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주님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일상에서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가 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제 ‘진리의 성령’과 함께하는 삶으로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오늘 미사에서 은총을 구합니다.
9월의 마지막 주일은 이민의 날입니다.
우리 이웃에 실향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국내 실향민에 관한 사목 지침」(2020.5)을 발표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코로나바이러스19의
위기 속에 가중된 실향민 고난을 이해하고,
형제애로 다가가 귀를 기울이며,
나눔과 환대에 동참하기를 당부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기원전 6세기)는
이스라엘 멸망과 바빌론 유배는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의 속죄와
정화를 위한 하느님 정의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과거의 죄 때문에
공동체에 연대책임을 내리는 벌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어찌 넘어갈 수 있느냐며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
(에제 18,25)하고 주님 정의를 판단합니다.
예언자는 주님께서
개인 공적에 따라 심판하시기에
개인 책임임을 일깨우고,
악습을 버리고 회개하여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생명을 얻는다(에제 18,27-28)고 선포합니다.
연대책임 때문에 고통을 겪어도
회개하고 변화될 주체는
사람이지 하느님일 수는 없습니다.
의인도 공동체 내에 악과
불의와 싸워서 공멸을 막을 책임이 있습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제3차 선교여행 중에 투옥된 에페소 감옥에서
에게해 건너 필리피 교우들에게 보낸 서한의 일부입니다.
주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돕고 은총을 누리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한마음 한뜻으로 기쁨을 누립니다.
이기심과 위선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당시 교회에서 즐겨 노래하던
‘그리스도 겸손의 노래’
(필리 2,6-11)를 전하며, ‘성덕의 모범’이신
예수 성심을 우리 안에 간직하라고 권고합니다.
참 하느님이시면서도 자신을 비우고 낮추신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기에
성부께서는 부활의 영광과 함께,
‘주님’이란 호칭과 세상의 주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 권한을 문제 삼는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
(마태 21,23 이하)에 연결된 내용입니다.
그들이 그 자격의 출처를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요한의 세례 권한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반문하십니다.
백성들은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지만
지도자들은 그를 믿지 않았기에
말문이 막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도 답변을 거절하는 대신
그들의 태도를 자성토록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태 21,28) 하시며 이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전하는 이 비유는 다른 형식의
필사본이 두 개나 더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과 본문 내용은 같으나
아들의 순서가 바뀝니다.
맏아들은 ‘예’라고 대답만 해놓고
포도밭에 일하러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 한 뒤 뉘우치고
밭에 나가 일했기에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입니다.
또 다른 필사본은 내용까지 바뀌어 혼란스럽습니다.
맏아들은 싫다고 대답한 뒤 뉘우치고 간 반면,
둘째 아들은 ‘예’라고 대답만 하고 일하러 가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은 맏이가 아니라 둘째라고 전합니다.
중동지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방문지에서
이 비유 이야기를 자주 나눈답니다.
그들에게 ‘어느 아들이 더 좋습니까?’
물으면, ‘싫다’ 해놓고 실천한 아들보다
‘예’라고 공손히 대답하고
실천하지 않은 아들을 더 좋아한답니다.
그들 문화의 핵심가치는 ‘명예’이기에
가정의 중심인 아버지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은 가문의 수치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명예롭게 행동했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마태 21,31)고 물으십니다.
‘싫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회심하고
포도밭에 가서 일한 맏아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믿고 회개하여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먼저 얻은 사람은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죄인이던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께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 21,28).” 이르십니다.
‘포도밭’은 주님의 돌보심 아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교회의 은유이고,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사랑의 보금자리
(이사 5,7; 요한 15,1; 아가 1,6)입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이고,
교회는 살아계신 하느님 목소리입니다.
주님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고
실천하는 사랑의 삶이 은총 속에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바라시는 아버지 뜻과 기도 속에 발견한
개인의 소명이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아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자만이 들어간다.
(마태 7,21).”
