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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8월 23일 (일) [녹] 연중 제21주일

Berardus 2020. 8. 23. 06:04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8월 23일 (일)
    (녹)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이사 22,19-23) 제2독서 (로마 11,33-36) 복음 (마태 16,13-20)
    그리스도는 혹독한 현재를 푸는 열쇠 예수님 신원을 고백하고 새로운 신원을 부여 받은 베드로 진정한 왕임을 선언하고 구약에서 계시된 하느님 구현을 표현 베드로, ‘반석’이라는 이름 받고 교회 주춧돌 역할 맡게 돼 하늘나라 열쇠 받음으로써 교회의 모든 것 매고 푸는 권한 부여

        …이제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 지인 한분이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게요, 하면서 사실 현재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코로나와 너무도 길었던 장마, 그리고 기록적인 폭우, 상상하지 못할 만큼 불어난 실업과 실직…. 불안한 몰락을 역력히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부인할 수 없는 요즘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모든 문제를 ‘묶고 푸는 열쇠’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려줍니다. 열쇠를 받은 것은 베드로이지만 그 열쇠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해결의 주체이신 것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절정이 되는 부분으로서(마태 16,13-20) 베드로가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예수님의 신원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전반부(13-16절)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원을 고백하는 것으로, 후반부(17-20절)는 반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새 이름을 주시며 그의 신원을 알려주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가 그리스도론적 고백에 집중되어 있다면 후반부는 종말론적 관점을 견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실 교회와 그 영원성에 대하여 “저승의 세력도 …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 (마태 13,18)이라고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 하늘나라의 열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누구이신지? 대체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자 핵심이 되는 질문입니다. 중요한 만큼 난해하기에 오늘 본문 자체가 반영하고 있듯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엘리야라고…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여러 답변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모든 신학적 주제의 기조가 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나자렛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서간을 집필하였고, 복음서의 작가들 역시 동일한 주제를 모색하며 복음서를 썼습니다. 초대 교회의 이단 논쟁과 공의회 역시 이 질문에 집중하며 사활을 건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토록 중요하면서도 난해한 질문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던지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6,13.15) 이에 베드로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그리스어 ‘크리스토스’에 해당하며 ‘기름부음 받은 이’를 의미합니다. 유다인들의 전통적 사고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왕’으로 등극하여 그에 상응한 절대적 지위와 권한을 가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의 진정한 왕이시며 통치자임을 선언하는 내용인데, 여기에 베드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초월적이고 신적인 호칭까지 첨부합니다. 구약시대 내내 이스라엘에게 계시되어 온 야훼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구현되고 드러났음을 표현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스승에 대하여 품고 있던 이러한 인식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귀한 은총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17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온전히 파악하는 지식은 지성적 능력이나 훌륭한 성품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히 고백한 베드로는 이제 반대로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신원을 부여받게 됩니다. “시몬 바르요나”(17절,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라고 불리던 베드로는 이제 ‘반석’ (그리스어 ‘페트로스’/아람어 ‘케파’)이라는 이름을 받고 ‘반석’ ‘큰 바위’가 의미하는 것처럼 교회의 단단한 기초와 주춧돌로서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베드로에게 ‘열쇠를 줌’으로써 교회의 모든 것을 ‘매고 푸는’ 권력과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 다윗 집안의 열쇠 이러한 베드로의 역할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 (제1독서)를 통해 예시된 것이었습니다. 유다 임금 히즈키야의 시종장 세브나가 직권 남용으로 해임되자 엘야킴이 그 직무를 이어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엘야킴에게 “관복”과 “띠”(이사 22,21)를 주시며 세 개의 이미지를 통해 그의 권한과 직무를 알려주시는데, 그 첫 번째는 “백성의 아버지”입니다.(21절) 절대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백성의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임무를 맡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통치가 갖는 내용이며 질서입니다. 두 번째는 “다윗 집안의 열쇠”로서(22절)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듯이 엘야킴은 하느님으로부터 “다윗 집안의 열쇠”를 받습니다. 이는 다윗 왕조를 위한 모든 권한을 받게 됨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이미지는 “말뚝”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23절) 박는다고 선언하시는데, 이 역시 복음의 ‘반석’과 관련된 이미지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시대에는 은유적 표현 ‘바위’ ‘반석’을 하느님께만 적용시켰기에, 이사야서는 건물의 기초를 표현할 때 ‘말뚝’을 사용한 듯합니다. ‘반석’ 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교회가, 이미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뚝’위에 세워진 천막으로 예표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열쇠를 받았지만 그 교회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듯, 정치는 국가의 수장과 공직자들이 하지만 그들이 구현해야 할 내용은 하늘의 뜻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제2독서 참조) 이에 대한 정직한 감수성 없이 정치인 자신의 신념대로만 조직을 운영할 때 지나친 독선이나 참을 수 없는 무능함으로 모든 이의 상생과 공동선이 위협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독한 생태적 위기 속에 숨죽이며 혼란을 감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삶의 열쇠는, 전우주의 창조질서와 그 비밀에 대한 직관,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절대적 신앙과 충실함입니다. 혁명이나 개혁은 상대편 진영의 가식과 위선을 무찌르는 인간의 투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완성해 가시는 구원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지구 곳곳의 훼손과 붕괴에 불안해하며 하루하루를 감내하고 있는 우리의 지친 눈동자를 들여다보시며, 예수님은 오늘도 간절하고도 처연하게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김혜윤 수녀 - [한주간 전례] 2020년 8월 24(월) [홍]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다. 