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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0월 18일 (일) [녹] 연중 제29주일 (전교주일)

Berardus 2020. 10. 17. 07:35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0월 18일 (일)
    [녹] 연중 제29주일 (전교주일)

    제1독서 (이사 2,1-5) 제2독서 (로마 10,9-18) 복음 (마태 28,16-20)
    ‘제자로 삼아라’ 교리 전파와 윤리 제시 자체만으로는 선교의 목적 이룰 수 없어 어떤 차별이나 예외도 없이 모든 민족들에게 은총 주어져야 복음 선포와 파견은 주님과 긴밀한 관계로 이뤄지는 신비 진정으로 감동해 믿고 기쁜 마음으로 증거하는 것이 전교 핵심


        너무 오래전에 본 영화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은데 가끔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동급생 청소년들의 이야기였는데 여자아이는 공부를 잘하고 남자아이는 공부를 못했습니다. 둘 사이에 느닷없이 짝사랑이 시작되었고, 여자아이는 공부를 못하는 남자아이의 성적을 걱정하며 자기의 참고서와 똑같은 것을 선물로 사 주었습니다. 남자아이는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책을, 선물로 준 여주인공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며 조금씩 읽어가며 이해하려 합니다. 마지막이 해피엔딩이었는지... 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결말이 기억 안 날 수가 있지...? 하면서도, 아 공부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 라는 깨달음이 워낙 커서 다른 건(결말조차도) 기억이 안 나는가보다... 그렇게 받아들이며 심각한 저의 건망증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하느님을 억지로 주입시키고 교리 조목들을 강제로 외우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교가 아닙니다. 곁에서 지켜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도 크고 감동적인 사랑이어서 이 기쁜 소식을 자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전교입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 복음서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마무리되는 구조로 되어있는데, 오늘 복음은 그 대미(大尾)로서 다시 갈릴래아에서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곳이고 가르침의 대부분을 설파하신 곳이며 이제 당신의 지상생활을 마무리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심으로써 당신의 일이 이제 제자들을 통해 이어질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 제자가 되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날 장소로 갈릴래아를 언급하십니다.(마태 28,10) 그래서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돌아가 예수님을 만나는데(16절)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17절)합니다. 유다인들에게 ‘경배하다’라는 행위는 상대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경외 때문에 그 앞에서 정말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경배 행위 중에도 제자들 “더러는 의심하였다”(28,17)고 합니다. ‘의심하다’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동사는 ‘디스타조’로서 ‘마음이 갈라진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게중심을 잃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 단어는 베드로가 물위를 걷고 있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에 빠졌을 때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열한명의 제자들 중 “더러는 의심하였다.”는 표현은 제자들의 불완전함과 결함에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주목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해 흔들리고 망설이는 제자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시고 그대로 놓아두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제자들의 도덕적 소양이나 교양, 신앙의 깊이와 상관없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고상한 수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힘과 그분의 사랑, 구원의지로 완성되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의 결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당신의 현존과 구원의 여정을 교회를 통해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사명은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형을 중심에 두고 ‘가다’, ‘세례를 주다’, ‘지키도록 가르치다’라는 내용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모두 분사형태로 등장함으로써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부연(敷衍)합니다. 즉 가서, 세례를 주고, 지키도록 가르치는 행위는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에 따른 부차적 행위인 것입니다. 교회는 교리를 가르치고 윤리적인 행동강령들을 제시하며 인류의 공동선을 이룩하는 위대한 과업들을 수행해 오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 선교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진정한 목적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리를 배우는 것보다 더 주목해야할 사안은 우리가 과연 그분의 제자들인가에 대한 정직한 성찰인 것입니다. 제자로 삼을 대상은 “모든 민족들”입니다. 제자의 특권은 그 어떤 차별이나 예외 없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은총이며, 이는 보편교회인 가톨릭교회의 보편주의를 명확히 표명합니다. ■ 보편적 구원과 그 방법 이러한 보편주의적 관점은 오늘 본문들 안에 유난히 자주 반복 (복음과 제1독서, 제2독서, 화답송에까지도)되어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먼저 선행되어야할 조건으로, 우선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누군가가 ‘선포해야’ 하며, 선포하려면 ‘파견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로마 10,14-15) 그러면서 이 파견이 얼마나 역동적 행위인지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15절)라는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복음의 선포와 이를 위한 파견은 단순한 강요나 정치적 정복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특별하고도 긴밀한 관계성으로 이루어지는 신비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그들을 성당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들이 지옥에 갈 불쌍한 인간들이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리고 소개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에서 발생하는 능동적이며 아름다운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교’(傳敎)라는 말의 자구적 의미, ‘가르침을 전하다’에 너무 매일 필요는 없겠습니다. 강요하고 개종을 요구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입하는 것이 전교가 아니라, 우리가 감동하여 믿고 매료된 그 사랑의 관계를 살고 기쁜 마음으로 증거하는 것이 전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의 혼란으로 너무도 낯선 절망이 전 세계를 휘감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더욱 명료한 의식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모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기위해 존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충만히 살도록 초대되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시니, 이제 우리는 그 경이로운 사랑과 구원의 현실을 믿고 충만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에 말해주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자, 주님의 빛 안에서 걸어가자!”(이사 2,5) ▲서울 강동구 소재 강동보훈병원 매듭을 푸시는 성모상 [한주간 전례] 2020년 10월 19일 (월) [녹]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2,13-21 어느 선배 신부님이 성지 순례를 간다고 하니 교우 분들이 쌈짓돈을 챙겨 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그분들께 드릴 선물을 사려고 성지 주변의 성물 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영어를 통 몰라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였는데, 주인이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아들의 친절한 도움으로 성물들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선배 신부님은 ‘돈이 언어구나! 돈만 있으면 외국어를 몰라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실 돈이 있으면 참 편하고 당당해지는 세상입니다. 배짱이 두둑하려면 우선 지갑이 두둑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이 미사 때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들은 마음, 세월, 예수님, 우정, 부모님, 사랑, 하늘 나라, 믿음 등 의외로 많은 것들을 대답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 부대끼며 살다 보면 우리는 이러한 가치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지도하는 제주교구 신학생들은 해마다 설이 되면 교구의 모든 신부님을 찾아가 세배하고, 이때 받은 세뱃돈을 모아 일 년 살림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적어도 십 분의 일 이상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쓰고 있습니다. 