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6월 28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 제1독서(2열왕 4,8-11. 14-16)
제2독서(로마 6,3-4. 8-11)
복음(마태 10,37-42)
집착에서 벗어난 환대
가족 우선으로 하는 사랑으로는 예수님 따를 수 없어
인간 관계 속 애착의 위험성과 속박에 대한 경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버림이 아닌 믿음을 의미
부질없는 집착 넘어 넓은 사랑에 대한 전망 제시
‘사람대접 못 받는’
모욕의 순간은 우리가 정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혹은 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혹은 그들이 기대하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그들이 판단했을 때) 발생합니다.
받아들여지지 않고 환대받지 못하며
그래서 존재가 부정되고 마는 비극은
우리의 일상 도처에 기생(寄生)하는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환대’입니다.
가장 가난하고 불행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왜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인지를 설명해줍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복음서는 크게
5개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고
오늘 복음은 그 두 번째 ‘파견 설교’에 속해있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조건을 언급하시는데 첫 시작부터 가히 파격적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혹은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27)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유대로 묶일 수밖에 없는
가족 간의 사랑을 부인하는 듯한 말씀이
억지스러운 위협과 심각한 독선으로까지 느껴집니다.
이러한 난처한 말씀 앞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본문을
복음서 전체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큰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본문의 역설도
조금은 수용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박해를 각오하라’(10,16-25)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
(10,26-33)는 말씀 다음에 등장합니다.
특별히 ‘가족’을 모티브로 한 단락에 포함되어 있는데,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 듯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시며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설 것’이라고
예견하시고 급기야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10,34-36)라고
까지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리고 이러한 도발적 말씀 바로 다음에
오늘 복음의 첫 부분(“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 내용은
마태오복음서가 제작되던 시대의
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할 때에만
이해 가능한 구절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완성되었는데,
당시 유다 내부사회는 계급간의 갈등과 부패로
심각한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결국 로마군이 주둔하여 사태를 정리하는
계엄 상황에 들어가게 되고,
이에 저항하던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라는 파국적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이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의 의심과 박해를 받아야 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 때문에
가족 공동체가 붕괴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칼을 주러왔고 가족이 서로 갈라서게 된다는 말씀은
그리스도 때문에 감수해야했던 가족으로부터의
소외와 버림받음을 암시적으로 언급한 내용입니다.
■ 집착에서 벗어난 환대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대립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내용으로서는
가장 먼저 등장하는 4계명,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문장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문장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한다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 위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가치가 없다.”입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 “사랑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필레오’로서 누군가에게 매력과
호감을 느끼고 애착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초성적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동사 ‘아가파오’에서 파생)와 구별되는 감정입니다.
결국 이 문장은 애착의 위험성과 집착이 수반하는
속박을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착할 때 발생하는 불안, 질투, 실망, 미움은
인간을 파괴하는 치명적 무기가 되며
집착에서 벗어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인간은 훨씬 더 풍요롭고 안전하며
충만한 유기적 공존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복음의 후반부는
한 사람에 대한 집착을 접고,
대신 주변 이웃들을 ‘받아들임’과
그 결과로 ‘받게 되는’ 보상(40-41절)에 대해 언급합니다.
“받아들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데코마이’이며 이는 ‘환영하다, 인정하다,
인내하고 참아주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를 환대하고 존중하며,
그의 모든 것을 인내하고 참아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게 무조건적 환대를 실천하는 사람은
더 큰 환대로 보상받게 되는데 특별히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42절)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작은이들”은 스스로 보상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보상하시는 것입니다.
■ 환대와 보상
이러한 환대와 보상의 상호성은
제1독서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넴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한 여인은
엘리사 예언자가 그 지역을 지날 때 마다
자기 집에 모셔 음식을 대접하고 환대합니다.
이는 그녀가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
(2열왕 4,9)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사람을 환대한 것은 곧
하느님을 환대한 것이 됩니다.
결국 이러한 환대는,
나이 많은 남편과 자식 없이 살고 있던
여인의 임신으로 보상받게 됩니다.
“부인은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16절)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엇에 대한 집착은
주변의 “작은이들”에게 다가가야 할
우리의 진심과 선의를 무기력하게 하는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을 예수님 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경고하신 말씀은,
사실 부질없는 집착이나 애착을 넘어서는
넓은 사랑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렬하고 충실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 갇혀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 되고 맙니다.
폐쇄적이기에 치열하고,
치열할수록 맹목적인 가학성을
띨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상대를 포기하거나
버림을 의미하지 않고 ‘믿음’을 의미합니다.
상대를 믿지 못할 때 불안하고 초조하여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되고 결국 그런 놓을 수 없음이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서로를 믿을 때 자유로울 수 있고
관대하며 유쾌하고 따뜻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결속과
연대의 미명아래 자행되는 배타적 집착에서 벗어나
다름과 낯섦을 인정하고 서로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 존중하는 환대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
▲경기도소재 양수리성당.
[한주간 전례]
2020년 6월 29(월)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베드로 사도는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벳사이다 출신으로 본이름은 시몬이다.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 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베드로(반석)로 바꾸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삼으셨다.
