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교회는
성모님의 승천을 축하드리며
기쁜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하늘의 어머니께 경하 드리는
그 벅찬 기쁨이 주일을 맞는
우리 마음에 그득하여,
곱절로 행복한 주일이 되시길 빌어봅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 땅이 아닌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던 일을 들려주는데요.
티로와 시돈지방은 예언자들로부터
하느님의 심판이 내릴 곳으로
지명된 곳입니다(이사 23장 참조).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굳이
그곳을 찾으신 사실이 의아합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자비는 넓고 깊어 한계가 없다는 것,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서기만 하면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알리려하신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바로 그때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겐네사렛의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베푸셨던 이후라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야말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굳고 단단한 편견에 쌓여
시종일관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냉대에 지쳐서 내린
결단일 것만 같아 마음이 아릿합니다.
쓸쓸히 이방인의 땅을 향해서
걸음을 옮기셨을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라,
죄송함이 차오릅니다.
그러기에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고맙고 고맙습니다.
막무가내였던 여인의 믿음이
예수님 마음을 위로해 주었을 테니까요.
오늘 듣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마음을 숙연케 하는데요.
어쩌면 그날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가 듣는 것과 똑같은
주님의 이야기를 묵상했던 게 아닐까 싶을 지경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날 예수님의 행적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구원이 유다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확신했을 것만 같은 겁니다.
이미 심판을 받을 곳으로 선포된 고장일지라도,
비록 멸망당할 죄를 지은 인간일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신 구원 계획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고히 깨달았을 것이라 싶은 겁니다.
그 크신 사랑에 감읍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이방인의 복음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리라 다짐했을 것이라 싶은 겁니다.
때문에 더욱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인들이
주님을 부인하고 등을 돌린 현실이 아파서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기를
간절히 갈망하며 소원했을 것이라 어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얘기가 영 뚱딴지같습니다.
평소에 뵙던 예수님 모습이 아니라 당황스럽습니다.
마귀가 들어 고통을 당하는 딸을 위한
어머니의 간청을 완전히 묵살하시니까요.
더해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시니,
진정 어이 이러시나? 싶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현장의 극적인 반전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그토록 소원하던 딸을
치유해 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며
칭찬까지 해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주님께서는 “주님, 그렇습니다”라는
여인의 절대적 긍정을 들으신 후에
칭찬을 하셨다는 사실이 마음에 박힙니다.
이야말로 하느님만 바라보는 순명의 고백이기에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는 의미라 새겨집니다.
때문일까요?
오늘 1독서 말씀 역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요.
“정의와 공정이 그분 어좌의 바탕”(시편 97,2)이니,
옳고도 옳은 해석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은 마침내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로 드러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뜻인 게지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삶의 목표가 달라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께 의탁하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기에
‘무조건’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화답해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결국 굳은 마음을 녹이고
거친 생각을 다듬어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는 것은 믿음뿐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날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기에
무시와 거절, 심지어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배우고 새겨야 할 점은
주님을 향한 확고한 희망으로 무조건,
구하고 의탁하는 ‘기도’의 자세라 생각됩니다.
그 여인처럼 뚜렷한 믿음으로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맞장구쳐드리는 믿음의 배포를 키우는 것이라 싶습니다.
그런데요.
하느님은 절대적 불공정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나요?
하느님께서는 애초부터
내어주기만 하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모두에게 아무 값없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조물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주님의 것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때문일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처럼
불공정한 삶을 살아가기 바라십니다.
매사에 조건 없이 내어주고
퍼주는 삶이야말로
당신 자녀의 조건이라 밝히십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공정을 부르짖는 세상에서
당신의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기 원하십니다.
당신께 거저 받은 은혜를 홀로 누리지 말고
아낌없이 나누어주라 하십니다.
진정으로 당신을 닮기 위해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물러서 양보하며
손해 보며 감사하는 불공정을 살으라 하십니다.
이렇게 무조건 사랑만 하시는
하느님의 경계 없는 사랑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자녀인 나를 통해서
온 세상에 번져나가길 소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른 앎과 절대적 신뢰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굳게 붙들어줍니다.