필립보 사도가 인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요한 1,45-51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를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인도와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45-51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사도 명단에는 있지만(마태 10,3 참조) 이후 복음서에서 별다른 언급이 없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바르톨로메오 축일입니다. 히브리어로 ‘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르톨로메오는 ‘톨마이’ 또는 ‘탈마이’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순교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황금 전설』을 보면 예수님의 첫 기적인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이 바로 바르톨로메오이고, 인도나 아르메니아에 선교하러 갔다가 체포되어 산 채로 살가죽을 벗기는 참혹한 형벌로 순교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이 일어난 장소인 카나와 관련하여, 카나 사람 나타나엘을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인물로 여깁니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이가 필립보이고, 복음서의 열두 사도 명단에 늘 필립보 다음에 바르톨로메오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가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타나엘은 율법서와 예언서를 열심히 공부하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고정 관념 때문에 필립보가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자렛이 언급되지 않았고,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따라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의 이런 태도를 오히려 칭찬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선물을 주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마음의 가죽을 벗겨 진리를 보았기에,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드러낼 수 있던 바르톨로메오 사도입니다. 오늘 미사의 본기도를 다시 바쳐 봅니다. “주님, 복된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오롯한 믿음으로 성자를 따르게 하셨으니, 저희에게도 굳센 믿음을 주소서.”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25일 (화) [녹]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3,23-2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노골적으로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실제 삶에서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면서 매우 하찮은 것까지 십일조를 내는 것에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시라’는 1미터 정도 곧추 자라는 다년초로, 유다인들은 향기가 나는 그 씨를 양념으로 썼다고 합니다. ‘소회향’은 30센티미터 정도 자라는 한해살이 풀로, 그 씨를 역시 음식의 맛과 향을 돋우는 데 썼습니다. 박하는 매우 흔한 것이었고, 시라와 소회향은 들에서 그냥 자라기도 하지만 경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매우 하찮은 것까지 십일조를 내면서 더 중요한 실천 사항들은 간과하고 무시하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보기에 하느님을 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가르침을 일상의 삶에서 실천하는 자선, 단식, 기도를 심지어 ‘숨은 일’로 하라 하셨던(마태 6,18 참조)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의 신앙 행위가 그저 자신들의 공적을 드러내고 남에게 보여 주려는 비뚤어진 행위였을 뿐입니다. 이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 각자가 일상에서 행하는 신앙생활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내 욕심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며 살아가는 위선자인가를 식별해야만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도록 중요한 기도를 제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26일 (수) [녹]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3,27-32 우리는 저마다 나름의 경험과 지식을 통하여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려 합니다. 그러나 저마다 지닌 이 개념이 과연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릅니다. 곧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지인들이나 다양한 언론 매체 또는 그동안 읽어 온 책들일 터인데, 그것들 가운데 무엇을 어디에서 배우고 얻었는지 정확히 모를 때가 많습니다. 구체적인 경험이 모두 다르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 기준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기준과 개념을 남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스스로는 얼마나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이겠습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음이 가난하고, 슬픔에 젖어 있지만 온유하며 자비로운 이들은 물론,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면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리고 평화를 이루려 노력하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행복 선언을 산상 설교(마태 5―7장)로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판 설교(마태 23―25장)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은 그 가운데 여섯째와 일곱째입니다. 이렇게 일곱 가지 불행 선언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보이고자 영성을 잘못 이용하고 신심을 권력으로 여기는, 예수님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이 불행 선언이 지난날의 사람들에게만 유효하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곧 악의 경향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우리이기에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우리 양심을 성찰하라는 경고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데리고 온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오늘 복음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27일 (목) [백] 성녀 모니카 기념일 모니카 성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로, 332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그녀는 남편을 개종시키고,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된 데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남다른 기도와 노력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회개의 길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387년 로마 근처의 오스티아에서 선종하였다. 모니카 성녀는 그리스도교의 훌륭한 어머니의 모범으로서 많은 공경을 받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24,42-51 ‘종말론적 담화문’이라고 불리는 마태오 복음 23―25장은 흔히 ‘심판 설교’라고도 합니다. 