복음서에 소개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여 칭찬받기도 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하다가 심한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로마 교회의 첫 주교로서 첫 번째 교황이기도 한
베드로 사도는, 67년 무렵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제자와는 달리,
비교적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뒤
유다교에서 개종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이 사는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그 공동체들에 보낸 많은 서간이 오늘날
『성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67년 무렵 로마에서 참수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16,13-1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장 위로를 받으셔야 하는 순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입니다.
스승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을
배신한 것이니 그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바오로는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감옥에 넘겼고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으니,
바오로 역시 죄인 중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 위대한 두 성인이 한때
큰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냅니다.
초대 교회에서 매우 비중 있는 이 두 사람의
치부를 드러내면 오히려
선교에 걸림돌이 될 법한데도 말입니다.
이들이 한때 하느님의 원수였고,
나약하였으며, 분별력이 부족하면서 때로는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위대한 이유는
그들의 생애에 아무런 결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님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자신들이 지었던 죄보다도
더 크다는 것을 믿고 회개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후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의 삶을 살려고 애썼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성인으로 공경합니다.
사람에게 거룩함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완전무결한 순수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죄, 털면 언제든지 나오는
먼지 같은 그 죄를 솔직하게 주님과
다른 이에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세에서
거룩함은 시작됩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신약 성경의 당당함은
바로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30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23-27
2005년 외국의 어느 극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최소 30명이 숨지고
45명이 부상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극장 안에는 천여 명의 관객이
연극을 관람하는 중이었는데,
무대 커튼에서 불씨가 피어올라 화재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대형 참사로 번진 것입니다.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화재에 놀라
긴급히 대피하는 과정에서 발에 밟혀 숨졌다고 합니다.
화재 자체보다도 발에 밟혀서
죽은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왜 발에 밟혀 숨진 사람들이 더 많았을까요?
어쩌면 화재보다도 화재에 따른 지나친 걱정과
공포심이 오히려 더 큰 인명 피해를 낳았는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하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22%는 걱정하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며,
4%는 자신이 전혀 손쓸 수 없는
일들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걱정 가운데
96%는 지나치고 쓸데없는 것입니다.
결국 걱정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나머지 4%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지나친 걱정을 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풍랑이 이는 것을 보고
‘죽을 지경’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닐는지요?
지나친 걱정에 사로잡혀 ‘지금 죽을 지경이야.’
하고 신음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걱정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걱정으로 신음하느니,
그럴 때일수록 하루하루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 지나친 걱정이
불러일으키는 화를 면하지 않겠습니까?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7월 1일 (수) [녹]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28-34
복음서가 전하는
치유에 관한 이야기는
보통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 업적에 대한 예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현실의 삶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을
해방하실 것을 미리 보여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 8,22).
결국 병자의 치유는 우리를 해방시키신
예수님의 구원 업적을 기억하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치유 이야기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상황에서
고칠 수 없었던 병자들을 치유하십니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아니면
오늘 복음에서처럼 악령이나 마귀에 의한 것이든,
손쓸 수 없는 이들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이것으로도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능가하는 힘과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드러나지만,
오늘 복음은 아주 뚜렷하게 마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밝혀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마귀의 외침은 마치 훌륭한 신앙 고백처럼 들립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몰랐지만
이미 마귀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에도 고을의 주민들은
두려움에 차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마귀의 고백을 통하여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2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8
오늘 복음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쉬우냐?” 어느 쪽이 쉬운 것일까요.
죄를 용서하는 일은
하느님께만 있는 권한으로
다른 이에게는 불가능하지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받은 결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정말로 일어나서
걸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결과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말하기에는 더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시며 당신 자신을 증명해 보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중풍 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갑니다.
오늘 복음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권한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낫게 하는 더 어려운 일을,
실제로 그가 병이 나아서
걸어가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받았다.” 하신 말씀 역시 이루어질 수 있고,
예수님께도 하느님처럼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3일 (금)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고도 불렸다
(요한 20,24 참조).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그는
매우 강직한 제자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고 했던
베타니아 마을로 가시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강한 불신도 보였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복음묵상] 요한 20,24-29
토마스 사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한때는 오늘 복음의 내용을
‘토마스의 불신앙’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토마스 사도를 질책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를 통하여 신앙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합니다.
그는 당시 부활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였던,
믿지 못하였던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활은 그야말로 초유의 사건입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쉽게 믿지 못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마르 16,11.13 참조).
부활은 그만큼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발현을 통하여 이런 토마스에게,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토마스 이야기의 결론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부활을
확인하려 하고 믿지 않았지만,
부활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넘어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 전하는 행복 선언입니다.
이는 당시의 제자들이나 사람들보다
지금 부활을 믿는 이들을 향한 말씀이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4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4-17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요한의 제자들은 질문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에게서도
비슷한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하고 질문하였고,
그 이전에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을 모독한다.’라고 비난한 바 있습니다
(마태 9,3 참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런저런 일들에
한마디씩 거드는 것을 보니
당시에 예수님께서는 인기가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제자들은
잔치를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기뻐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코헬렛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코헬 3,1.2.4.6).
우리 삶에도 이런저런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림과 성탄, 사순과 부활,
그리고 연중 시기를 살아갑니다.
“때”를 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마지막 때를 향하여 갑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코헬 3,13).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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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무더위와 장마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게다가 코로나19는
아직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피로감으로 감정조절이 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여유를 갖도록 해야겠습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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