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5월 3일 (일)
[백] 부활 제4주일 제1독서(사도 2,14ㄱ.36-41)
제2독서(1베드 2,20ㄴ-25)
복음(요한 10,1-10)
완벽한 신뢰와 결속의 관계
목자의 음성에만 움직이는 양떼
목소리만 알고 따르는 것이 아닌
서로 깊이 이해하고 신뢰하는 관계
난관을 먼저 마주하고 걷어내며
양들과 함께 극복하는 ‘착한 목자’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임을 선포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그 사람은 보고 있었다.”
스위스의 일간지 「노이어 쮜르허 자이퉁」
(Neue Zurcher Zeitung)이
‘어둠속의 대화’라는 작품을 평하면서 쓴 문장입니다.
장애우 복지관에서 근무하는
수녀님을 통해 알게 된 이 전시회는,
시각이 차단된 상황에서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더 잘 파악하게 됨을,
그리고 어둠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시각 이외의 감각들을 활용하여 보다 진정한 소통에
이를 수 있음을 매우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와
그를 따르는 양떼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양들은 여러 목자들 중 유독
자기 목자의 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듣고,
동시에 목자는 자기 양들을 찾아내어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요한 10,3)
느낌, 체취, 목소리만으로 상대를 구별하여 알아내고
그만이 갖는 특성을 이름과 일치시켜 인식하는 관계는
특별한 관심과 섬세한 사랑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고,
하느님과 우리가 바로 그런 관계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 오늘 복음의 주제입니다.
■ 복음의 맥락
본문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됩니다.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시고(요한 10,1-6)
후반부에서는 ‘양 우리의 문’에 비유하십니다.
(7-10절)
‘목자’와 ‘양 우리의 문’은 모두
당시 근동지역의 목축업을
배경으로 할 때 이해되는 이미지들입니다.
우선 ‘목자’는 이스라엘 안에서 고대로부터
매우 친근하게 정착된 이미지였습니다.
구약성경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모세와 다윗은 백성의 영도자가 되기 전에
이미 실제로 양떼를 치던 목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마을에는
주거지에서 떨어진 외곽에 큰 양 우리가 있었고,
그곳에서 양들을 공동으로 사육하였다고 합니다.
양 우리에는 여러 소유주의 양들이 무작위로 섞여 있었지만,
그들은 각자의 목자가 불러내는 소리를 알아듣고
그 목자의 음성에만 움직입니다.
두 번째로는 ‘문’에 대한 것인데,
양들이 머무는 울타리에는
일반적으로 문이 하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양들에게 출입 시의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고,
양들을 강도나 도둑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의 본문은 이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여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목자이지만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1절)라고 선언합니다.
■ 목자의 특징
오늘 복음의 본문은
착한 목자가 어떤 특성을
갖는지를 자세히 알려줍니다.
우선 목자는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존재입니다.
(3절)
목자가 아닌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4절) 나는데
이유는 양들이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5절)
한국어 ‘알아듣다’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아쿠오’는 단순히 듣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경청하여 식별하고 이해함을 의미합니다.
양들과 목자는 단순히 목소리만을
구별하여 따르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아는 관계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호명한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3절) 나갔다가 또다시
하나하나 양 우리로 들여보내는 일을 합니다.
매일같이 이렇게 이름을 부르고 함께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작업이지만 그 어떤 리더십도
해내지 못하는 충실한 추종 관계를 형성합니다.
세 번째는 양들에 “앞장서”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앞장서 감’은 모든 역경과
장애를 미리 마주하고 걷어내며
가야할 방향성을 결정함을 의미합니다.
착한 목자는 매일의 난관을 먼저 마주하고
양들과 함께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는 그들을 따르게 하여 “풀밭을 찾아…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9-10절)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소리를 알아듣고 들은 바를 행하며
이를 충실히 따르는 매일의 관계가
서로를 사랑으로 살려내는 기적과 구원이 됨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착한 목자와
반대되는 이미지도 소개합니다.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이들입니다.(10절)
사실 도둑은 하느님 백성의 소유를 빼앗는 이들이고,
강도는 하느님 백성을 폭력과 위협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 백성을 갈취하고 생명을 도살하며
권위적 폭력으로 지배하는 이들은
목자가 아닌 도둑이며 강도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 목자이시며 주님이시고 구원자이신 분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제2독서, 1베드 2,21)
주심으로써 진정한 목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본보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히포그람모스’는 아이들이 언어를 배울 때
반복적으로 따라 쓰기를 연습하는 일정한 샘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이런 연습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발자취’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이크노스’ 역시
‘발자국’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단어로서,
단순히 따를 뿐만 아니라 그분의 발걸음이 남긴
흔적을 그대로 밟아야 함을 알려줍니다.
