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5월 10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제1독서(사도 6,1-7)
제2독서(1베드 2,4-9)
복음(요한 14,1-12)
참된 삶의 길은 ‘사랑의 디딤돌’
그리스도는 ‘선택된 값진 머릿돌’
하느님 백성으로 값진 돌이 되려면 빛의 자녀답게 사랑의 삶 살아야
예수는 하느님과 친교 이루는 길로 인간 존재의 참된 삶의 길과
진리 안에 있는 생명의 길을 계시
오늘은 부활 제5주일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친교를 이루는
참된 삶의 길임을 계시하십니다.
삶의 궁극 목적인
‘행복으로 가는 길’이기에 마음에 간직합니다.
이 말씀에 머물다 보니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고별인사가 생각납니다.
젊은 시절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공감한
한 정신과 의사가 쓴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삶은 고해다”로 시작됩니다.
영적 성장의 길은
평생 걸리는 머나먼 배움의 길인가 봅니다.
주님의 길을 따라가면 행복할 텐데
우리의 마음은 산란합니다.
삶은 힘들고 어깨의 짐은 무겁습니다.
인생은 ‘고해(苦海)’이기 때문일까요?
오늘의 제1독서의 말씀은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
홀대를 받았기에 그리스어를 쓰는 유다인들이
히브리어를 쓰는
유다인들에게 불평합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분배에
인간적 약점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열두 사도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봉사자(부제)를 뽑아 안수하여
사랑의 봉사직무를 맡기고,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충실하니 교회는 더욱 성장합니다.
오늘의 제2독서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예루살렘 성전의
“살아 있는 돌”이심을 밝히십니다.
주님께서 “시온에 놓으신 돌,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모퉁이의 값진 머릿돌(이사 28,16)”이십니다.
세례로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교회(‘영적 집’)에서 보편사제직을 수행하는
“살아 있는 돌”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바칩니다(1베드 2,5).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이 돌은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1베드 2,7; 이사 8,14)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교회 건설에
쓰임새 있는 값진 돌이 되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바치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빛의 자녀’답게 사랑의 삶을 사는
‘디딤돌’이 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이 전하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담화(요한 14-17장)의 시작입니다.
성경에는 야곱, 모세, 바오로 사도 같은
주요 인물들이 마지막 떠날 때
후손에게 들려주는 여러 이야기
(창세 49장, 신명 31-33장, 사도 20장)가 있습니다.
마지막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를 이루는 길임을 보여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인간 존재의 ‘참된 삶의 길’,
진리 안에 있는 생명의 길을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마지막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과
으뜸 제자인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함을 아시고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하느님과 그
리스도를 믿고 또 믿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요한복음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의 말씀’,
‘세상의 빛’, ‘메시아’, ‘착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참포도나무’(요한 1,14.29; 6,35.68; 8,12;
9,22; 10,11; 11,25; 15,1)로 전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합니다.
바로 그 성경이 예수님을 위한 증언입니다(요한 5,39).
공생활 동안 함께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4)”라고 상기시키지만
형상을 중시하는 토마스는 그 길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
리스도께서 아버지로 가는
유일한 길(요한 14,6)임을 단언하시나
체험을 중시하는 필립보는 알아듣지 못하고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한 제자가 모른다기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하고 주의를 환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하느님을 압니다(요한 8,19).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 하신 주님 말씀을
믿지 못하면 하신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으라 하십니다.
(요한 14,9-11).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사랑입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조건 없는,
완전하고 보편적인 사랑이며,
삶의 의미를 되찾고 기쁨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하느님의 계시이고
사랑이십니다(가톨릭 교리 478, 609).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길이십니다.
그 길은 인간 존재가 아버지를 직접 뵙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사랑하면 모습이 닮아간다고 합니다. 우
리의 품위는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성전에
“선택된 값진 머릿돌”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주님의 도구가 되어 모든 이들이
딛고 오르내리는 ‘사랑의 디딤돌’이 되면
“그분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요한 14,12).”
