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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8월 30일 (일) [녹] 연중 제22주일

Berardus 2020. 8. 29. 06:31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8월 30일(일)
    (녹)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 (예레 20,7-9) 제2독서 (로마 12,1-2) 복음 (마태 16,21-27)
    십자가의 길이 참된 명예다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소명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는 일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십자가의 길 자기를 비우고 제 십자가를 지며 주님 따를 때 참 제자 될 수 있어

        연중 제22주일의 말씀은 삶의 고통과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참된 명예를 누리는 길을 밝힙니다. 내면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이들에게 새 희망입니다.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가 되기로 결심만 하면 됩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다’라는 말이 있듯이 삶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지금도 코로나19의 재난과 경기침체 하에서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발자취를 따라 고통을 피하기보다 받아들이는 인내와 용기가 지혜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 예레미아(기원전 7세기)가 내면의 위기를 맞습니다. 그는 첫 고백에서 자신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예레 11,19)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꾐에 넘어가 놀림감이 되고 조롱을 받으며, 주님 말씀이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가 된다고 토로합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으면 큰 부담을 느끼고 두려움에 떨립니다. 때론 고통과 시련을 겪고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예언자는 인간적 고뇌에도 주님의 현존과 뼛속에 간직한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결코 멈출 수는 없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 (로마 12,1)로 바치라고 권고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대로 양과 염소와 같은 동물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겐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일까요? 그리스도인의 품격은 현세의 위선과 탐욕에 동화되지 않고, 새 정신으로 ‘의로움의 도구’나 ‘의로움의 종’(로마 6,13.16)이 되는 길입니다. 그 길은 기도 속에 하느님의 뜻을 찾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지 분별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로 봉헌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십자가 수난과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일을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교회의 반석 ‘베드로’라는 이름과 함께 무엇이나 맺고 푸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수제자 베드로(마태 16,16 이하)가 “맙소사, 주님!” 하면서 주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예수님은 즉시 돌아서서 단호한 어조로 반격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하느님의 일은 외면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마태 16,23)하여 하느님의 계획을 변화시키려고 도전한 베드로는 ‘사탄’이고, ‘걸림돌’이란 모진 질책을 당합니다. 사탄(satan)은 ‘적대자’, ‘반대자’라는 의미의 히브리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과 대립하는 존재로 마귀, 악마, 더러운 영, 귀신 등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스마트 시대인 오늘날에도 악마는 존재합니다. 교황님께서도 “악마는 존재하고 우리는 악마와 싸워야 한다.” 하십니다. ‘거짓 예언자’나 ‘세상의 우두머리’처럼 교만과 유혹으로 사람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악마를 막는 무기는 말씀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고 호기심이나 재미로라도 악마에게 기회를 주어서도 안 됩니다. 성자께서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40일간 단식하신 후 성부에 대한 충성심을 악마에게 시험당하셨을 때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마르 8,34; 루카 9,23) 예수님의 생애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 계획을 충실히 받아들여 자신을 버린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어야 산다’ 하는 역설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면 잃고,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는다.” (마태 16,25; 마르 8,35; 루카 9,24) 자기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다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 (필리 2,9)하신 겸손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소명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비움’과 ‘십자가 길’입니다. 그 리스도를 따르는 겸손의 길은 약점과 모욕, 박해와 역경도 달갑게 여기기에, 악마도 두려워하는 은총의 길입니다. (2코린 12,9-10). 생명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면 어두운 세상에 별처럼 빛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의 선물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열고 자신을 비우면 비울수록 성령의 인도대로 살아갑니다. 참된 명예는 고통을 피하고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세상의 방식은 거부하고, 자기를 비우고 사회가 부끄럽게 여기는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르는 참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소서. 성사의 힘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람을 돕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한주간 전례] 2020년 8월 31일 (월) [녹]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4,16-30 바빌론 유배 이후 예루살렘 성전을 잃은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소의 거룩함 대신 시간의 거룩함을 선택하여 ‘안식일’을 중요시하였고, 하느님 말씀을 바탕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회당’을 세웁니다. 