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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9월 20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Berardus 2020. 9. 19. 07:32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9월 20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1독서 (지혜 3,1-9) 제2독서 (로마 8,31-39) 복음 (루카 9,23-26)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 하느님에게로 자신을 버린 채 십자가를 지는 것이 구원이라는 ‘역설’ 생명 주인이신 주님을 더 강한 믿음으로 긍정하라는 의미 매일 체험하는 기적은 진정한 삶으로 다가가는 영성 비결


        회원들의 수가 많은 수녀회 책임 소임을 하다 보니 스스로 민망함을 자초할 때가 많습니다. 기어이 내 옳음을 주장하고 그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모두를 상대로 극도의 심리전을 펼칠 때입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확실하고 비장한 용기를 낸 것이라 하더라도, 이기기 위해 냉정해지고 조바심을 내며 집착하는 악순환을 답습할 때 이미 자존심은 무너집니다. 완고함과 강함이 부끄러움이기 때문입니다. 기어이 밀어붙여 끝까지 투쟁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어쩌면 사명감이나 영웅적 희생이라는 허울에 휘말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누가 살고 누가 죽은 것인지…. 묻고 또 묻게 되는 일이 지금 제 소임인 듯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상실의 두려움보다 더 해로운 것은 그 두려움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의 충만함과 인간 품위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루카 9,51-19,27)을 준비하는 내용(9,22-5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예수님 신원을 고백한 베드로의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은 자신이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점, 그러나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점을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22절) 그리고 바로 다음에 오늘 본문이 등장하는데,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어떤 것들이 요구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지금까지(9장)의 내용이 열두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23절부터는 모든 사람을 상대로 전개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이 납득하기 어려운 역설이기에, 더구나 십자가형이 실행되고 있던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공포스럽고 치명적 난제였기에, 부연설명이 필요했을 듯합니다. 그래서 23절(본문의 전반부)의 부연으로 24-26절(본문의 후반부)이 동반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왜 구원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 죽어야 산다는 역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 뒤를 바짝 붙어 걷는 지속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어떤 대상 뒤를 쫓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앞장서 가고 있는 그 대상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께 시선을 두어야만 하고, 그분께 시선을 둔다는 것은 그분과의 밀접하고 인격적이며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를 전제로 할 때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를 전제로 본문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조건을 ‘자신을 버릴 것’, 그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질 것’으로 알려줍니다.(23절) ① “자신을 버리다” 이때 사용된 단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때(루카 22,57) 사용된 그리스어 ‘아르네오마이’입니다. ‘... 를 부인하다’, ‘외면하다’, ‘등한시하다’, ‘버리다’, ‘모른다고 하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결국 이 단어를 통해 제시된 내용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체하고 외면하라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행복을 부정하고 등한시하며 스스로를 슬프게 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예수님의 계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마태 23,39)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명령 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명령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 다음 내용들을 잘 읽어봐야 합니다. ②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이 구절의 공관복음서에는 발견되지 않고, 루카복음서에서만 발견되는 표현이 “날마다”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청하듯이, 그리고 구약성경의 광야 여정에서 그날 분량의 만나만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루 단위의 결단과 실천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평생을 늘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소심하게 살게 하려는 이율배반적 옹졸함이 아니라 매일을 충만히 살게 하는 하느님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하느님 현존이 매일 우리에게 확인되고 매일이 기적을 체험하는 시간과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을 때 하느님은 필요없는 존재로 전락되기 쉽습니다. 사실 십자가형은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단번에 종결되는 죽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매일의 십자가야말로 진정한 삶에 의심 없이 다가가게 하는 영성적 비결일 수 있습니다. ■역설의 근거 복음에서 제시한 파격을 가장 잘 실천한 인물 중의 하나가 사도 바오로였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그는 하느님이야말로 항구히 자신의 편에 서 계시는 분임을, 그래서 누구도 그분 사랑에서 자신을 떼어놓을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39절) 이런 깨달음과 믿음이 있었기에 바오로는 기꺼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었습니다. 지혜서(제1독서)에서는 순교가 가능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지혜 3,1) 즉 우리가 하느님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순교의 고통은 사실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 대신 겪으시는 일이고, 따라서 순교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해주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고통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시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그 어느 때보다 고통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난감하고 기괴한 역설이 아니라 우리가 환호하며 끌어안아야할 진리입니다. ‘자신을 부정하라’는 말씀은 곧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긍정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내세에 대한 비정상적 집착으로 자신을 무시하고 죽음을 열망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그 죽음을 넘어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통과 강요된 희생, 가난과 소외에 짓눌려 멍해진 눈동자로, 그 어떤 자극에나, 그 누구에게나, 그저 고분고분해지는 것은 혐오스러운 삶이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세상을 움직이시고 구원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굳게 믿는 것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존엄이며 신앙의 힘입니다. 