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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0월 11일 (일) [녹] 연중 제28주일

Berardus 2020. 10. 11. 06:24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0월 11일 (일)
    [녹]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 (이사 25,6-10) 제2독서 (필리 4,12-14,19-20) 복음 (마태 22,1-14)
    힘을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주님 은총임을 깨달아야 하늘나라 초대받을 자격 세상 힘든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과 희망 가져야 하느님 뵙는 잔치 자리에 합당한 예복은 바로 ‘찬미와 화답’ 미사 참례 못하더라도 더욱 굳은 신앙으로 믿음 지켜가길


        사제로서 가장 행복한 일은 신자들이 성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으로 신자들의 믿음이 성장할 때 감사가 차오르고, 서로 친교를 나누는 모습에 덩달아 행복해지곤 하지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 기쁨을 빼앗긴 기분입니다. 혼란스러운 세상이 들려주는 어둡고 우울한 소식에 휘말려 지레 맥이 빠지기도 합니다. 성당 사정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마음이 베이는 듯 쓰라립니다. 그럼에도 미사참례를 독려하기는커녕 면역력이 약한 노약자들의 미사참례를 극구 말리고 있으니, 기가 막힙니다.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시기가 길어지면 결국 선교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 뻔해 걱정입니다. 애송이 사제 시절, 사제가 되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장담하는 저에게 은사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제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겪는 모든 아픔과 근심걱정을 함께 짊어지는 사람이기에, 신자들의 삶을 염려하느라고 애간장이 녹아내리고 매일매일 근심걱정에 묶여 지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요즈음…. 진심으로 은사님의 일깨움이 살뜰히 다가옵니다. 솔직히 이즈막에 제가 지닌 유일한 위로는 세상은 늘 변한다는 사실 뿐인 듯 한데요. 세상의 모든 것은 흘러가기 마련이고 사라진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지금 우리네 삶을 옥죄고 있는 이 ‘사건’도 과거의 시간 속에 묻힐 날이 꼭 올 테니 말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이 변하지 않고 영원하며 무궁할 터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마음에 고여 드는 남루한 생각을 어쩌지 못하고 여쭙습니다. 이 힘든 시간을 어떻게 채우며 지내시는지? 혹여 미사참례가 뜸해진 만큼 주 님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은 아닌지? 어느새 미사참례는 해도 그만 빠져도 그만인 듯 여기고 계신 것은 아닌지? 미사방송을 켜고 지켜보는 것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오해하지는 않는지? 염려합니다. 성경은 “인간은 살아서 하느님을 뵐 수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여 들려줍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당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모든 어둠이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밝고 환하며 눈부신 빛 앞에서 우리는 그 동안 저지른 모든 죄와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공적이 많고 훌륭한 삶을 살았다 해도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모두가, 전부가 오로지 그분의 사랑에 의해서, 그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은총임을 깨닫는 존재에게 허락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슬프고 아프고 힘들고 괴로운 고통 가운데에서도 주님께 감사를 잃지 않았던 믿음 이야기와 주님을 향한 희망으로 점철된 스토리텔링 역시 천국 가족 자격을 갖게 합니다. 주님을 뵈온 이사야 예언자가 바짝 엎드려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이유이고 빛으로 다가오신 주님의 모습에 바오로 사도가 눈이 멀고 바닥으로 거꾸러졌던 이유일 테지요. 때문에 저는 오늘 주님께서 이르신 하늘 잔치의 예복을 약간 새롭게 해석해 봅니다. 하느님을 뵙는 그 자리에 합당한 예복은 다름이 아니라 “알렐루야”라는 아주 간단한, 그럼에도 우리 하느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찬미 화답이 아닐까 생각하는 겁니다. 불현듯 주님께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라고 말씀하신 것이 요즘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예비해주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가톨릭 신앙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는 ‘비대면’ 신앙이니 말입니다. 애당초 그리스도인은 주님과의 비대면을 원칙으로 믿음생활을 하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지금 뜻밖에 벌어진 이 상황은 우리에게 홀로 지낼 시간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향한 깊은 묵상으로 몰입하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이 주어진 셈입니다. 이야말로 바오로 사도처럼 비천하거나 풍족하거나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어떠한 경우에도 적응하는 지혜를 배울 기회입니다. 난세이기에 그분과 더 친해지는 것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은총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잔치를 산해진미가 가득하게 차려진 잔칫상이 마련된 곳으로 묘사합니다. 또한 비천한 처지라서 당했던 억울한 일, 배고프고 궁핍해서 흘렸던 눈물을 하느님께서 손수 닦아 주시는 곳이라고 증언합니다. 생각만 해도 설렙니다. 상상만 해도 너무 좋습니다. 어서어서, 그 좋은 자리에 걸맞은 삶을 살아 내리라 다짐하게 됩니다. 때문에 이런저런 기우로 힘이 빠졌던 속 좁은 사제의 자잘한 염려가 창피합니다. 어리석음이 부끄러워 머리를 몇 번 쥐어박아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손수 돌보아 살펴 이끌어주고 계신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고 계신 교우님들!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시더라도 주님을 의심하는 일은 없기 바랍니다. 우리의 전부를 해결해주시려 함께 계시는 분을 향하여 쉼 없는 찬미를 올리기 바랍니다. 세상이 수상한 만큼 더욱 주님을 꼭 붙들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힘든 만큼 더더욱 굳게 주님께 매달려 지내기 바랍니다. 부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믿음으로 희망을 놓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제 저도 성전에 띄엄띄엄 지정석을 마련하며 시렸던 마음을 녹이겠습니다. 