-김창선(요한 세례자) -
[한주간 전례]
2020년 9월 28일 (월) [녹]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9,46-50
사람마다 문제의 크기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것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크게 다가오는 것이 세상의 상대적 논리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굳이 내 편, 네 편을 갈라 세우거나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나 찬성이 명확해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자리에 신앙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독일의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은 평범합니다.
악은 결코 섬뜩한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일 수도,
해맑은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악은 제 모습을 숨기고 나타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선한 것 안에서도 옳은 것 안에서도
얼마간의 부족함과 어긋남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세상은 쉬운 답을 원합니다.
사실 쉽다기보다는 편한 답을 원합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답,
모두가 그럴 것이라 추정하는 답 말입니다.
그래서 낯설고 불편한 답은
옳더라도 피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래전 어렸을 때,
동네에 서커스단이 오면 그렇게도 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문 앞에서 호객하는
서커스단 관계자의 말은 늘 이랬습니다.
“애들은 가라!” 이 말을 다시 고쳐 보면,
애들은 돈이 안 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그 ‘애들’을 당신 곁에 세우십니다.
인간이 덜된 존재로 하찮게 여기던
어린이를 통하여 가장 큰 것을 보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불편해했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누가 큰 사람인지
답이 분명한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누구든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설렘이 가득한 사회는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은 사회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선악과 정의를 논하면서
흡족해하는 이들의 편협성을 오늘 복음은 질타합니다.
절대 선과 정의를 좇고 있는 신앙인은
자신의 판단과 식별 안에 아름다운 척하는
섬뜩한 악마가 함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과 식별을 과신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29일 (화) [백]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교회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를 통하여
천사의 존재를 신앙 교리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천사에 대한 학자들의
여러 학설에 대해서는 유권적인 해석을 하지 않았다.
다만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이외의
다른 천사의 이름은 금하고 있다.
천사들의 축일도 오늘의 세 대천사 축일과
‘수호천사 기념일’(10월 2일)을 정하여
천사 공경을 권장하고 있다.
세 대천사 이름의 뜻은 다음과 같다.
미카엘은 ‘누가 하느님 같으랴?’,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사람, 영웅, 힘’,
라파엘은 ‘하느님께서 고쳐 주셨다.’이다.
[복음묵상] 요한 1,47-51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우체부 역할을 맡았지요.
대표적인 천사가 가브리엘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한 이유입니다.
또한 천사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천사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신다는 말이지요.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제대로 고백한 이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볼 수 없다고 여긴 것을
이미 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천 년 전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다고 하여
그분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천사를 볼 수 없다고 말하여서도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하늘의 천사가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고백하고 믿고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증거를 대라며 따져 묻겠지요.
그렇다면 간단히 답하세요.
내가 그 증거라고. 그럼에도 믿고 따르고
살고 있는 내가 그 증거라고. 그리고 또 답하세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 보려 노력하는 이가 나라고.
신앙은 도깨비 뿔을
단 이들의 괴기한 신비를 좇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늘의 이치를 땅 위에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하여 신앙은 자기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일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 주셨고,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오늘 자신의 삶 안에서 또 다른 십자가를 통하여
그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30일 (수) [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예로니모 성인은 340년 무렵
크로아티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로마에서
라틴 말과 그리스 말을
깊이 공부한 뒤 정부 관리로도 일했으나,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사막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히브리 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사제가 된 그는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일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하였다.
‘대중 라틴 말 성경’이라고 하는
『불가타(Vulgata) 성경』이 그것이다.
또한 성경 주해서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 저술을 남기고
420년 무렵 선종한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9,57-62
예수님께서는 잠시도
마음 편히 쉬실 곳이 없으셨습니다.
안타깝지요, 우리의 주님께서 쉬실 곳이 없으시다니요.
그런데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쉬실 곳이 없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장례도,
가족에게 작별 인사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단호함을 만납니다.
어디에 얽매여 있어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겠다.
그 어디에도 나만의 쉼터와 공간을 마련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복음을 논하고 묵상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이미 알고 있는 신학이나
주석학 지식을 맹신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다 읽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기존의 지식으로 복음의 의미를 판단합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다 버려야 해!’라고
속으로 수없이 외쳤겠지요.