간소하였던 회당 전례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회중 모두 일어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 뒤 율법서를 봉독합니다. 유다인들의 신앙 고백인 ‘이스라엘아, 들어라!’ (신명 6,4-5 참조)를 낭송한 뒤 시편과 ‘18조 기도문’(2마카 1,24-25 참조)을 바칩니다. 이어서 독서자(히브리어로 ‘마기드’)가 율법서를 봉독하고 설교한 다음, 또 다른 독서자(히브리어로 ‘마프티르’)가 예언서를 읽고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회당 전례는 회당장의 축복문 (민수 6,24-26 참조) 낭송으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 전례에 참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독서자(마프티르)가 되시어 이사야 예언서를 봉독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어서 설교를 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이 누구의 아들이신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특히 오직 메시아에게만 주어진 ‘눈먼 이들이 다시 보게 되는 일’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다는 말에 화가 잔뜩 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고 맙니다. 주님의 영이 내린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분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성령의 힘이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기에 앞서, 그 말씀의 신비를 깨우칠 수 있는 성령의 힘을 청합시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9월 1일 (화) [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4,31-37 오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더러운 영을 내쫓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그분의 권위를 언급합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연거푸 두 번 나타나는 예수님의 권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만 예수님과는 거리를 두지요. ‘무슨 상관’이냐며 예수님을 멀리합니다. 더러운 영은 제 이익과 제 삶의 안위를 행여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러운 영은 자신의 삶이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제 삶의 자리라고 우기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타인의 자리를 맴돌다 그것이 제 것인 양 여기며 기생하는 삶이 더러운 영의 삶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하여도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방해꾼일 뿐이며 낯설고 불편한, 그야말로 ‘타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구별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픈 이를 아픈 이로 보고, 슬픈 이를 슬픈 이로 보며 순수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데 예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제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에 질서와 고유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사유하고 존중하며 기념하는 오늘,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움켜쥐기보다, 우리 각자의 눈에 틀어박힌 들보를 빼내고 제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우리의 눈이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 할 것은 ‘예.’라고만 할 수 있는 순수함과 순박함이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2일 (수) [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4,38-44 우열이 가시고 질병이 사라지는 일은 기적이지요. 삶이 힘들 때마다 성경 안의 기적이 지금 여기서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우리 가운데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럼에도 성경의 기적은 글 속의 이야기일 뿐 우리의 현실 삶과는 연관이 없는 듯 건성으로 읽히고 곧장 잊혀집니다. 다시 묻습니다. 기 적은 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지요? 예수님께서 이루신 기적을 다시 곰곰이 따져 봅니다. 열병을 앓던 시몬의 장모, 갖가지 질병을 앓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입니다. 오직 마귀들만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 사람들을 서로 멀어지게 합니다. 가까이 가는 이와 멀어지는 이 사이에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기적은 멀리서 가까운 곳으로 모여든 이들이 있어야 일어나는 이른바 연대의 사건입니다. 멀어지고 외면한, 그 래서 입을 다물고 떨어져 나가는 곳에는 멸망과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에 가까이 다가가셨고 사람들은 어김없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기적은 풍성히 베풀어집니다. 멀리서 바라는 기적은 요행이고 우연일 테지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신기하겠지만, 기적이 제 삶과 인연을 맺을 일은 없을 테지요. 우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와 어떤 식으로든 연을 맺고 살아갑니다. 기적은 지금 가까이 있는 이들이 나와 함께 있는 그 자체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지금의 삶에 함께하는 이들과 더욱 가까워지려는 이에게는 매일의 삶이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요. 나의 삶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고맙게 사랑스럽게 함께하다니요. 이렇게나 기쁜 소식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3일 (목) [백]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40년 무렵 로마의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법학을 비롯한 귀족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은 그는 로마의 고위 공직자를 지낼 정도였으나 모든 재산을 교회에 기증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590년에 교황으로 뽑힌 그레고리오 성인은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한 최초의 교황이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듯이, 그레고리오 교황은 전례 음악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기고 604년에 세상을 떠났다. [복음묵상] 루카 5,1-11 깊은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얕은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얕은 곳은 군중이 몰려들어 누가 누군지도 모른 채 예수님의 말씀이 흩어지고 소모될 뿐입니다. 