주일미사에서 자리가 모자라 십 여분을 돌려보내며 무너졌던 마음도 추스르겠습니다. 그 동안 지친 마음에 주님 말씀으로 생기를 불어넣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손수 ‘윗자리’로 옮겨 앉혀주시는 귀한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겠습니다.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다 함께 승리하도록 합시다! -장재봉 신부- [한주간 전례] 2020년 10월 12일 (월) [녹]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1,29-32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예언자직을 수행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니네베는 북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수도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입니다. 요나는 원수를 위하여 예언하고 싶지 않아서 타르시스를 향하여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태풍을 일으키시고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지낸 요나는 마침내 하느님께 굴복하여 니네베로 갑니다. 본디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도시인데 요나는 하룻길을 걸은 다음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루의 외침만으로도 니네베 사람들 전부가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따로 없이 임금마저 단식하였습니다. 심지어 동물들에게도 자루옷을 입혔고 단식하게 하였으니 숨을 쉬는 모든 것은 다 회개한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의 표징과 대조를 이룹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싫어 니네베로 가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려고 몸소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요나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지내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순종하셨기에 사흘 동안 저승에 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요나가 니네베에 심판 선포를 할 때 그는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목숨까지 바쳐 가시며 예언자직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슬픈 일이 벌어집니다. 요나의 성의 없는 표징에도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였지만, 요나와 비교할 수 없이 더 크신 분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도 사람들의 마음은 좀체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13일 (화) [녹]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1,37-41 노란 색안경을 끼면 세상이 다 노랗게 보이고, 파란 색안경을 끼면 세상이 다 파랗게 보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의 색안경을 하나씩 끼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성악을 하는 제 친구는 음악 이야기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성악과 관련된 것에 무척 예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목소리, 가수들의 노랫소리 등에 다른 사람보다 더욱 관심을 두고 듣습니다. ‘음악’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는 바리사이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이는 바리사이가 낀 색안경과 예수님께서 끼신 색안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이라는 색안경을 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선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악입니다. 그리하여 식사 자리에서 율법에 따라 손을 씻느냐의 여부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색안경을 끼셨습니다. 식탁에 그릇과 음식이 놓일 때 그분께서는 그 음식들을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떠올리십니다. 마치 자식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볼 때마다 자식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음식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우리는 어떤 색안경을 끼고 살고 있습니까? 성찬의 식탁에 올려진 성체와 성혈을 사랑이라는 색안경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제사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14일 (수) [녹]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1,42-46 어느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매번 음반 제작 제의를 퇴짜 맞던 무명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한 음반사에서 거절당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허리가 굽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노인이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노인의 행색이 안타까워 청년은 얼른 노인을 부축하였습니다. 낑낑거리며 길을 다 건널 무렵, 노인이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어떤가, 기분이 좀 나아졌나?” 청년은 어리둥절하였지만 솔직하게 “네, 조금 나아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노인이 굽은 허리를 쭉 펴고 똑바로 섰습니다. 청년이 깜짝 놀라자 노인이 말하였습니다. “사실 나는 아주 건강하지만 근심이 가득한 자네 얼굴을 보고 잠깐 연기했지.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 때 한결 기분이 나아지거든.” 행복은 언제 찾아올까요? 정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에게 아쉬운 것이 다 채워진다고 행복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행복이란 ‘나’ 자신만 잘살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갈 때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불행하여라.”라고 네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자기 몫만 챙길 줄 알고, 자기 명예와 안위만 챙길 줄 알았지 다른 사람의 처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15일 (목) [백]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간 성녀는 평생을 완덕의 길에 정진하며 살았다. 데레사 수녀는 수도회의 발전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맞닥뜨렸으나 주님께 매달리며 곤경을 이겨 나갔다. 