그러나 저는
다르게 보입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기존의 지식과
삶의 방식에서 해방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기존에 즐기고 아끼던 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버림으로써 아까운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새롭게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떠날 때 기존의 삶이 아쉬운 것은,
그만큼 하느님 나라가 제 삶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자유인이셨습니다.
저도, 우리도 자유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숨 한번 크게 들이켜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얼른 빠져나와 하느님 나라로
멋지게 여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0월 1일 (목) [백] 한가위
[복음묵상] 루카 12,15-21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하느님께서는 왜 부자를 두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시며
그의 목숨을 되찾아 가시려 하실까요?
사실 그가 특별히 죄를 지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데 말이지요.
가령 일꾼들을 무임금으로 부렸다던가,
탈세하였다는 식의
불의한 모습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땀을 흘려 수고하였고
그 결과로 많은 소출을 거두게 되었으니,
어떤 면에서 그는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 눈으로 볼 때
열심히 일한 만큼 안락과 편안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부자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을 다시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이에 대하여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는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더 큰 곳간을 짓고
모든 곡식과 재산을 쌓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소출이 있기까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제물을 바칠 것이고,
자신을 도와준 일꾼들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하며
평소에 주는 품삯에 상여금을 얹어 줄 것입니다.
또 주변 이웃과 친지,
특히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도 자선을 베풀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에 등장한 부자는 탐욕의 노예였기에
어리석게도 하느님과 이웃에게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눈길이 쏠려 있었습니다.
한가위입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맺어 주신
햇곡식과 햇과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2일 (금) [녹]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9,18-22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짧게 보도하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라는 말이 덧붙여지는 것은,
루카 복음의 지속적인 서술 의도에서 비롯됩니다.
루카 복음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루카 복음의 의도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와 서로 친교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공간적 흐름이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집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다만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길에
십자가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이 복음서 안에서
늘 논쟁의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른바 승리의 그리스도이셔야 하는데,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음일 수밖에 없는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길이
성직자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혜택과
위로를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성직자들이 누리는 모든 혜택과 위로는
그들의 인간적 능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지라도,
성직자들은 꽤나 풍성한 대접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받고 또 받는 데 익숙해지면,
주고 나누고 함께하는 데 인색해질 수 있다는 것은
제 경험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아무리 영성 훈련을 한들 제 삶이 풍요로우면
이웃의 배고픔을 어찌 알겠습니까.
제 삶에 부족함이 없으면
하루 끼니가 아쉬운 이들의 형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함께하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자리에 배부른 이만 모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진 이든 그렇지 못한 이든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있는 잔치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자리를 마련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십니다.
특정 계층만을 위한 그리스도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10월 3일 (토) [백] 수호천사 기념일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에서 보호하는 천사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를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하신다.
다음은 수호천사에 관한 『성경』의 표현들이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90],11).
“저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신 천사께서는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창세 48,16).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복음묵상] 마태오 18,1-5.10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어린이’의 그리스말은 ‘파이디온’인데,
본디 이 단어는 열 살 아래의 아이나 유아를 가리킵니다.
이 말에서 ‘파이다고고스’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직역을 하자면 ‘어린이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우리말로는 ‘보호자’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이’란
어른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아이를 뜻합니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인식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당 신부였을 때
날마다 미사에 참례하는
서너 살짜리 꼬마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제가 사탕을 줄 때 말고는
자기 아빠에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껌딱지’처럼 아빠에게 붙어 있는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저는
저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나는 하느님께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가?’,
‘과연 나는 저 아이처럼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로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어른 행세를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나약하고 부족하며 철없는 아이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형제로 내어 주셨고,
우리 각자에게 알맞은 ‘파이다고고스’,
곧 ‘수호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몫은 오직
그분께 껌딱지 처럼 붙어 있는 것뿐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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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함께 하는 추석입니다.
그동안 손주가 얼마나 컸나 보고 싶고,
또 온가족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장만한 음식을 함께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하여 고향방문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직접 가서 뵙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 함께하는
추석연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