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 여사울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살던 곳
![](https://t1.daumcdn.net/cfile/cafe/9986A64C5F58076C09)
▲여사울 성지전경
천안에서 예산 쪽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신례원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 곳에서 우회전하여 서해안의
합덕 쪽으로 향하다가 십 리쯤 되는 곳 오른편에서
여사울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충청도의 복음 전파는
'여사울'(餘村,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시작되었다.
▲여사울 성지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유적비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1752-1801년)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 현재 신례원 본당의 공소가 있으며,
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천주교 신자로 구성돼 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여사울 언덕야외제대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김진후(金震厚),
성 김대건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의 출생지인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있다.
농민 출신으로 충남 예산군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의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여사울 성지 이존창 생가 터 성모상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하여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히게 된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한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여사울 성지 이존창 순교자 기념성당 제대와 성모상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커져 갔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 바위에서 50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출처 : 하늘에서 땅 끝까지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 찾아 가는 길
◈도로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여사울길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