수도 생활과 영성 생활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긴 성녀는 1582년에 세상을 떠났다.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이 데레사 수녀를 시성하였고, 1970년 바오로 6세 교황이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성녀는 ‘아빌라의 데레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복음묵상] 루카 11,47-54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는 구약 최초의 살인 사건을, ‘즈카르야의 피’는 구약 최후의 살인 사건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모든 죄를 예수님 세대의 사람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인 것은 조상들인데, 어째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조상들이 지었던 모든 죄를 종교 지도자들이 여전히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은 예언자들의 무덤과 묘비를 세우고 그들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처럼 하였지만, 실상은 살아 계신 예언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들이 진정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죄를 참회하였다면, 예언자 가운데 참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독한 앙심을 품고 그분을 몰아댔으며 끝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곳곳에 수많은 기념관이 있고 해마다 수많은 기념일을 지냅니다. 이는 과거의 공과를 헤아려서 오늘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미사도 사실은 기념 제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며 복음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신앙적인 차원이든 사회적인 차원이든 과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다면 우리 또한 불행한 오늘을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16일 (금) [녹]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2,1-7 손오공이 온갖 법술을 익혀 소란을 피우자 부처님은 그를 붙잡아 “내 손바닥을 벗어나면 소원을 들어주고 그렇지 못하면 벌을 주겠다.” 말합니다. 이에 손오공은 의기양양하게 근두운을 타고 날아 구름 위에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신나게 달려 우주의 맨 끝자락이라고 여겨지는 곳에 있는 기둥에 ‘손오공 다녀가다.’라고 쓰고서는 부처님한테 돌아와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웬걸, 자 기가 쓴 글씨가 부처님 손가락에 쓰여 있었습니다. 수만 리를 날았건만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제게서 손오공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뛰어 보았자 그분 손바닥 안에 있고, 하느님 앞에서 숨어 보았자 그분 손바닥 안에 있을 뿐입니다. 대중가요 가운데 “아름다운 구속”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이 연인에게 구속당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이 구속이 자신에게는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구속당하는 것도 답답하고 무서운 구속이 아니라, 아름답고 든든한 구속입니다.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그분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130[129],3 참조)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를 사랑으로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아름다운 구속’을 당한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이 말씀에 따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맡기고 위선과 불의에 당당히 맞서야 하겠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17일 (토)

        [홍]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냐시오 성인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요한 사도의 제자였다고도 하는 그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지역이었던 안티오키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110년 무렵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이냐시오 주교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 들르는 곳마다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들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초대 교회의 신앙생활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12,8-12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호자 (‘파라클레토스’)라고 부르십니다(14,16 참조). 우리말 『성경』에서는 ‘보호자’로 번역하였는데, 이 말은 본디 법정 용어입니다. 죄를 문책하는 검사와 맞서 죄인 옆에서 그를 대변하는 변호사를 일컫는 용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주시어 우리가 세상의 법정에서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단 지상의 법정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우리가 서 있을 때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지 않도록,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대변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그러니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을 모독한다면 우리 스스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대에 홀로 남아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꼴을 자초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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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연휴와 함께 가을이 깊어갑니다. 아침, 저녁의 기온이 점차 내려가고 있습니다. 언제 더웠냐는 듯이 이젠 긴 소매의 옷을 찾게 됩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느 덧 코로나19와 생활한지 10개월이 되고 있습니다. 감염자의 수가 늘었다 줄었다하여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지만, 모두의 협심으로 안정화되기를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