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어떻게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것인가?
연중 제27주일·
제1독서 (이사 5,1-7)
제2독서 (필리 4,6-9)
복음 (마태 21,33-43) 토지세 징수하려 폭력 행사한 포도밭 소작인에 대한 비유
특권층이 갖는 오만과 우월감은 질타받아야 할 ‘위선’
그리스도인으로서 덕 실천하며 충실한 ‘열매’ 거두려면
성찰하고 되새기며 하느님 뜻 오롯이 실천하는 삶 살아야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 90,12)
한 사람이나 어느 집단에게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한 체험이 있습니까?
선의에도 불구하고 경청하지 않으며
말꼬리로 트집 잡고 급기야 사람들을 모아
제거해 버리겠다고 모략을 꾸미기도 하는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마태오복음 수난 전 장면에서
예수님도 그런 상황을 만나십니다.
자신이 흙으로 빚어졌으며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인간의 나약함을
잊어버린 데서 비롯된 인간의 오만과 편견,
완고함을 하느님 아들 예수님도 고스란히 체험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은 오늘 성전에서
유다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축제 때 성전에 온 순례자들은
장엄한 성전 예식에 참여하기도 하고
현인과 랍비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성전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는데
예루살렘의 유다 지도자들이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는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비유,
곧 두 아들의 비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그들 자신의
참 모습을 보도록 도전하십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오늘
비유에 나오는 것과 같은 예수님 시대
부유한 시골 저택을 ‘성채도시와
다를 바 없는 커다란 성’이라고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농사짓는 소작인들은
토지 주인에게 추수의 3분의 1세
(임금에게는 또 다른 3분의 1세)를 납부했습니다.
집주인이 토지세를 징수하기 위해 보낸 종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포도밭 소작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야기였습니다.
▲얀 뤼켄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 비유의 청중, 수석사제와 바리사이들
비유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교정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 비유에서 소작인에 비교되는 청중은
수석사제와 바리사이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제 계급은
첫 번째로 손꼽히는 귀족이었습니다.
대사제는 한 명인데 수석사제는 여러 명입니다.
예루살렘의 고위 사제들은
성전 경비대장,
주간당직 사제들의 통솔자,
성전 감독, 창고 책임자 등으로
대부분 대사제의 친척이거나
대사제와 연관된 사람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당시 대사제가 지닌 엄청난 권력을
같이 누리던 사람들입니다.
대사제는 단지
제사만을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로마 제국 치하에서 이스라엘 대표자이자
예루살렘 치안과 성전 관리까지 맡으며
엄청난 권력을 누렸습니다.
대사제를 포함한 수석사제들의 특징은
돈, 권력, 성전 관리권,
로마인들과의 적당한 협잡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한 이유는
기득권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하시며
그들이 지닌 성전 이권을 침범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특권과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거룩한 것,
하느님의 것을 인간 탐욕과 권력으로 악용하는 것에
맞섰기 때문에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처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리사이’는 열렬한 신앙심,
진지한 사람들이었고 율법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율법 연구에 헌신하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율법학자가 돼 존경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한 것은 모든 바리사이가 아니라
‘바리사이주의’, 곧 형식주의와
자신들의 위상에 대한 자만에 기울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 마음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정확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고함, 근거 없는 윤리적 우월감,
외적 형식에 대한 완고한 집착, 율법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멸시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고
그 어떤 사람이 저지른 죄도 용서하셨습니다.
그분은 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바리사이 시몬의 식사 초대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열렬한 바리사이 바오로를 회개시켜
이방인에 대한 선교 사명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자비로운 예수님이 사정없이 질타한
죄가 있다면 바로 위선입니다.
믿음 실천을 강조하는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위선에 대해 더 많이 경고하는데 바라사이와
율법학자들을 그런 위선의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위선이란 어떤 일에 대해
말하거나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일을 행하는 것
(혹은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자세는 하느님 뜻에 대한
적극적인 불순종 형태로 간주됩니다.
위선자는 잘못된 동기로,
특히 남에게 보이려고 바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또 위선자는 식별력이 부족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에서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안식일,
이혼, 제물 등 여러 상황에서 부딪힌 것도
바로 이런 식별 부족 때문입니다.
■ 풍요로운 소출을 내는 이들
이 소작인 비유는
마르코복음 12장 1-12절에도 나옵니다.
마르코는 포도밭 주인과 그의 종들에게
소작인들이 행한 악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만,
마태오는 포도밭에서 풍요로운 ‘소출’을 내지 못한
소작인들이 저지른 실패를 강조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긴 포도밭에서
풍요로운 소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제2독서 말씀이 도움 됩니다.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가르치기 위해 여덟 가지 덕 목록을 제시하며
이 모든 덕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라고 초대합니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에서
“간직하다”로 번역된
그리스 명령형은
‘문제에 대해 주의 깊게 사고하고,
식별하고, 어떤 것에 마음이
머물게 하라’는 요구입니다.
이것은 필리피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해야 할 임무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환경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성찰하고, 되새기는 사람, 사고하는 사람,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도 그런 자세를 훈련할 때
이 세상과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자신의 은사에 맞갖는 소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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