말씀을 따라 올곧게 살아갈 때에
건강하고 튼튼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굳센 믿음으로 다만
“몇 사람만이라도”구원하기 위한
간절함을 잃지 않도록 합시다.
부디 오늘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깊이 스며들어 너도 나도 기꺼이,
불공정을 살아내는 축복을 살게 되길 탐합니다.
마침내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고
하늘의 어머니께 효도하는
귀한 자녀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내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무슨 일에서나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화답해드리는
긍정의 지혜로 주님께 칭찬 듣는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시길 간곡히 기도드립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비온 후 마을 뒷산
[한주간 전례]
2020년 8월 17(월) [녹]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9,16-22
재산이 넉넉하고
지위가 높음을 ‘부귀’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부귀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만,
부귀는 칼날이나 창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방종하게 굴면
사람의 뼈와 살을 베고 찌릅니다.
그런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책 『설원』에는
부귀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부’는 만족할 줄 아는 데 있고
‘귀’는 물러남을 구하는 데 있다.”
만족하고 물러날 줄 아는 지혜만 있다면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예수님께
질문을 드린 한 젊은이가 모든 계명을
잘 지켰음에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주님 말씀에 슬퍼하며 떠납니다.
사실 젊은이의 질문은 두 가지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가?’였고,
둘째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 두 번째 질문을
스스로 되묻고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내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것이 무엇일까?’로 말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많은 무엇이 우리를 차지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한계를 깨닫고, 우리의 욕망이 무엇인지
올바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사랑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말을 인용하시면서
‘친절한 사랑은 오로지 내어 주고 섬기는 데서 오는
기쁨을 체험하게 한다.’(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94항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도 이 ‘부’와 ‘귀’를 노래합니다.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하지 마라.
죽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은,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시편 49[48],17-18.21).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18일 (화) [녹]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9,23-30
어제의 복음과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내용도 ‘부’에 관한 것입니다.
젊은이가 떠난 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십니다.
사실 마태오 복음에서
‘부자와 하늘 나라’에 대하여 알아들으려면
산상 설교의 시작인 행복 선언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러나 마태오와 달리 루카는
같은 행복 선언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루카 6,20 참조).
그리고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라고 말하는
마태오와 다르게 루카는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루카 6,21)이라고 언급합니다.
곧 루카는 실재적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차이를 보이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마태오가 복음을 전하려던 교회는
루카가 속하였던 교회와는 달리,
비교적 부유한 신자들이 주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유한 신자들에게 하느님 보시기에
참된 부자가 무엇인지를 강조하여
가르치려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마태오가 이처럼 윤리적으로 각색한 이유는
교회 안의 부유한 신자들이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제 복음의 젊은이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오는 많이 가진 이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이가 부자라는 사실을
교회 공동체 신자들에게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많이 가졌어도 스스로를 부족하다 생각하면서
항상 노력하는 겸손한 사람이 부자이면서
동시에 예수님 말씀처럼 “완전한 사람”(마태 19,21)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진 ‘부’를 나누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으로 자신의 빈 곳을 채우는
‘마음이 가난한 이’가 바늘구멍을
온전히 통과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19일 (수) [녹]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0,1-16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에만 실려 있습니다.
이 비유의 첫째 부분은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의 고용과 이에 해당하는
품삯에 대한 주인의 지시가,
둘째 부분은 온종일 일한 일꾼들의
품삯의 지급에 대한 불평 그리고 이에 대한
주인의 응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평의 주된 이유는
주인이 일이 끝날 무렵에 온 일꾼들과
온종일 일한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에서,
특히 오늘날과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주인의 행동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일꾼이 자신의 품삯을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고,
일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의 체제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고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게다가 권력과 부는 소수의 지배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차지였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포도밭 주인의 처사에 대하여
그 누구도 뭐라 할 상황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비유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 정의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정의를 담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자면 비유 속 주인은 원래의 계약대로
품삯을 계산하였기에 결코 불의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오히려 이 정의를 깨뜨린 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일어난
먼저 온 일꾼의 질투입니다. 주인의 정의,
곧 하늘 나라의 정의에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자비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노동의 대가만이 아니라 구직을 걱정하며
장터에서 온종일 서 있던 이들의
정신적 고통의 대가도 고려하시는 자비입니다.