-김창선(요한 세례자)-
▲서울 신사 성베드로성당 성모상
[한주간 전례]
2020년 5월 11(월) [백]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4,21-26
사랑과 계명은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를 떠올려 봅니다.
자신은 아파도 상대가 건강하기를,
자신은 슬퍼도 상대가 웃기를 바라는 일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위하여 더 움직이고,
더 살피고, 더 챙기게 됩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나고,
사랑은 그렇게 애틋한 습관으로 서로에게 남습니다.
계명은 지켜야 할
의무 규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일구어진 습관입니다.
거창한 이벤트를 준비해서
사랑을 일구어 가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습관적 체험 안에서
사랑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
분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노력을 통한 자기 계발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의 연습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켜 냅니다.
삶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계명을 지키는 일이 됩니다.
주위 환경이 달라도,
서로의 관점과 사상이 엇갈려도,
어쨌든 살아 내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모두들 마음 편히 살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고
그 터가 때로는 우리 집일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하루를 살아갑니다.
참 외로운 일이지요. 참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1세기 말엽, 기다리던 메시아께서는 오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증언하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죽어 가고,
의지할 데 없어 헤매는 신앙인이 나약해졌을 때
요한 복음 저자는 예수님과, 어쨌든 살아 낼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으로 성령을 소개합니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오로지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신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히 들려주시는 역할을 도맡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쨌든 살아 내기’였습니다.
어쨌든 오늘 하루 살아 내었으면
그만큼 사랑한 것이고 계명을 지킨 것입니다.
참 고생하셨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12일 (화) [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4,27-31ㄱ
이따금 평화를
잔잔한 호수의
평온함에 빗대어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친 파도와 소란한 빗줄기를
‘평화’라는 말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잔잔한 호수를 떠올리며
예수님의 평화를 묵상해 보자니,
예수님께서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자리가 꽤나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상을 떠나시는
당신 수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스승을 따르며 한생을 내어 맡긴 제자들은
잔잔한 호수의 평화는커녕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만한데, 평화라니요?
예수님께서는 분명
세상의 평화와 다른
‘당신의 평화’를 주시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평화라면
무리 없이 받아들일 테지만,
세상과 다른 평화라면 도대체 어떤 평화일까요?
예수님의 평화는 무엇보다
마음의 산란함과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무엇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하고 두려움에 휩싸일까?’ 되물어 봅니다.
스스로 챙겨야 할 몫과
예수님을 통하여
꿈꾸어 온 영광의 시간들이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제자들은 불안한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수난의 길이
너무나 힘겨울 것 같아 연민의 정으로
제자들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일까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 낸 자리에
예수님의 평화는
기쁨의 자리로 다시 정리됩니다.
기쁨의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챙겨야 할 몫도,
우리 각자가 지향하는 영광의 시간이나
명예로운 순간도 아닌,
그저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을 위하여
수난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우리가 두려운 이유는,
스쳐 지나듯 사라지는 것들에
우리의 영혼마저
빼앗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을 만나 평화로워지려면
우리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잠시 만족할 것들에 사로잡혀
진정 나아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저마다 자유로운 삶의 회복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13일 (수)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8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예수님과 신앙인의
관계를 드러내는 값진 비유입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홀로 남겨진 가지는
불을 지피는 데 던져지거나
땅의 거름으로 사라져 가겠지요.
