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5월 17일 (일)
[백] 부활 제6주일 제1독서(사도 8,5-8.14-17)
제2독서(1베드 3,15-18)
복음(요한 14,15-21)
하느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출 때
예수 승천 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다른 보호자, 성령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전제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 실행할 힘 주시는 ‘진리의 영’
제자들 안에 머무르는 성령의 힘으로 복음 선포 사명 완성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긴 동굴을 지나 밖에 나오니
세상은 온통 푸르름, 꽃이 만발합니다.
꽃, 꽃, 꽃! 오랫동안 실내에 두었던
텃밭 상자의 상추와 치커리,
로즈마리도 햇볕을 쬐고 나니
놀랍게 푸르고 단단해졌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햇빛과 바람을
받아들이기만 했는데도 식물이
광합성 작용으로 변화됐습니다.
이 모습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출 때 일어나는
우리 영혼의 광합성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합니다.
아멘!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사랑과
가르침을 나누는 장소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산란해진
제자들의 마음(부활 제5주일)을 위로하고
예수님이 떠나셔도 그들이 그분 일을
계속 하도록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어질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을 준비하는데,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성령 약속에 대한
다섯 개 담화 중 첫 번째입니다.
■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이제 떠나시는 예수님은
아버지께 청하시어 ‘다른 보호자’를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그들의 동반자가 되게 하십니다.
(요한 14,16)
‘청하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간청이 아니라
간절한 갈망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아버지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은
꾸준한 기도, 중요한 고비에서 그분 자신을
아버지께 온전히 내어맡기며 일치를 이루는 기도입니다.
아들의 순종을 보시고 항상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아버지는
이제 예수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요한 14,26)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것입니다.
(요한 15,26;16,7)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20,22)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주도권으로
성령께서 세상에 오시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는데
맞갖는 자세를 갖출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삶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전제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가 선해집니다.”
-(마틴 슐레스케, 「가문비 나무의 노래」)-
■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호자’는 그리스어로
파라클레토스(Paràkletos)입니다.
요한 복음서에만 나오는데
(요한 14,16.26;15,26;16,7;1요한 2,1)
‘가까이 불린’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문학에서 원래 법정 용어로 사용했고
피고인 옆에 앉아서 그를 변호하는 변호자를 가리킵니다.
이 말에는 ‘위로자’라는 실존적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힘든 순간에 어려움을 겪을 때,
근본적인 고독을 느끼며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낄 때
옆에서 우리의 나약함을 함께 짊어지는 ‘위로자,
협조자, 돕는 이, 보호자’를 뜻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적대시하는 세상에
어떤 변호자도, 위로자도 없이 고아처럼 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은 ‘성령’을
다른 복음서와 달리 사용하는데
성령에 관한 여러 표현은 성령이
누구신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성령의 활동이
예수님의 직무에만 해당됐다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 승천 후
제자들의 활동까지 확장됩니다.
요한의 성령 개념은 유다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주님과 백성 사이에서
‘변호자, 중재자, 위로자’ 역할을 한 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요한은 유다 전통에서 이것을 가져와
자신의 복음서에서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청하시는
이 보호자는 ‘다른 보호자’입니다.
첫째 보호자는 이제 떠나시는 예수님이시고
‘다른 보호자’, 곧 성령은 그분 청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반자입니다.
■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도 부르십니다.
이 영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은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예수님 안에 있는 제자들 곁에 머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머무시는 분은
몇 시간 후에 ‘우리 안에’ 계실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전달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영이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의지, 영감, 실행할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고 양들을 모으는
예수님 직무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여전히 예수님의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 계명을 지킬 때에만
그들의 소명을 완성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 안에 머무시는 성령의 힘으로
세상 끝까지 그리고 종말까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확장시킬 것입니다.
성령의 약속에 대한 예수님 말씀이
교회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돼 가는 것을
제1독서와 제2독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계획대로 복음은 예루살렘을 거쳐
사마리아에까지 전파되고 사도들은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풉니다.(1독서)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서도
성령이 불어넣는 희망과 인내와 용기와 온유함으로
그리스도를 용기 있게 증언합니다.(제2독서)
하느님 아버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 내면 안에 함께 사십니다. 감사합니다.
성삼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을 헛되게 살 수 있습니까?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서울 청담동성당마당
[한주간 전례]
2020년 5월 18(월) [백]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5,26─16,4ㄱ
복음을 읽을 때
간혹 실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내 편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편으로 갈라서 내 편,
네 편을 갈라서 사고하는 습관입니다.
90년 무렵 회당에서
그리스도인을 쫓아낸 유다 사회는
하느님을 저버리고
메시아를 포기해서 한 행동이 아닙니다.
유다 사회는 그 누구보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었고 따랐으며 찬양하였습니다.
