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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0월 4일 (일) [녹] 연중 제27주일, (군인주일)

Berardus 2020. 10. 3. 06:51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0월 4일 (일)
    [녹] 연중 제27주일, 군인주일

    제1독서 (이사 5,1-7) 제2독서 (필리 4,6-9) 복음 (마태 21,33-43)
    어떻게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것인가? 토지세 징수하려 폭력 행사한 포도밭 소작인에 대한 비유 특권층이 갖는 오만과 우월감은 질타받아야 할 ‘위선’ 그리스도인으로서 덕 실천하며 충실한 ‘열매’ 거두려면 성찰하고 되새기며 하느님 뜻 오롯이 실천하는 삶 살아야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 90,12) 한 사람이나 어느 집단에게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한 체험이 있습니까? 선의에도 불구하고 경청하지 않으며 말꼬리로 트집 잡고 급기야 사람들을 모아 제거해 버리겠다고 모략을 꾸미기도 하는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마태오복음 수난 전 장면에서 예수님도 그런 상황을 만나십니다. 자신이 흙으로 빚어졌으며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인간의 나약함을 잊어버린 데서 비롯된 인간의 오만과 편견, 완고함을 하느님 아들 예수님도 고스란히 체험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은 오늘 성전에서 유다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축제 때 성전에 온 순례자들은 장엄한 성전 예식에 참여하기도 하고 현인과 랍비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성전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는데 예루살렘의 유다 지도자들이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는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비유, 곧 두 아들의 비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그들 자신의 참 모습을 보도록 도전하십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오늘 비유에 나오는 것과 같은 예수님 시대 부유한 시골 저택을 ‘성채도시와 다를 바 없는 커다란 성’이라고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농사짓는 소작인들은 토지 주인에게 추수의 3분의 1세 (임금에게는 또 다른 3분의 1세)를 납부했습니다. 집주인이 토지세를 징수하기 위해 보낸 종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포도밭 소작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야기였습니다. ■ 비유의 청중, 수석사제와 바리사이들 비유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교정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 비유에서 소작인에 비교되는 청중은 수석사제와 바리사이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제 계급은 첫 번째로 손꼽히는 귀족이었습니다. 대사제는 한 명인데 수석사제는 여러 명입니다. 예루살렘의 고위 사제들은 성전 경비대장, 주간당직 사제들의 통솔자, 성전 감독, 창고 책임자 등으로 대부분 대사제의 친척이거나 대사제와 연관된 사람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당시 대사제가 지닌 엄청난 권력을 같이 누리던 사람들입니다. 대사제는 단지 제사만을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로마 제국 치하에서 이스라엘 대표자이자 예루살렘 치안과 성전 관리까지 맡으며 엄청난 권력을 누렸습니다. 대사제를 포함한 수석사제들의 특징은 돈, 권력, 성전 관리권, 로마인들과의 적당한 협잡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한 이유는 기득권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하시며 그들이 지닌 성전 이권을 침범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특권과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거룩한 것, 하느님의 것을 인간 탐욕과 권력으로 악용하는 것에 맞섰기 때문에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처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리사이’는 열렬한 신앙심, 진지한 사람들이었고 율법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율법 연구에 헌신하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율법학자가 돼 존경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한 것은 모든 바리사이가 아니라 ‘바리사이주의’, 곧 형식주의와 자신들의 위상에 대한 자만에 기울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 마음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정확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고함, 근거 없는 윤리적 우월감, 외적 형식에 대한 완고한 집착, 율법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멸시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고 그 어떤 사람이 저지른 죄도 용서하셨습니다. 그분은 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바리사이 시몬의 식사 초대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열렬한 바리사이 바오로를 회개시켜 이방인에 대한 선교 사명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자비로운 예수님이 사정없이 질타한 죄가 있다면 바로 위선입니다. 믿음 실천을 강조하는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위선에 대해 더 많이 경고하는데 바라사이와 율법학자들을 그런 위선의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위선이란 어떤 일에 대해 말하거나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일을 행하는 것 (혹은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자세는 하느님 뜻에 대한 적극적인 불순종 형태로 간주됩니다. 위선자는 잘못된 동기로, 특히 남에게 보이려고 바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또 위선자는 식별력이 부족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에서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안식일, 이혼, 제물 등 여러 상황에서 부딪힌 것도 바로 이런 식별 부족 때문입니다. ■ 풍요로운 소출을 내는 이들 이 소작인 비유는 마르코복음 12장 1-12절에도 나옵니다. 마르코는 포도밭 주인과 그의 종들에게 소작인들이 행한 악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만, 마태오는 포도밭에서 풍요로운 ‘소출’을 내지 못한 소작인들이 저지른 실패를 강조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긴 포도밭에서 풍요로운 소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제2독서 말씀이 도움 됩니다.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가르치기 위해 여덟 가지 덕 목록을 제시하며 이 모든 덕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라고 초대합니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에서 “간직하다”로 번역된 그리스 명령형은 ‘문제에 대해 주의 깊게 사고하고, 식별하고, 어떤 것에 마음이 머물게 하라’는 요구입니다. 이것은 필리피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해야 할 임무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환경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성찰하고, 되새기는 사람, 사고하는 사람,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도 그런 자세를 훈련할 때 이 세상과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자신의 은사에 맞갖는 소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임숙희(레지나)- [한주간 전례] 2020년 10월 5일 (월) [녹]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0,25-37 율법 교사가 예수님과 이웃 사랑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당시 유다인들은 이웃의 범주를 동족으로 제한하였습니다. 다만 이방인이라도 이스라엘 땅에서 살고 있다면 이웃으로 받아들였습니다(레위 19,18.34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율법 교사의 질문에는,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과, 갈등 관계에 있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의 범주에 넣지 말아야 하지 않겠냐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동족일지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단죄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 것입니다(요한 7,49 참조). 그러므로 그가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어간 것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로 지내신 것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비유 끝에 율법 교사에게 되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여기서 율법 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질문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율법 교사의 질문이 ‘이웃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예수님의 질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묻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라도 먼저 자신이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6일 (화) [녹]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0,38-42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그들의 위치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보다 ‘위’에 있습니다. 