그분께서 ‘본보기와 발자취’로 보여주신
모범의 구체적 내용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셨다는 것이고(23절)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24절)
이것이 진정한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가 되는 길이며(25절)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다고 선포합니다.
(제1독서, 사도 2,36)
‘목자’이신 그분은 이제 하느님에 의해
‘주님’과 ‘메시아’로 임명되신 것입니다.
코로나19와의 전쟁 중에
대한민국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새로 대표가 된 이들은 모두
행복과 복지를 약속했고 고통과 불평등,
불의로부터의 해방을 정직과
충성으로 이룩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늘 반복되어 온
역사의 법칙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정치적 전망은 철저한
희생정신과 항구한 헌신,
국민에 대한 지독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렇지 못할 때는 혐오와 폭력,
비명이 난무하는 최악의 국회로
또 다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목소리만으로도 민중을 안심시키고
따를 수 있게 하는 완벽한 신뢰 관계이며,
이 관계는 어쩌면 어둠 속에서도 온전히
그의 소리를 믿고 따르는 절대적 결속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관계라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오히려 더 강한 빛을 선명하게 볼 수 있고
강인한 신념과 사랑이 소통되는
기적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기적을 ‘혁명’이라 부르고
우리는 이를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원주 관설동성당 성모상
[한주간 전례]
2020년 5월 4(월) [백]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0,11-18
“나는 착한 목자다.”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착함’을 묵상해 봅니다.
착함은 다른 이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고,
착함은 서로를 아는 것입니다.
목숨을 내어놓는 일과 서로를 아는 일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가 됩니다.
대개 ‘안다는 것’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정보의 수집이나
지식의 축적으로 이해합니다.
“나는 그 사람 알아.”라고 말할 때,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은 아닐까 되물어 봅니다.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앎’은
그 대상에 대한 전적인 의탁이고,
우리는 그러한 의탁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예수님 안에 모두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의탁할 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생명을 얻어 누립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보다는
제 일신의 평온함을 위한
거짓 믿음이 널리 퍼져 있는 오늘날,
나는 무엇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자주 반문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죄를 짓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
다시 한번 제대로 살아 보자시는 하느님,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을
함께 믿고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 …….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착한 삶’입니다.
저 혼자 올바르고, 저 혼자 똑똑한 삶은
모든 이를 당신의 우리 안에
불러오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뜻과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착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명령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5일 (화)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0,22-30
상대에 대한
답답함은 실은 자신의
불안감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상대가 말해 주지 않아 답답하고,
‘자신이 당연하다는 것’을
상대가 부당하다 하니까 답답합니다.
이 모두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편안한 일상이 깨질까 봐 답답해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비판하며 다가선
유다인들도 답답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숱하게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유다인들이
듣고 싶던 이야기는 아니었지요.
그들에게 메시아는 나자렛 출신 예수가 아니라
왕권의 위엄을 가진 힘 있는
사람이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다인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메시아는 ‘하나 됨’의 메시아입니다.
양들과 하나 되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 전부를
이 세상에 내어 맡기셨습니다.
본디 유다 사회는 ‘메시아’를 흩어지고
갈라진 세상을 조화와 평화의 세상으로
바꾸는 분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창조 때부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고
그리하여 마지막 때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에 함께 모여 잔치를 즐
기는 것이 기다리는 메시아 시대였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는 우리의 익숙한
삶에 맞는 메시아가 아니라,
낯선 이와도 함께할 수 있는
여유와 배려의 삶 안에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릴 줄 알아야겠습니다.
