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주님, 그렇습니다”
연중 제20주일·
제1독서 (이사 56,1.6-7)
제2독서 (로마 11,13-15.29-32)
복음 (마태 15,21-28) 무시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린 여인
주님에 대한 확고한 희망으로 의탁하는 믿음 지녔기 때문
예수 향한 절대적 신뢰는 세상 사랑하는 마음 굳게 만들어
매사 조건 없이 내어주고 퍼주는 삶, 하느님 자녀의 조건
어제 교회는
성모님의 승천을 축하드리며
기쁜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하늘의 어머니께 경하 드리는
그 벅찬 기쁨이 주일을 맞는
우리 마음에 그득하여,
곱절로 행복한 주일이 되시길 빌어봅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 땅이 아닌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던 일을 들려주는데요.
티로와 시돈지방은 예언자들로부터
하느님의 심판이 내릴 곳으로 지명된 곳입니다.
(이사 23장 참조).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굳이 그곳을 찾으신 사실이 의아합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자비는
넓고 깊어 한계가 없다는 것,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서기만 하면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알리려하신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바로 그때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겐네사렛의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베푸셨던 이후라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야말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굳고 단단한 편견에 쌓여 시종일관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냉대에 지쳐서 내린
결단일 것만 같아 마음이 아릿합니다.
쓸쓸히 이방인의 땅을 향해서
걸음을 옮기셨을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라,
죄송함이 차오릅니다. 그
러기에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고맙고 고맙습니다.
막무가내였던 여인의 믿음이
예수님 마음을 위로해 주었을 테니까요.
오늘 듣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마음을 숙연케 하는데요.
어쩌면 그날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가 듣는 것과 똑같은
주님의 이야기를 묵상했던 게 아닐까 싶을 지경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날 예수님의 행적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구원이 유다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확신했을 것만 같은 겁니다.
이미 심판을 받을 곳으로 선포된 고장일지라도,
비록 멸망당할 죄를 지은 인간일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신 구원 계획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고히 깨달았을 것이라 싶은 겁니다.
그 크신 사랑에 감읍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이방인의 복음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리라 다짐했을 것이라 싶은 겁니다.
때문에 더욱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인들이
주님을 부인하고 등을 돌린 현실이 아파서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기를
간절히 갈망하며 소원했을 것이라 어림하는 것입니다.
▲후안 데 플란데스의 ‘그리스도와 가나안 여인’(1500년).
그런데 오늘
복음 얘기가 영 뚱딴지같습니다.
평소에 뵙던 예수님 모습이 아니라 당황스럽습니다.
마귀가 들어 고통을 당하는 딸을 위한
어머니의 간청을 완전히 묵살하시니까요.
더해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시니,
진정 어이 이러시나? 싶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현장의 극적인 반전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그토록 소원하던 딸을 치유해 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며
칭찬까지 해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주님께서는 “주님, 그렇습니다”라는
여인의 절대적 긍정을 들으신 후에
칭찬을 하셨다는 사실이 마음에 박힙니다.
이야말로 하느님만 바라보는 순명의 고백이기에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는 의미라 새겨집니다.
때문일까요?
오늘 1독서 말씀 역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요.
“정의와 공정이 그분 어좌의 바탕”(시편 97,2)이니,
옳고도 옳은 해석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은 마침내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로 드러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뜻인 게지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삶의 목표가 달라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께 의탁하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기에
‘무조건’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화답해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결국 굳은 마음을 녹이고 거친 생각을 다듬어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는 것은 믿음뿐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날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기에
무시와 거절, 심지어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배우고 새겨야 할 점은
주님을 향한 확고한 희망으로 무조건,
구하고 의탁하는 ‘기도’의 자세라 생각됩니다.
그 여인처럼 뚜렷한 믿음으로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맞장구쳐드리는
믿음의 배포를 키우는 것이라 싶습니다.
그런데요.
하느님은 절대적 불공정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나요?
하느님께서는 애초부터
내어주기만 하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모두에게
아무 값없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조물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주님의 것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때문일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처럼
불공정한 삶을 살아가기 바라십니다.
매사에 조건 없이 내어주고
퍼주는 삶이야말로
당신 자녀의 조건이라 밝히십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공정을 부르짖는 세상에서
당신의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기 원하십니다.
당신께 거저 받은 은혜를
홀로 누리지 말고 아낌없이 나누어주라 하십니다.
진정으로 당신을 닮기 위해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물러서 양보하며
손해 보며 감사하는 불공정을 살으라 하십니다.
이렇게 무조건 사랑만 하시는
하느님의 경계 없는 사랑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자녀인 나를 통해서
온 세상에 번져나가길 소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른 앎과
절대적 신뢰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굳게 붙들어줍니다.
말씀을 따라 올곧게 살아갈 때에
건강하고 튼튼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굳센 믿음으로 다만
“몇 사람만이라도”구원하기 위한
간절함을 잃지 않도록 합시다.
부디 오늘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깊이 스며들어 너도 나도 기꺼이,
불공정을 살아내는 축복을 살게 되길 탐합니다.
마침내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고
하늘의 어머니께 효도하는
귀한 자녀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내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무슨 일에서나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화답해드리는
긍정의 지혜로 주님께 칭찬 듣는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시길 간곡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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