유다 사회가 믿었던 하느님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년)를 거치며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이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유다 사회는 유독 자신들만의
하느님으로 포장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모든 이의 하느님께서 우리만의 문화와
관점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하느님을 따르고 찬미드릴 수 없다는 것을
강변한 것이 유다 사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다 회당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유다 사회가 굳건히 간직한 하느님에 대한
유다인들만의 인식의 틀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민족주의의 폐쇄성이
창조주 하느님의 개방성을 가로막아 버렸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반대편이라는 폐쇄성이
세상의 다양한 관점과 개방성 속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오늘은 5·18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국립 5·18 민주 묘지에는
저와 같은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하여 저의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타인의 아픔과 불편함, 타인의 고통과 슬픔이
곧 자신의 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모두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모든 사람과 피조물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증언하는 신앙인이니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19일 (화) [백]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6,5-11
죄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죄를 업보마냥 껴안고 삽니다.
죄는 사라질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분신으로 평생토록 함께할 것입니다.
죄를 이겨 내고 오롯이 선한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죄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 예수님께서는 오셨고
죄인들을 부르러 십자가를 지셨으며,
죄인과 함께 돌아가시면서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올라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정의를 이루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상일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고단한 지상의 삶을 견뎌 내셨습니다.
죄는 그런 예수님을 통하여 서로의 나약함을
어루만질 수 있는 자리로 다시 이해되어야 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서로 심판하고 대적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죄를 없애는 것이며 서로의 장벽과
단절을 뛰어넘는 것이 의로움을 이루는 일입니다.
세상은 각자의 판단을 내세워
다투고 대립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함께 껴안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20일 (수)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6,12-15
진리 안에 머무는 것은
타인에 대하여,
나아가 하느님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각자의 생각을 고쳐 하나의
사실과 정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고 다듬는 것이
진리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진리는 다름의 자리에서 서로를 향한
열린 눈과 귀를 간직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진리의 영께서 일깨워 주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믿음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길잡이시며 버팀목이셨습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신앙의 정답을 제시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아버지 하느님께 들으신 것을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여러 가르침은 획일화되고
화석이 되어 무조건 그대로
수행해야 하는 정언 명령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로 채색된 화려한 그림과 같습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리의 영께서 이어받으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들은 이야기를 진리의 영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과 같이,
신앙인들은 서로의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교환한 자리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누리는
개방적이고 초월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다듬고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와 우리 각자의 생각을 나누기 위하여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은 저 혼자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친교를 되새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21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6,16-20
“조금 있으면 …….”
이라고 표현된 시간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지상 삶이
끝나 간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군가 함께 있다 떠나가면
허한 마음에 울먹일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도 떠나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슬퍼할 수 밖에 없겠지요.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에는 기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세상은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빛을 어둠이라 여겼고,
없애야 할 악으로 여긴 것이 세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고
당신을 내어 주실 만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과
늘 함께 살아간다고 믿는
우리 신앙인들이 누릴 기쁨은,
세상의 대립과 반감을 끝까지 사랑하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반목과 대립의 자리에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고,
슬픔과 좌절의 자리를 위로와
자비로 채우는 것이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세상이 악하여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세상이 너무 나약하였기 때문입니다.
경쟁과 다툼에 담대히 나서 사랑을 선포할 힘이 없어서,
폭력과 차별에 용맹히 맞설 결기가 없어서입니다.
나약함이 악이 될 수 있음을 알고,
그 나약함을 이겨 내어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22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6,20-23ㄱ
해산의 고통은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시간을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완성의 시간이라고 고백하는,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완전한 시간이고
종말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이들입니다.
고통의 시간이
기쁨의 시간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와 나누는 ‘화해’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저마다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각자가 계획하고 결심하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세상은 어리석게도
자꾸만 내 자신이
‘나’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지금보다 나은 나’, ‘지금보다 멋진 삶’,
‘지금보다 성공한 내일’을 꿈꾸게 하는
거짓 가르침을 세상은 좋아합니다.
서점가에 쌓여 있는 자기 계발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부추기고
사람들이 그런 책을 읽을수록
‘지금의 나’는 부정되고 제거되어 버립니다.
지금, 이 자리가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현재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부족하면 서로 돕고, 어설프면 서로 챙겨 주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갈수록 종교가 힐링 센터로 변질되어 가는 오늘날,
성당이나 교회가 경쟁에 지친 개인을
위로하는 공간으로만 머물고,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결심과 격려의 자리로만 굳어진다면,
‘지금의 나’는 도대체 어디서 예수님을 만나고 기쁨을 누릴까요?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의 시간’,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후회할 어제도, 살아갈 내일도 아닌
지금 이 시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과 존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생각하고 나 자신을 보듬는 일,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23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6,23ㄴ-28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것을 청하고 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름’은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표징이었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상대를 나의 삶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삶을 나눌 친구이자 가족으로 여기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청하는 것도
그분의 존재에 나의 존재를 살며시 포개어 놓고
서로를 생각하고 나누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먼저 예수님의 삶을 좇고,
그 삶이 지향하는 가치를 되새기며,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어 말씀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이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가 예수님을 통하여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교는 이 세상에 구원의 소식이
널리 퍼져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뜻이 곧 우리 신앙인의 뜻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까요?
내 마음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 안에 함께할 내 마음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시듯,
우리의 삶이 오롯이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는 우리만의 청이 아니라 이 세상과
그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실천하는 것으로 우리의 청을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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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성월인 5월!
코로나19로 인하여
성당에서 묵주기도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둘씩 모여
묵주기도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성모님께 전달되어
하루 빨리 이 어려운 상황이
잘 정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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