답답해하기보다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유연함을 지닐 수 있어야 메시아께서
자유로이 우리 곁에 오실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6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2,44-50
한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도 떠올릴 수 있는 것,
그것은 어찌 보면 보고 있는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시선의 폭이
더 넓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자신이 바라보는 것들 안에서
다른 것을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의 품을 넓혀 가는 사람입니다.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기에 앞서,
세상을 밝히셨고
그로써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요한 복음 안에 나타난 예수님의 역할은
파견되신 분으로서 파견하신 분,
곧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눈을 밝혀 주시고
시야를 넓혀 주시는 데
당신의 삶을 온통 내어놓으셨던 것이지요.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면서
모든 것을 보았다고 여기며,
다른 면을 본 이들을 향하여
서로 삿대질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세상에서,
과연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실 수 있으실까요?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아파하고 보듬고 고민하지 않으면서,
그저 내일, 저 세상의 장밋빛 인생만을 꿈꾼다면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님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다른 이의 이야기와
논리에 공감하기는커녕 거친 언사를 내뱉고
얕은 자기 신념을 고집하는 완고함의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그 누구라도 구원으로 초대받았다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는 일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7일 (목) [백] 부활 제4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3,16-20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유다 사회는 예수님을 주인은커녕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유다 사회가 메시아를 믿지 않은 것도 아니고,
메시아에 대하여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문제는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자렛 촌놈 예수는 아니다.’라는 완고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당신의 운명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그 운명이라는 것이 어이없게도
제자의 배신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자
길을 나선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팔아넘긴다는 기막힌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구원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대개 우리는
이원론적 신앙관에 익숙합니다.
선한 것은 악한 것과 결코
섞일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제 눈에 싫은 것을 악하다며 어깃장을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눈에 악하고
더럽고 모자란 것을 통하여
오늘도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어설픈 정의감과 설익은 지식으로,
약하고 부족하며 때로는 죄스럽고
비참한 사람들의 주님을,
그리고 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함부로 단죄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 단죄가 오늘 또다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바로 그 제자의 민낯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8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4,1-6
‘산란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 말은 불안이나 공포가 아니라
스트레스와 고통 때문에
생겨나는 부정적 감정을 가리킵니다.
요한 복음의 첫 번째 부분,
곧 전통적으로 ‘표징의 책’이라 불리는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가지의 표징적 사건을 통하여
‘믿음’의 가치를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믿음’은 개방이고 초월이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도무지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열도록 해방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믿는 것과 아버지의 집에
거처할 곳이 많다는 사실을 연계하여 가르치십니다.
특정 부류의 사람만이,
특정 행위를 하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남아 계실 것입니다.
누구나가 걸을 수 있는 길이시고,
누구나가 자유로이 함께할 수 있는 진리이시며,
그 누구도 살아 있음의 고귀함으로 초대받았다는
생명 자체로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산란하신 것은
자기 마음의 평온만을 위하여
다른 이의 말과 논리에 무감각한
불신의 사람들 때문입니다.
혼자 듣고 싶은 말씀을
들으려 성당에 가는 사람들,
혼자 만들어 온 세계관이나 신앙관에 매몰되어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이들을
불신자라 함부로 평가하는 사람들,
나아가 자신의 신앙적 색깔을
다른 이의 신앙심 위에 분칠하는 사람들 …….
그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으시며 산란해하십니다.
그들이 또한 저 자신이라는 사실로,
오늘 저 또한 산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알려 주소서.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9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4,7-14
예수님을 바로 곁에 두고도
하느님을 모르는 일이 가능할까요? 오
늘 복음의 필립보는 예수님을 두고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께서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오늘 복음의 필립보를 통하여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
일이나 취미 때문에 또는
우연히 알게 된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수많은 지인들,
그들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요한 복음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는 ‘육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대상화된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이 부족하고 못난 인간의 한계가
곧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자리라는 놀라운 발견입니다.
날마다 자신의 부족을 탓하면서
내일만을 향하여 있는 우리의 시선은
그리 복음적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 부족하다는 우리의 모습 안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우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더 나은 내일의 자신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이런 모습은 자기 부정이자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부정일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을 우상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자신이 꿈꾸는
내일에 우상 하나를 세워 놓고
그것이 하느님이라 고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생각나는 사람,
지금 기도를 해 주고 싶은 사람,
지금 마음이 불편한 사람,
그 속에서 당신을 제대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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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시작입니다.
성모성월인 5월에 날씨는 더욱 따뜻해지고
특히 장미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입니다.
성모님 전구로
현재의 코로나 사태가 하루 빨리 진정되어
자유로운 성당활동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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