탐욕에서 자유로워지고,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과, 나눔의 가치를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는 법을 이렇게 신학생 때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20일 (화) [녹]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2,35-38 오늘 복음은 ‘주인을 사랑하는 종’의 이야기입니다. ‘종’이 ‘주인’을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종업원이나 사원이 고용주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열에 하나, 고용주가 자신을 가족처럼 대하고 자식처럼 아껴 준다면 고용된 이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은 주인을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음 구절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어떤 주인이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을 들겠습니까? 오히려 종이 주인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혼인 잔치에 다녀와 피곤할 터인데 종을 위하여 시중을 듭니다. 그렇습니다. 종은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는 주인을 사랑합니다. 종은 늘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깨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들으며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깨어 있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우리를 귀하게 대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21일 (수) [녹]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2,39-48 두 부류의 종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없을 때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인이 올 때까지 늘 충실하고 슬기롭게 일을 합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자신을 그 집의 ‘주인’으로 착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 행세를 하려던 이는 도리어 쫓겨나고, 주인이 아님을 확실히 깨닫고 종으로서의 위치에 충실한 이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맡게 됩니다. 주인이 아니면서도 주인과 같게 된 것입니다. 이 비유에 비추어 볼 때 ‘깨어 있다.’라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다.’, ‘내가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처음 주임 신부로 발령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발령받은 본당에 도착하여 성체 조배를 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본당 신부 경험도 없고 나이도 어린 저로서는 착한 목자가 될 자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이런 울림이 느껴졌습니다. ‘루카야, 네가 이 공동체의 목자더냐? 그렇지 않다. 내가 이 성당의 목자다. 너는 목자가 되기에 앞서 먼저 나의 어린양이 되어 주려무나. 양이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듯이 그저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무나.’ 저는 이 메시지에 위로와 용기를 얻고 미사를 통하여 날마다 주어지는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 말씀을 제 사목의 등불로 삼고 지내다 보니 어리숙하고 부족하였지만 그래도 본당 신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에서 하느님이 되지 않으려는 태도는 우리를 지나친 책임감에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22일 (목) [녹]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2,49-53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몸소 평화를 베푸시고(루카 7,50 참조), 제자들에게는 평화의 인사를 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루카 10,5 참조). 무엇보다도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하신 첫마디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께서 ‘세상의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사실 그분의 평화는 많은 재산으로 말미암은 안락한 생활이나 전쟁의 승리로 누리게 되는 일시적인 평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예수님의 평화는 ‘불’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불은 정화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시어 그 안에 있는 온갖 죄악을 태우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세례란 본디 옛 삶이 죽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셋째, 평화는 분열을 통하여 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열은 혈연, 학연, 지연 등의 모든 관계 가운데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에 익숙해진 이들이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얻으려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누리기 위한 다짐은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23일 (금) [녹]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2,54-59 사제 피정 때 40년 넘게 사제 생활을 한 신부님이 피정 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신부님은 피정 중에, 살아오면서 감사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노트에 썼답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었는데, 이삼일 동안 쓴 이름이 500개도 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말하였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사제로 지낼 수 있도록 이렇게나 많은 분이 애써 주셨습니다. 정말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람들이 해 준 것만큼 감사의 보답을 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분은 고맙다는 표현도 전해 드리지 못한 채 하느님께 돌려보내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남은 인생은 그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은인들에게 직접 보답하지 못하더라도 주위의 이웃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겠노라 다짐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으며 살아왔을까요?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른 경우는 얼마나 많을까요? 감사해야 할 은인들에게 일일이 보답하지 못하더라도, 미안한 사람들에게 죄송함을 다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남은 인생을 보답의 삶, 속죄의 삶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땀방울을 기꺼이 흘리며 우리의 은인들, 우리에게 피해를 받은 이들에게 보답과 속죄를 할 때, 우리 삶은 위선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24일 (토) [녹]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3,1-9 머리에 종기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곧 낫겠거니 생각하며 사나흘은 아픈 것도 그냥 참았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베개를 베고 잘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아팠습니다. 결국에는 병원에 가서 의사의 손으로 종기를 짰습니다. 고름이 나올 때는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병원에 다녀온 뒤 이틀이 지나자 아픈 곳은 빠르게 나았습니다. 그때 ‘병원에 가서 종기를 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록 종기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아픔이 있었지만, 그런 아픔을 겪지 않았다면 종기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더 나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짜내지 않으면 그만큼 우리 영혼 전체가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비록 부끄럽고, 두렵고, 어려울지라도 그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우리의 영혼에서 그것을 도려낼 때 비로소 영혼은 건강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이 말씀은 협박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간절한 말씀입니다. 그러하기에 비유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우리 삶의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는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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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연휴와 함께 가을이 깊어갑니다. 갑작스러운 추운 날씨가 두꺼운 옷을 찾게 합니다. 월초의 따스함이 어느 샌가 겨울 분위기로 바뀐 요즘입니다. 이번 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로 하향조정이 되어 성당에서의 소모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많은 인원이 자유스럽게 친교를 나눌 순 없지만 그래도 얼굴들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