마지막 사람에게도 고용의 기회를 주어
생계를 보장하여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구원받은 첫째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꼴찌가 되어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돌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20일 (목) [백]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베르나르도 성인은
1090년 프랑스 디종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시토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뒤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되었다.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몸소 모범을 보이며
수도자들을 덕행의 길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저서도 많이 남겼다.
1153년에 선종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1174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830년 비오 8세 교황은 성인을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22,1-1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혼인은 한 사람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일생 동안의 통과 의례 가운데 한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였습니다.
(요한 2,1-12 참조).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중요성도
두 번씩이나 언급하시는데,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확실한 계명
(마태 5,31-32 참조)과 함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라는
선언을 통하여 강조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드실 때도
혼인은 좋은 예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 잔치의 비유’가 그렇고,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도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 잔치의 비유’를 묵상합니다.
임금이 혼인 잔치를 열고 종들을 보내어
초대받은 사람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참석을 거부하고
심지어 임금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분노한 임금은 군대를 보내 복수를 하고,
종들에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 잔치에 데려오게 합니다.
마침내 혼인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는 하인들에게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혼인 잔치는 가장 풍성한 잔치였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화려하게 치장을 하였고
손님들도 합당한 예복을 갖추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랑 신부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거리에서 불려 온 사람들은
종들을 무작정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초대받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의 입성을
혼인 잔치의 초대로 비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늘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믿음의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갖추어 입고 준비해야 할
우리의 예복을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알려 주십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21일 (금) [백]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비오 10세 교황은
183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58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2
0년 가까이 본당 사목자로 활동하다가
만투아의 주교와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거쳐,
190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비오 10세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였다.
또한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해치며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1914년에 선종한 비오 10세 교황은 1954년에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22,34-40
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구원과 희망의 신탁을 전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라는 표현은,
새로운 신탁 또는 새로운 장을 나타내며,
상징적 표현인 ‘바싹 말라 버린 뼈들’은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이어져,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구원과 희망의 문을 열어 놓습니다.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
인간이 보기에는 조그마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만이 구원을 이루실 분이라고 제시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별적인
육신의 부활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불충으로
그들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졌지만,
그 관계의 회복은 온전히
하느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영의
그 뜨거운 ‘숨’을 다시 불어넣으시어
말라 버린 뼈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한 처음에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던 창세기를 떠오르게 합니다(창세 2,7 참조).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
더 절실한 오늘날에 다시금 그분의 ‘숨’이
우리 안에 불어넣어지고,
그분의 ‘손’이 우리에게 내리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이를 준비하도록 예수님께서 큰 계명을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22일 (토)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1900년 무렵부터 마리아께
‘여왕’의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1925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뒤 로마 전례력의 개정에 따라,
마리아를 천상 영광에 연결시키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성모 승천의 영광을 거듭 확인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린다.
[복음묵상] 마태오 23,1-12
예수님의 주요
호칭 가운데 하나가 ‘사람의 아들’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몇 번을 제외하고는
예수님께서 이 표현을 직접 쓰십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도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대부분은 인간 존재나
인류를 가리킵니다.
특히 에제키엘서나 다니엘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과 구별된 이로
‘보통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호칭을 다른 의도로 당신께 사용하셨습니다.
이 호칭은 그분의 인성만이 아니라
지상에서 수행하신 메시아 사명을 통하여 드러난
존엄한 신성까지 모두 담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지니고 계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버림받고 고통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의 신분과
사명을 가지고 계심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겸손한 섬김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남들에게 보이려고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며, 잔칫집이나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만을 좋아하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1요한 3,1 참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보통의 인간으로서 ‘사람의 아들’로 불린
에제키엘은 영광으로 가득 찬 하느님의 천상 어좌를 보았습니다.
‘사람의 아들’로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신
예수님의 명을 우리가 따른다면,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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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중순입니다.
장마에 경황이 없다 보니
입추가 어느새 지나갔고
다음 달 말이면 추석 연휴가 시작됩니다.
가을이 성큼 다가 온 것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