밤새 어두운 곳에서 어쭙잖은 옹졸함에 파묻혀 헤맬 뿐입니다. 얕은 이기심과 자존심으로 매번 우리의 인생은 소모적인 갈등과 분쟁으로 지저분해질 뿐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십니다. 깊은 곳에는 물고기가 많고, 물고기를 끌어 올릴 사람도 많이 필요합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풍성함과 죄의 고백이 서로 만나는 깊은 곳, 그곳에 대한 묵상을 겸허히 시작해야 합니다. 많은 것을 누리려 덤빌 때마다 우리는 얕아집니다. 얕은 곳에서 발버둥 치듯 경쟁하고, 경 쟁할수록 우리는 깊고 넓은 풍성함을 누릴 이유와 지향조차 잊어버립니다. 그러다 갑자기 깊은 곳에 놓이면 허우적대며 가라앉습니다. 빈약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얕은 곳에서 살아서인지, 깊고 풍성한 삶에 대한 준비와 이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쟁이라는, 생존이라는 현실에 세뇌되고 마비된 것일지 모릅니다. 죄의 고백은 자신의 얕음에 대한 고백입니다.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희망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죄의 고백입니다. 더불어 죄의 고백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세상에는 많은 이들이 많은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당연한 현실로 주어져 있습니다. 굳이 경쟁하지 않아도, 굳이 일등을 하지 않아도 저마다 누릴 풍요로움이 예수님 덕분에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천국이라 하지요. 천국은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노를 저어 나가는 죄인들의 회개로 이루어집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4일 (금) [녹]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5,33-39 유다 사회는 단식과 더불어 자선과 기도를 통하여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준비를 하였지요. 늘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하느님을 만나 뵙고자 하는 마음은 새로움으로 가득 찼던 것이 유다 사회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사회는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데 그렇게 완고하고 폐쇄적이었을까요? 누구보다 하느님을 갈망하면서, 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데는 그렇게나 더딘 모습을 보여 주었을까요? 유다 사회를 떠나 가만히 우리네 삶으로 시선을 옮겨 와 봅니다. 습관이 되어 편한 하루하루의 삶, 굳이 바꾸지 않아도 무리 없는 삶의 방식들, 애써 찾지 않아도 배부를 수 있는 여유. 이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는, 어쩌면 더 이상 세상이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실천들. 그 속에서 바라고 기다리는 새로움은 실은 묵고 묵은, 더 이상 낡을 수 없을 만큼 닳고 닳아 버린 골동품이 된 것이겠지요. 하느님을 기다린다지만, 실은 케케묵은 제 욕망의 민낯을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만남은 헌 것을 버리고 무조건 새로워져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새 것과 헌 것이 만나지 말며, 새 것은 새 것과 만날 수 있도록 식별하고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문제지요. 제 삶이 새롭지 않은데, 새 것을 기다린다는 모순을 깨닫는 것, 삶은 파도의 물결처럼 출렁이고 번잡한 욕망으로 가득한데, 제 삶의 고요를 바라는 황당함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것에서든 헌 것에서든, 태초부터 여태껏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께서 계시는 곳은, 솔직한 모습으로 기쁘게 한잔하는 축제의 장이어야 합니다. 괜스레 저만을 위한 축제를 기다리면서 제 욕망에 젖어 혼자서만 배시시 웃는 철부지는 되지 말아야겠지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5일 (토) [녹]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6,1-5 루카 복음은 구원의 완성과 그 기쁨을 노래하는 복음입니다. 더 이상의 기다림도, 더 이상의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신 주님을 맞이할 넉넉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애써 가꾸어야 할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 스며든 시간적 배경도 끝자락의 완성을 암시합니다.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것은 추수할 때의 행동이지요. 대개 성경 안에서, 추수는 이른바 종말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과도기가 아니라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예전의 약속이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추수’라는 이미지가 밝히 드러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도,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도, 좀 더 나은 내일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논박할 이유도 없습니다. 완성의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성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많이 부족해 보이고, 아직 멀었다 싶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모두 부자고 성공하였으며, 그래서 값진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서로 위로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행여 누가 배고플까, 행여 누가 울고 있을까, 그래서 행여 누구라도 완성의 시간에 누릴 기쁨의 잔치에서 소외될까 고민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입니다.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배고프지 않게 우리를 먹여 주십니다. 그리고 변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뒷배가 아주 든든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넉넉하여 나눌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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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 앞 화단의 꽃 잔디가 온갖 비바람을 무릎 쓰더니 꽃을 피웠습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여러 모종에서 조금씩 피웠어도 멀리서 보니 아주 이쁩니다. 이렇듯 우리도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저마다의 향기와 기도로 꽃을 피우면 우리 공동체가 훨씬 더 아름다워지리라 생각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