전염병 창궐이라는 걷잡을 수 없이 가공할 크기의 위협을 하느님 뜻 안에서 겪어내고, 그 불안을 하느님 빛으로 몰아내기 위해서 꼭 부여잡고 걸어가야 할.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가을을 재촉하는 코스모스 [한주간 전례] 2020년 9월 21일 (월)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성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 사도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 (『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 참조)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9,9-13 전통적으로 마태오 복음의 저자를 세리 마태오로 여겼지만 학자들의 의견은 다릅니다. 여기서는 주석학 논쟁을 언급하기보다 교회가 왜 세리 마태오를 마태오 복음의 저자로 여겼는지에 주목하여 묵상했으면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민족의 배신자이자 하느님을 등진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복음서 저자로 여긴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념은 상당히 파격적이었습니다. 초세기 신앙인이라고 우리와 다를 것이 있었겠습니까. 초세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의심하고 주저한 흔적은 복음서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이치와 논리에 따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이들 또한 교회 공동체와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신 모습이 복음서에 숱하게 등장하지요. 쉽게 생각하고 지나칠 장면이 아님에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그 장면들을 읽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난받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술 한잔 나누는 이가 있다면, 그 가 재림하신 예수님이시라면, 우리는 아마도 예수님을 비난하고 경고하고 훈계하며 급기야 쫓아내고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이에게 의사로 오셨습니다. 제 잘못으로 아프든 타인의 차별과 억압으로 아프든, 아픈 이가 있으면 일단 고쳐 놓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그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내뱉는 비난의 말들이 아픈 상처를 더 후벼 파는 죄인들의 무지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알면 얼마나 알고 정의로우면 얼마나 정의롭겠습니까. 참된 지혜이시고 참된 공정을 펼쳐 보이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죄인 마태오와 함께 식사하십니다. 바리사이만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22일 (화) [녹]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8,19-21 이른바 예수님의 새 가족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그 형제들을 외면하시는 예수님의 차가운 태도로 오늘 복음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마치 거사를 앞두고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떠나는 영웅으로 여기지는 말아야지요. 요컨대 예수님의 새 가족은, 혈연이라는 굳건한 장벽을 뛰어넘어 세상 모든 이를 형제요 자매라 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루카 복음에서 성모님 또한 말씀을 듣고 간직하실 줄 아는 이로 제시되십니다. (루카 1,45; 11,28 참조).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집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의 삶이 곧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중요한 것은 들은 말씀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잠 못 이룬 적도 있고, 스치듯 지나간 누군가의 말에 감동받아 평생을 두고 곱씹으면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말 자체의 무게감만이 아니라 말하는 이와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은 서로의 관계를 위한 도구입니다. 말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를 향하고 있는지, 나 자신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서로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은 상대를 참 피곤하게 합니다. 실컷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아 예수님과 갈라서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23일 (수) [백]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진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았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9,1-6 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쌍을 이루고 함께 나아갑니다. 말하자면 복음 선포는 인문학적 소양이나 객관적 지식의 함양과는 결을 달리하고, 동시에 우리 삶 곳곳에서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기쁨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걱정입니다. 대다수의 종교가 현실 도피적 위로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기우이기를 바라나 많은 신앙인이 성당이나 교회에 와서는 세상사 잊고 그저 하느님 안에 조용히 위로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이 팍팍하고 때로는 내려놓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파견되어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긴박히 돌아가는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홀로 베드로 광장에서 강복하시는 장면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력함과, 그럼에도 세상을 향하여 무엇이든 해 주시려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고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직접적인 기쁨, 가시적인 치유를 말하기 전에 오늘 복음 한 구절을 다시 묵상하려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은 언뜻 보기에 무소유의 편안함을 의미하는 듯싶지만 실은 ‘현실주의’에 대한 과감한 저항입니다. 돈이 있어야 성공이든 행복이든 말할 수 있다는 현실에서 돈 한 푼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현실을 우리는 내려놓고 비워 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치유됩니다. 더 쥐려고 경쟁하는 세상을 아무리 치유하고 위로한들 더 큰 질병이, 더 큰 바이러스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은 가난한 이들에게 차곡차곡 쌓이고, 그로 말미암은 부는 사회 상층부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질병을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고쳐 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가진 이들이 나눌 때 가능합니다. 