경 세례명을 베드로로 정하고 세례를 받고 귀국,

그해 9월(음력)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2),

정약용(丁若鏞, 요한, 1762~1836)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1759~1801, 요한),

최인길(崔仁吉, 1765~1795, 마티아), 김종교(金宗敎, 1754~1801, 프란치스코)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신앙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이벽의 집이 서울 수표교,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15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기록에 근거해

 그 근처에 기념 표석을 건립했다.

 

표석은 현재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05 건물

 ‘두레시닝(주)’ 앞 현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 청계천변 인도에 세워져 있다.

이벽의 집은 수표교 남쪽, 현 기념표석 청계천 건너편으로 추정되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곳에 설치했다.

 

표석은 가로 98㎝, 세로 75㎝, 높이 20㎝ 기단석에 가로 75㎝,

 세로 75㎝, 높이 76㎝의 화강석 빗돌을 올리고 오석을 붙여

 한국천주교 창립 터라는 사실을 밝혀놓았다.

 표석에는 "1784년(정조 8년) 겨울, 수표교 부근 이벽(1754~1785)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식이 거행돼 한국 천주교회 첫 공동체가 성립되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기념표석 근처에 있는 수표교는 청계천 복원 사업 당시

 새로 놓은 다리여서 옛 수표교와는 역사적 관련이 없다.

1441년(세종 23년)에 설치돼 1749년(영조 25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원래의 수표교는 청계천 수위를 재던 다리다.

 

◆ 수표교 (水標橋)

조선 세종 때 청계천에 가설한 돌다리이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다.

현재 장충단 공원 입구에 놓여있는 돌다리로,

원래는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서울 중구 장충동2가 197-1)로 옮겨왔다.

 

화강암을 짜맞추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도 2단을 이루고 있다.

그 중 윗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하여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였다.

모두 9줄 5열로 배열한 돌기둥 위에는 양 끝을 반원형으로 다듬은

 굵고 긴 석재를 세로로 걸쳐놓았고,

그 위에 바닥돌을 가로·세로로 짜맞추어 바닥면을 구성하였다.

 

바닥의 양쪽 언저리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한쪽마다 엄지기둥 11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동자기둥 1개씩을 세워 6모로 된 난간석을 받쳤다.

 난간을 구성하고 있는 부재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을 모티프로 하여 설계되어 있는데

 그 조각들이 매우 아름답다.

이는 조선시대 돌난간의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조선 세종 2년(1420)에 세운 다리로,

당시에는 이곳에 소시장이 있었다 하여 ‘마전교 ’라 불리었다.

 세종 23년(1441) 수표(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 ’라 부르게 되었다.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해 수량을 재는 역할을 했던 중요한 다리로,

조선조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왔다.

다리 옆에 서 있던 수표는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 이벽(李檗, 1754-1785?)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 성립 주역 가운데 한사람.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이다.

저서로 <숭례의설>(崇禮義說)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존하지는 않는다.

그는 일찍부터 천주교 서적을 읽고 스스로 교리를 이해한 뒤,

녹암계(鹿菴系)의 인물들이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수용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 1784년 겨울에는 이승훈 등과 함게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를 마련하였고,

그 주역이 되어 활동하다가 을사년(1785) 봄의

 추조적발시건(秋曹摘發事件 즉 明禮坊事件)으로 인해

 집안에서 연금 생활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이벽은 정약현의 자형으로

 나주 정씨(羅州丁氏) 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자,

 정약현의 아우인 정약전·약용(若鏞, 사도 요한)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문을 강마하였다.

 이벽이 기해년(1779) 겨울, 녹암계 인물들이 권철신을 스승으로 삼아

 강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곳을 찾아가 함께하였으니.

그 장소가 바로 주어사였다.

 

이때 이벽은 강학의 주제로 서학서의 내용을 제기하였고.

그 결과 주어사 강학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게 된 것 같다.

이후에도 이벽은 정약전과 만나 서양의 기하학 · 역학 ·수학에 대해 토론하거나

 꾸준히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였다.

 또 주어사 강학이 있은 지 2~3년 뒤에는 녹암계 인물들 가운데서

 서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벽은 이후 광주를 떠나 한양의 수표교 인근으로 이주해 살았다.

