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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8월 9일 (일) [녹] 연중 제19주일

Berardus 2020. 8. 8. 06:29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8월 9일 (일)
    [녹] 연중 제19주일

    제1독서 (1열왕 19,9ㄱ. 11-13ㄱ)  제2독서 (로마 9,1-5)  복음 (마태 14,22-33)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물 위를 걷는 것, 인간 한계 넘어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행동 의심 품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다”라고 정체를 알리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갖고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 “나다”라는 이름은 창조자이며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라는 의미

        예수님은 빵의 기적 후 호수에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어두운 밤, 거센 바람이 부는 호수에 배 한 척이 떠오릅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제자들을 목적지에 데려가는 배는 역사의 사건에 흔들리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본문의 배경에는 ‘배’로 상징되는 교회가 겪는 역경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더 큰 믿음의 필요성이 깔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곧’이라는 표현(마태 14,22; 27; 31)과 함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행동과 말씀,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 예수님은 빵의 기적 후에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 마태오는 이 구절에서만 ‘재촉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하는데 직역하면 ‘강요하다’를 뜻합니다. 제자들 홀로 배 안으로 들어가라고 강요한 것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한 것입니다. 흔들리는 파도 한 가운데에서 지내야 하는 긴 시간에 제자들은 자신의 소명의 순간, 예수님에 대한 기억, 특히 죽음의 위협, 어둠, 역경, 당혹, 곤혹, 동요 속에 ‘스승이 우리를 버리셨을까?’하는 의심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시련 안에 놓이게 하신 분도 예수님이고 그들을 돕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제자들만 배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은 홀로 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에게도 하느님 앞에서 식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처럼(마르 26,36-46) 물러나시어 혼자 기도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찬양하고(요한 6,14-15) 그분을 정치 지도자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심을 망각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쫓아다니면서 자신의 소명을 망각할 위험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의로, 제자들은 강요로 과감하게 군중을 떠나 홀로 하느님 앞에 서는 시간을 갖습니다. 제1독서 엘리야의 체험에 비춰 이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영광의 순간에 ‘사도직에 좌절한 사도’로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서서 다시 힘을 회복하고 다시 자신의 길을 갈 것입니다. ■ 용기를 내어라, 나다 호수에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고 제자들이 곤경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 시간(새벽 3~6시경)은 아직 어둡지만 기다리면 날이 밝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동틀 녘’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이 시간은 자주 하느님 구원의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보여 주던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창조물에 대해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하십니다.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욥 9,8),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보고 심 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욥 38,16) 제자들은 그분이 바다 위를 걷는 것을 보시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합니다. “유령이다!” 그리고 두려워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카 24,37)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줄곧 “나다”라고 소개합니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한 이야기, 요르단강을 건너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나다”는 하느님이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이름(탈출 3,14)입니다. 이 신비로운 이름에는 하느님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자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하느님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자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시라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의심을 품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다”라는 말로 당신 정체성을 알려 준 이유는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용기를 내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베드로도 믿음을 시험 받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도 주님 현존에 대해 확인을 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표징을 청합니다. “오너라”라는 말씀을 듣고 모험을 감행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베드로를 구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해 바치는 한 마디 기도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30) 이어 예수님이 베드로를 “믿음이 약한 자”라고 부르는데 ‘믿음이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는 앞에서 ‘작은 믿음’을 일상의 필요에 관한 걱정, 두려움과 연결합니다. 여기서 ‘작은 믿음’은 베드로의 ‘의심’ 또는 흔들림에 적용합니다. 베드로의 믿음도 다른 제자들과 우리처럼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믿음 안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살기 위해, 배 안에 있는 다른 제자들도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진정한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이 기도의 외침 덕분에 그는 바로 도움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신앙과 의심 사이의 인간적인 드라마를 이 기도로 해결함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되어가는 사람, 성장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목숨을 바쳐 양들을 사랑하고 지킬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그는 이렇게 신자들에게 권고합니다. “고통 중에 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오.” ■ 성찰 인생의 기적은 자신의 어둠, 세상과 시대의 어둠 한 가운데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 안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힘, 싸울 수 있는 힘, 인내입니다. 