열매를 맺는 풍성한 수확을 생각하면
가지는 나무에 제대로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는 다른
두 지향점의 공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열매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서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포도나무로 소개하시는 것은,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드러내시기보다는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들이 당신 안에서
또 다른 예수로 거듭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두 존재가 하나로 거듭난다면
서로의 원의와 지향점도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청하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각자가 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어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더러
당신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자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요한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라고 초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자고,
어깨동무하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두고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청하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앙에 위험한 것들은 대개
하느님을 대상화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대상화된 하느님, 자기 자신과 다른 하느님,
그리하여 늘 목적이 되어 버린 하느님은 그저 우상일 뿐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14일 (목)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로 뽑힌 인물로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유다의 자리를 넘겨받는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이로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마티아 사도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예루살렘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데 이어 이방인 지역,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복음묵상] 요한 15,9-17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은 한쪽이 다른 쪽을 향하여
부탁하거나 지시하는 의무 수칙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숙제로 주어진다면
사랑하면 할수록 지쳐 가게 됩니다.
성당 일을 할 때나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갈 때나, 적
어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것을 해야 할 일이라고 다짐할수록,
우리는 그 일을 기쁨보다는
의무감으로 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서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한쪽이 다른 쪽을 향하여
건네는 선물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자리에
서로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야 할 일’로 생각하기보다
‘하고 있는 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굳이 무엇인가 행동하여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 함께 머물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하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부조리하고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창한 선물을
인간에게 건네주심으로써
인간이 감동받고 회개하여
하느님이신 당신께 돌아오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자리에 인간으로 오신,
그리하여 참으로 인간다운 것이 참으로
하느님다운 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은
더러움을 떠나 깨끗함으로,
부족함을 떠나 완전함으로, 고통을 떠나
행복으로 나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을 더럽게 보지 않고,
부족함을 무시하지 않고, 고
통을 외면하지 않는, ‘그럼에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좋은 곳에 머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싫어도 미워도 함께 머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15일 (금) [백]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2-17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길을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들으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예수님 덕택에
우리는 예수님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친구가 된 것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관계라는 것이 참 신비롭습니다.
한 사람을 좋아하고 의지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삶조차 파탄 나고
어지럽게 될 때가 있는가 하면,
파탄 난 삶이 새롭게
고쳐지고 다듬어져
더욱 아름다운 삶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실은 둘만의 일이 아니라 둘의 만남 속에
드러나는 기대하지 않은
창조 활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 생각이 분명 다른데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나의 새로운 생각으로 거듭나기도 하다가,
생각이 같아서 만났는데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합니다.
둘의 만남은 늘
또 하나의 다른 존재를 불러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안에서 수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을 소개하시고 선포하시며,
그 아버지와 한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창조적 자리를 함께 얻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예수님과 한 분이신
아버지의 자리도 마련하는 여유로운 일입니다.
서로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 마음의 자리는 더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만날수록 사랑의 마음은 더 커져
더 많은 이를 품고 껴안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관계의 신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2020년 5월 16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8-21
예수님과 우리 신앙인은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하나 됨의 자리를
미움과 박해로 소개합니다.
미움의 대상으로 예수님과 우리는 서로 하나이고,
박해의 대상으로 예수님과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은 일깨웁니다.
대개 세상은 고통이나 미움,
또는 환난과 다툼을 싫어하고 회피합니다.
신앙인 가운데 더러는 웃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세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되지요.
슬프지 않고 기쁘게 살아야겠지요.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 뒤에는
그만큼 슬프고 힘든 삶이 진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박해를 즐기신 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고통과 박해를 기꺼이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남을 위할 줄 아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바꾸어 버립니다.
특히 고통의 문제와 배고픔의 문제 등을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으로 치부해 버리고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그분과 함께
고통과 박해의 자리에 하나가 되는 우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와 사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배부름이 누군가에게는
배고픔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신의 웃음이 누군가에게는 쓰라린
눈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고통과 슬픔,
가난과 불행 등의 부정적 상황은
서로서로 챙겨 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이기적 행태의 결과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루를 살아가는
개개인에 대한 비난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이루시는
친교와 신앙인의 일치로
세상의 비난을 이겨 내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어느 자리에서 하나이고 싶습니까?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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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들어서니
점차 기온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장미꽃도 더욱 활짝 피고
아카시아 꽃향기도 은은히 퍼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되길 기도합니다. .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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