또 어느 정도 교리를 이해하게 되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와 있다는 북경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벽은 1783년 말에 지우 이승훈(베드로)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이승훈을 찾아가 '선교사들에게

기도문과 서적들을 얻어오고 영세를 하라'고 요청하였으며.

그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실제로 이승훈은 1783년 말 북경에 도착하는 즉시

북당(北堂)으로 선교사들을 방문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예수회 선교사 그랑몽(J.J. de 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

이승훈의 귀국과 동시에 교회 창설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때 이벽은 이승훈이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을 얻어 읽는 동안

그 교리가 진리이며.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1784년 여름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정약전 · 약용 형제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주었고,

 사헌부 지평 이가환(李家煥)과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교회 서적을 가지고 양근의 감호(鑒湖, 현 양평군)로

 스승 권철신과 권일신 (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형제를 방문하여

그 내용에 관해 토론한 다음 수표교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으로

 이승훈을 비롯하여 권일신. 정약전 · 약용 형제가 모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승훈은 자신이 북경 선교사들에게서 배운 대로

동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니.

 

이 최초의 세례식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의 성립'이다.

 당시 정약전을 제외한 이벽 ·권일신 ·정약용이 세례를 받았다.

교회 공동체 성립 후 이벽은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 결과 얼마 안되어 이벽의 집에서는 두 번째 세례식이 있었고

. 여기에서 홍낙민(洪樂敏, 루가), 최창현(崔昌顯, 요한),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등이 세례를 받았다.

이 무렵 이벽의 스승 권철신을 비롯하여 그의 아우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운 충청도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전라도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도 영세를 하였다.

 

이제 천주교의 종교 운동은

이승훈과 이벽의 주도 아래 빠르게 확산되어 갔고.

김범우가 명례방에 있던 자신의 집 한 켠을 집회 장소로 제공해 줌으로써

초기의 신앙 공동체는 수표교에서 명례방으로 이전되었다.

1785년 봄, 초기의 신자들은 이벽의 주도 아래 명례방에서 집회를 가졌다.

 바로 그때 형조의 금리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우연히 그 집회 장소를 수색하게 되었으며,

 그곳에 모여 있던 신자들이 모두 형조로 압송되는

 소위 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집주인 김범우는 단양으로 유배되고

. 이승훈과 이벽은 집안 식구들에 의해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특히 이벽의 부친은 그가 동료들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집 안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한 다음.

이벽이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이벽은 그 해 여름(혹은 이듬해 봄)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이벽은 사망 후 선산이 있는 포천의

화현리(현 포천군 내촌면 화현 3리)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두 부인도 훗날같은 무덤에 합장되었다.

 화현리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1979년 초였다.

이어 그 해 4월 10일에는 이벽과 두 부인의 묘가 발굴되고

그 안에서 지석이 확인되었으며,

이들의 유해는 6월 21일에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천진암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 순교자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

최초의 한국인 세례자요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 설립 주역의 한 사람이다.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晩泉). 본관은 평창(平昌).

 이가환(李家煥)의 생질이며 정약용(丁若鏞)의 매부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78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던 중 이벽(李檗)과 사귀게 되어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웠다.

 

1783년 말 이벽의 권유로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

 그곳의 북당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梁棟材,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874년 초 교리서적, 십자고상, 상본(像本)을 갖고 귀국,

이벽, 정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가 성립되게 하였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친척과 집안 식구들의 탄압으로 배교,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했고,

1787년에는 정약용과 함께 반촌(泮村,

현재의 惠化洞)에서 교리를 연구하였다.

 

1789년 평택 현감으로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790년 북경에 파견되었던 조선 교회의 밀사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령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교회를 떠났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현감 재직시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 반촌에서 서학서를 공부했던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문제되자

다시 배교, 관직을 삭탈당하고 석방되었다.

 

1794년 12월(음)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이듬해 6월(음)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한 죄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예산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이듬해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의 국청에서 배교했으나

 4월 8일 정약종, 홍낙민, 홍교만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 후 1856년 아들 이신규(李身逵)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이승훈은 비록 여러 번 배교하고 교회를 떠났던 인물이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했고 가성직제도를 주도했던 인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그로부터 신앙을 찾은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李在誼)는 1866년에,

 증손 이연구(李蓮龜), 이균구(李筠龜)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이승훈의 유고문집으로 ≪만천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