인내는 기도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시대에 참된 기적은 우리를 둘러싼 거센 바람이 잔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새벽을 기다리며 그 안에 머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새벽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아멘.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비 온 후 서울 중곡동소재 메리놀외방선교회 [한주간 전례] 2020년 8월 10(월) [홍]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라우렌시오 성인은 스페인의 우에스카에서 태어났다.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수석 부제였던 라우렌시오의 임무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빈민들을 구호하는 일이었다. 로마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박해자들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고 하자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남몰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려갔다.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이에 분노한 박해자들은 라우렌시오 부제를 불살라 처형하였다. 258년 무렵이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가난한 이들이 바로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준 성인이다. [복음묵상] 요한 12,24-26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의 일곱 부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순교하였습니다. 성인의 순교에 대한 교회의 전승이 있습니다. 식스토 2세 교황이 미사를 드리다가 발각되어 사형에 처하여졌는데, 라우렌시오에게 “사흘 뒤 너도 나를 따르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던 성인에게 로마 총독이 교회의 보물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협박하자, 사흘간 말미를 달라고 한 뒤 모든 보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실제로 사흘 뒤에 라우렌시오는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나타나 바로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하였고, 이에 격분한 총독은 석쇠 위에 눕혀 구워 죽이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성인은 오히려 형리들에게 “자! 한쪽은 다 익었으니 나 좀 뒤집어 주시오.” 하였고, 마지막에는 법관을 향하여 “이제 다 익었으니 잡수시오.”라고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모두 재물과 생명에 대한 너그러운 자세를 통하여 라우렌시오 성인의 삶을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즐겨 사용하시던 씨앗의 비유로 뜻밖의 수확을 말씀하시며, 당신의 희생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강조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바오로 사도도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의 요점을 말하며 씨앗과 수확의 비유를 듭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기보다 미워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미워한다는 것은 거저 받은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움켜쥐고만 있던 손을 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라우렌시오 성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11일 (화) [백]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다. 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도 심하였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계속하였다. 1253년 선종한 그녀를 2년 뒤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8,1-5.10.12-14 마태오는 복음서 전체의 구성을 천을 짜듯 치밀하게 다듬으면서, 독자들에게 올바른 그리스도의 모습을 일관성 있게 보여 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말씀을 주제별로 모아 다섯 개의 담화문으로 정리합니다. 복음적 담화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 설교(5―7장), 제자들에 대한 파견 설교(10장), 하늘 나라에 관한 일곱 가지 비유를 모아 놓은 설교(13장), 예수님께서 교회에 관하여 하신 말씀만 모아 놓은 교회 설교(18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말론적인 담화문인 심판 설교(23―25장)입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설교 가운데 두 부분을 전해 줍니다. 곧 ‘겸손하여라.’로 시작하여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로 이어진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부르시어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잘난 신자들에게 공동체 안에서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도 이르십니다. 더욱 이해하기 쉽도록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되찾은 양의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아무리 못난 신자라도 구원을 받도록 공동체 모두가 돌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입니다. 1210년,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를 듣고 감동한 클라라 성녀는 2년 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속의 수도복’을 받아 입고 순명을 서약한 뒤, 복음적 가난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은 절대적 가난 속에서 인간 존재의 가난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삶으로 밝혀 준 성녀야말로, 오늘 복음이 말하는 잘난 체하는 마음으로 작은이들을 쉽게 업신여기는 우리에게 겸손의 참본보기가 됩니다. 클라라 성녀는 말합니다. “그대는 다른 이들이 바라보고 따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거울이 되어 가고 있는가?” 답은 오늘 복음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12일 (수) [녹]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8,15-20 마태오는 다른 복음사가들과 달리 복음서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유독 강조합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을 지닌 ‘임마누엘’입니다(마태 1,23 참조). 이는 천사가 요셉에게 알려 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은 복음서의 마지막인 예수님의 승천에도 언급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ㄴ-20).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또 한 번 쓰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특히 강조하는 두 번째는 ‘교회’라는 용어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며 하늘 나라의 열쇠를 그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에서 처음 언급되었고(마태 16,18 참조),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는 오늘 복음에서도 사용됩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그렇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교회에 주어진 권위와 권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가 가지는 권위는 파문을 결정하거나 취소하는 힘이 있음을 말합니다. 교회는 형제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시고자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죄를 저지르는 형제들이 회개하도록 끊임없이 타이르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머릿수가 아니라 모인 이들의 하나 된 마음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큰 희망을 품어 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13일 (목) [녹]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8,21─19,1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에제키엘은 상징적인 행위를 많이 보여 주는 이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거슬러 심판을 선언하는 예언자의 활동에서 우리는 이 행위들을 만납니다. 