좀 더 살펴본다면 23장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을 담은 유다교 심판 설교이고, 24―25장은 세상 마지막 때에 관한 종말 심판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마태 24,36)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종말이 언제 오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금이 중요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십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종말 심판을 대비하여 늘 깨어 준비하도록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 그리고 탈렌트의 비유 (마태 25,14-30 참조)를 언급하십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비유가 오늘의 복음입니다. 충실한 종은 주인이 맡기는 종들을 잘 관리하고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는 종입니다. 이렇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는 주인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맡길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 여기고는 맡겨진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는 종은 불충실한 종입니다. 결국 주인은 그 종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도 못한 시간에 돌아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입니다. 비유를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지만 불충실한 종에게 내리는 주인의 ‘처단’이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말에서 처단은 ‘결단을 내려 처치하거나 처분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의 그리스어 ‘처단하다’는 고대 페르시아의 극형 방식인 ‘둘로 잘라 버리다’를 뜻하기에, 불충실한 종의 최후는 그만큼 비참하리라는 것입니다. 충실한 종이 되어 종말을 깨어 준비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미 예수님께서는 복음적 담화문인 산상 설교의 결론에서 답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28일 (금) [백]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 (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며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며 참회의 자서전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에 선종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25,1-13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는 예수님의 여러 비유에 나타나는 전형적 형식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 그렇고(마태 7,24-27 참조),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던 부자가 어리석은 사람의 예였으며(루카 12,16-21 참조), 영리하여 칭찬받는 약은 집사는 반대로 슬기로운 사람의 예였습니다(루카 16,1-8 참조). 오늘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도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가 담겨 있습니다. 처녀 열 명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 다섯 명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준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슬기로운 처녀 다섯 명은 등과 함께 기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오는 시간이 지체되면서 처녀들은 졸다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립니다.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지만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뒤늦게 기름을 사러 가고, 이미 신랑은 도착하고 맙니다. 결국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문이 닫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비유 속 인물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신랑은 세상의 심판자로 오시는 예수님이시고, 신랑의 도착이 지체되는 것은 ‘그 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종말의 지연입니다. 열 처녀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교회 공동체를 뜻하고, 기름은 마땅히 해야 할 선행이며,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한 거부는 심판을 뜻합니다. 따라서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인 우리에게 깨어 준비할 것을 경고하시고, 일상의 수고로움에 대한 위로와 혼인 잔치에 들어갈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마땅히 깨어 준비하는 수고로움은 우리의 슬기로움에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들은 대로 실행하는 것이 믿는 이의 슬기로움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29일 (토) [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이러한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비롯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6,17-29 마르코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마르 1,1)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예수님에 대한 나자렛 사람들의 무시와 열두 제자의 파견(마르 6,1-13 참조) 그리고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이야기와 빵의 기적(마르 6,14-16.30-44 참조) 사이에, 헤로데 안티파스 임금을 매개로 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 (마르 6,14-16 참조)을 함께 놓고 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배다른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하여 세례자 요한에게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살아 있는 형제의 부인과 혼인을 시도하는 것을 근친상간이라 하며 금지하였기 때문입니다(레위 18,16; 20,21 참조). 헤로데는 비록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 바로 죽이지 않고 보호해 주며 때로는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듣고는 하였습니다. 오히려 입장이 불편하였던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고 세례자 요한을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회는 쉽게 왔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생일잔치 때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의 춤에 넋이 나가 허튼 맹세를 지키고자 세례자 요한을 참수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에 인식이 흐려진 것입니다. 마르코가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그의 죽음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의 사명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의로웠습니다. 담대히 진리를 외치고 또 증언함으로써 순교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속 권력자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생일 잔칫상에 사람의 목을 잘라 올렸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몇 개의 빵과 몇 마리의 물고기로 많은 이를 먹이시어 하늘 나라의 풍성한 잔치를 보여 주십니다. 요한의 죽음과 연결된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인 오늘의 의미를 더욱 잘 깨우칠 수 있을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지난 주 뒷산에 오르니 밤나무에 제법 큰 밤이 여물고 있었습니다. 올 추석에는 밤을 열심히 주어 볼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코로나19 확산으로 많은 분들의 우려와 걱정이 쌓이고 있습니다. 나의 행동이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형국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나부터 조심조심해야겠습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