이는 ‘다가갔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말 ‘에피스테미’를 번역한 것인데, 본디 그 뜻이 ‘위에 서다.’입니다. 곧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바닥에 앉아 계실 때 마르타는 그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신보다 위에 계신 분이 아니라, 아래에 계신 분으로 여긴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다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발치에 앉았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위치에서 알 수 있는 그들의 사랑법은 무엇일까요? 마르타는 자신이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 예수님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시선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 결과 염려와 걱정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다그치기에 이릅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행동합니다. 그 래서 예수님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마르타와 달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내버려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은 그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셨느냐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 마음을 헤아리며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 그분 사랑에 맞갖은 사랑법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7일 (수) [백]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 (현재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은 세력 확장을 위하여 유럽을 침공하였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다. 훗날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복음묵상] 루카 11,1-4 주님의 기도가 지닌 독특한 점은 예수님 시대 즈음에 유다교 회당에서 바치던 열여덟 청원 기도문 (쉐모네 에스레)이나 고대 근동의 아카드인들이 바치던 양팔 기도문과 비교할 때 잘 드러납니다. 이 두 기도문에는 무엇보다도 신적 존재에 대한 호칭이 다양하게 열거되어 나옵니다. 마치 여러 호칭을 계속 반복하지 않으면 그 신적 존재가 그 기도를 듣지 않을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다양한 호칭을 사용하는 배경에는 궁정 문화가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임금에게 무엇인가를 청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문들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어전에서 멀리 떨어져 무릎을 꿇게 되는데, 이때에도 고위 신하가 눈짓으로 허락을 해야 겨우 자기가 청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에게 아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에는 이렇게 엄숙하고 격조 높은 궁정 문화가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한 번만 부르는데, 이마저도 가족 안에서 사용하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의 기도는 가족과 나누는 친밀하고 편안한 대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보통 가족끼리는 에두르거나 거창한 말로 꾸미지 않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편안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를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입니다. 그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며 그분을 붙잡고 마음 편히 우리의 바람을 아뢸 수 있는 응석받이인 셈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8일 (목) [녹]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1,5-13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하면 그분께서는 이에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분의 응답은 우리가 기대하는 때와 방식이 아니라,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가령 꼬마 아이가 자기 아빠에게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면 아빠는 그 간청을 곧바로 들어주겠습니까?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컸을 때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하고, 그 뒤 자동차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에야 운전할 수 있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하여 적절한 때를 살펴보고 계시며, 심지어 그때까지 우리가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주십니다. 또 아이가 동네에서 친구들과 싸웠는데, 분을 이기지 못하여 엄마에게 달려가 그 친구를 혼내 달라고 청하면 엄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며 우선 화를 달래고, 무엇이 올바른지 차근차근 설명해 준 뒤에야 그 친구에게 가서 진정한 화해를 이끌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뱀을 달라는 기도라면, 그분께서는 생선으로 응답하시기 위해서 적절한 형태를 찾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침묵을 두고, 그분을 무능하게 보거나 선하지 못한 폭군으로 내몬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께서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점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9일 (금) [녹]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1,15-26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암 수술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잘 관리하여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비슷합니다. 악에서 해방되고 난 뒤에 더 큰 악이 찾아오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었지만 이후 그에게 찾아온 시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배신자라고 낙인찍어, 그는 죽음의 위기를 겪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지 못하고 경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기까지 10년의 세월 동안 바오로는 홀로 지내야만 하였습니다. 언뜻 생각하기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아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하였고, 회심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그 이후의 삶이 탄탄대로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경우는 정반대였습니다. 은총의 체험 뒤에 더 큰 시련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체험이 있으면 그다음부터 좋은 일보다는, 그 체험으로 얻게 된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도록 더 큰 시련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무릇 그 은총에 맞갖게 살아가려는 굳센 마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10일 (토) [녹]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1,27-28 신자 분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사목회장을 10년 동안 하였습니다.”, “소공동체 구역장, 교리 교사, 사목회 임원 등 본당에서 안 맡아 본 직책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분들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직책이 신앙의 성숙도를 알려 주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모두 이러한 직책을 버리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제복을 입고서, 수도복을 입고서, 교회 안에서의 어떤 직함을 가슴에 달고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 속의 한 여자가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사람들 눈에는 대단한 가치일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치가 있는 것은 당신 말씀에 충실히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 한 가지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그 많은 이들 가운데 하느님 말씀에 가장 충실히 순종하셨습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분께서 그저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듣고 지키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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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연휴와 함께 가을이 깊어갑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여러가지 상황변화는 우리를 이해하기 힘들게 합니다. 길가엔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 착용을 하고 있고 성당에서의 일정 거리두기 등이 생활화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예전의 생활로 보답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