특히 오늘 독서는 에제키엘의 행위 가운데 하나인 ‘유배 짐’을 언급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충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시면서, 그들이 다시 계약에 충실하도록 에제키엘을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쓰십니다. 에제키엘은 이 불충의 결과 가운데 하나로, 유배 짐을 싸서 어두울 때 도시를 떠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그리고 그분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 땅에서 내쫓기게 되리라는 암시를 시각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사실 ‘예표’란 어떤 중요한 면을 쉽게 이해하고 파악하게 하는 ‘무엇’입니다. 이스라엘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기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예표, 곧 행동으로 보일 예언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명령을 받은 대로 반드시 실행해야 하고 이를 지켜본 이들은 변화하는 반응을 보여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규범입니다. 먼저 수도 없이 용서하라는 용서의 빈도를, 다음으로 하느님께 엄청난 용서를 받았으니 동료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라는 용서의 당위성을 ‘매정한 종의 비유’로 알려 줍니다. 물론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종은 매정한 인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먼저 무한한 자비를 베푸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용서하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 속 매정한 종처럼 그 어떤 변화도 없이 옹졸하기만 하면, 그 인생이 어두워질 무렵 유배 짐을 싸서 어깨에 메고 이 세상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결국 예표이든 비유이든 주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깨닫고 변해야 합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14일 (금) [홍]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1917년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다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여기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용소에서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는 그를 대신하겠다며 앞으로 나갔다. 결국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을 받고 처절한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1년 지하 감방에서 선종하였다. 이러한 그를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9,3-12 조선 시대에는 남성만이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행실이 음탕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하는 것, 곧 칠거지악으로 불리는 일곱 가지 항목은 부인을 쫓아낼 수 있는 명분을 뜻하였습니다. 그러나 ‘삼불거’라고 하는 ‘여성 보호’ 조항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칠거지악을 저지른 아내라도 버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 경우로, 돌아가서 의지할 데가 없거나,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거나, 가난할 때 같이 고생하다가 뒤에 부귀하게 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나 삼불거는 실제로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탈출기에 나오는 십계명에는 이혼을 허락하는 계명이 없습니다. 오히려 간음과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시비 거는 이혼장에 대한 규정은 신명기(24,1-4 참조)에 나옵니다. 사실 신명기의 이 규정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남편이 함부로 이혼할 수 있는 명분이나 권 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이유로 부인을 함부로 내쫓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 설교에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마태 5―7장 참조).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느님의 처음 의도대로 남녀의 결합이 가지는 존엄성을 회복시키고자 말씀하신 것이 오늘의 복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는 수백 겁의 인연이 쌓여야 비로소 부부의 인연이 맺어진다는데, 예수님의 혼인 선언이야말로 부부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큰 계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15일 (토) [백] 성모 승천 대축일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신앙 교의에 따라 성모님의 승천을 기리는 의무 축일이다. 성모님의 승천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의 신비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다. [복음묵상] 루카 1,39-56 “가톨릭 교회가 마리아에 대하여 믿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마리아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 신앙을 밝혀 준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487항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가운데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모 승천에 대해서도 966항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합니다. “마침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 거룩한 동정녀의 승천은 당신 아들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것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승천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로마 8,30)라는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실현되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승천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 헌신적인 태도,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겪으신 몸과 마음의 수고와 시련의 삶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 안에 받아들여져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께 드리는 엘리사벳의 인사에 대한 응답으로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을 찬양하십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겸손함이 드러나는 이 노래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비천한 여종을 굽어살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도록 성모님께서는 맏물이신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오게 하셨고, 또한 재림하시도록 ‘가난한 이들’의 희망을 노래하셨기 때문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장마로 인한 피해가 경기지방에 집중되었습니다. 긴 장마가 남부지방에서 중부지방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 주택뿐만 아니라 농경지의 침수로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하나 된 마음으로 이겨낼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