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 남았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24일 (목) [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9,7-9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이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꽤나 유명하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이천 년 동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였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삶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때로는 거부하며 내친 결과가 예수님에 관한 무성한 소문으로 전해지고 또 전해졌겠지요. 소문을 다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 렇다고 소문의 가치를 애써 무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소문을 통하여 교회는 지금까지 제 모습을 유지하고 다듬어져 왔으니까요. 문제는 다양한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한 것은 다른 뜻, 다른 권력, 다른 유명세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죽인 헤로데가, 새로운 가르침을 얻어 새롭게 거듭나고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헤로데의 호기심은 권력에 대한 애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소문에 헤로데는 당황하였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잘못이었음이, 그 잘못이 드러날까 불안했을 터이지요. 헤로데의 모습이 저의 일상 모습인 것 같아 헤로데의 마음에 한참이나 머물며 이 묵상 글을 적고 있습니다. 무성한 소문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들에도 교회는 지금껏 여유로운 의젓함으로 살아왔습니다. 잘못과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잘못과 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오로지 예수님의 자비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어떻든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예수님 앞에 솔직히 서 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오늘도 여전히 끝기도 때 저는 하루 동안 저지른 잘못으로 아파하고 용서를 빌겠지요. 다만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25일 (금) [녹]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9,18-22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짧게 보도하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라는 말이 덧붙여지는 것은, 루카 복음의 지속적인 서술 의도에서 비롯됩니다. 루카 복음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루카 복음의 의도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와 서로 친교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공간적 흐름이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집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다만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길에 십자가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이 복음서 안에서 늘 논쟁의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른바 승리의 그리스도이셔야 하는데,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음일 수밖에 없는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길이 성직자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혜택과 위로를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성직자들이 누리는 모든 혜택과 위로는 그들의 인간적 능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지라도, 성직자들은 꽤나 풍성한 대접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받고 또 받는 데 익숙해지면, 주고 나누고 함께하는 데 인색해질 수 있다는 것은 제 경험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아무리 영성 훈련을 한들 제 삶이 풍요로우면 이웃의 배고픔을 어찌 알겠습니까. 제 삶에 부족함이 없으면 하루 끼니가 아쉬운 이들의 형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함께하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자리에 배부른 이만 모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진 이든 그렇지 못한 이든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있는 잔치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자리를 마련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십니다. 특정 계층만을 위한 그리스도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26일 (토) [녹]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9,43ㄴ-45 제자들이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두려워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신들이 바란 예수님과 실제 예수님 사이의 깊고 깊은 간극 때문이었지요. 그 간극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일종의 비겁함입니다. 대개 비겁함은 제 잇속 계산과 상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지만은 아닐 테지요. 당시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멋진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른바 묵시적 열광의 시대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살아갔습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내일의 달콤한 인생을 향한 묵시적 환상은 활개를 칩니다. 그런 열망을 단번에 꺾어 버리신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제자들은 허탈과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뚜벅뚜벅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루카 복음은 19장까지 열한 개의 장(9,51―19,48)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수난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얼마간의 비겁함과 얼마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그야말로 제자들이 복잡한 감정의 다발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다가갈수록 점차 다듬어진 신앙의 정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꼬여 버린 삶의 방향에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신앙이란 알아듣고 깨닫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몰라서 무모하게 내맡기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 수난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일상 속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지만 이 몸짓이 앎의 또 다른 조각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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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週)는 성 김대건 안드레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예년 같으면 성당에서 순교자들의 희생을 되시기는 많은 행사를 진행하는데 올 해는 겨우 미사 참례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마음입니다. 성당에서의 활동이 좀 더 자유로워지길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