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3월 8일 (일) [자] 사순 제2주일.
제1독서(창세 12,1-4ㄱ)
제2독서(2티모 1,8ㄴ-10)
복음(마태 17,1-9)
배타적 투쟁이 아니라 공존의 소중함으로 본래 지닌 신적 초월성 드러내며 높은 산에서 모습 변하신 예수
“두려워하지 마라” 건네신 말씀 불안하고 혼란한 오늘날 되새겨야
오래전 유학시절의 일입니다.
버스 안에서 어느 모녀의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젊고 아름다운 엄마는 어린 딸에게
세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한 곳인지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길거리 가다가 절대로 방심하면 안 돼,
저런 집시들도 많고 무서운 아저씨들도 있고… 알겠지?”
엄마의 사랑이 깊은 만큼
가정교육도 철저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름다운 모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나라면 정말 어떻게 가르쳤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혐오와 경계만을 아이들에게 주입할 때,
우리 주변을 하느님이 주신 축복의 장소로
유지하고 지켜야 할 인간의 과제는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과 구별되는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고,
이는 그 체험을 간직하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기 위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학습된 의심과 경계, 증오는 오히려
세상과 인간을 격리시키고 인간과 인간을
분열시키는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불길하게 여기는 부정적 시각보다
더 훌륭한 의식은 세상을 좀 더 축복과
은총의 자리로 인식하고
인간으로서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복음은
영광스런 변모(마태 17,1-9) 본문을,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예고(16,21-28) 다음에 배치합니다.
수난과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혼란스러워 하던 제자들에게,
이제 모세(구약의 율법)와 엘리야(예언자들)의 시대를 아우르는
‘완성의 때’가 오고 있음을 이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알려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의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 두 개가 있는데 ‘오르다’와 ‘내려오다’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 오르셨다”(1절)로 시작하고
“그들이 … 내려올 때에…”(9절)로 마무리됩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만나기 위해 그분의 현존이 있는 곳으로
오를 필요가 있고 그 만남이 이루어진 후에는 낮은 곳으로,
불의와 가난, 지침과 병듦이 있는 바로
그 현장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 아름다움에 대한 계시
사건은 “높은 산”(1절)에서 발생합니다.
고대로부터 산은 하느님의 현존이 있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는데…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2절)고 합니다.
‘변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
메타모르포오마이’이며 이는 모양,
형태, 양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 transfigure 혹은 transform으로 번역)
사실 이 사건을 예수님의
‘거룩한 변화’로 옮기는
번역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거룩한 분이시기에
거룩하게 변화되었다는 표현은
사실상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공관복음의 병행구절을 봐도
‘거룩하게 변하다’는 표현은 찾을 수 없고
‘영광스럽게 변하다’라는 표현만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예수님의 ‘변화’보다,
그분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계셨던
눈부신 신적 초월성에 대한 ‘계시’의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한번 상상해 봐도 좋을듯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높은 산에 올라,
평소와 전혀 다른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영광스러움과
그로 인한 충만한 거룩함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감수해야했던
어려움들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군중들과 함께 지내면서 늘 피곤에 시달려야 했고
정치적 기득권자들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위협과 긴장 속에 있어야 했던 그들에게
그 순간은 이례적인 아름다움이었을 겁니다.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4절)라고 하며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4절 ㄴ)라고
구체적 계획까지 세우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입니다.
시각적 요소와 함께 청각적 요소도 등장하는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5절)이라는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들려왔던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청각적 요소들은 이미 시각적인 요소들을 통하여 계시된
예수님의 신적 초월성을 분명히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가올 십자가 사건으로 절망에 빠질 수 있는 제자들에게
그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임을 미리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 보여줄 땅으로 떠나라
아브람(아브라함)도 유사한 여정을 걷게 됩니다.
고향에서 친족과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하느님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고 하십니다.
자족과 안위에서 ‘일어나 떠나고’
하느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가야’ 하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에 아브라함은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게 반응합니다.
준비의 시간이나 이유를 묻지 않고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4절) 떠나는데,
이로써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2절)고 하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됩니다.
나오고, 떠나서,
가야할 곳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곳,
바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안락하고 행복하다고 느꼈던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보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불안이 불행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과잉된 보도로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고
그 때문에 누군가 불행해지는 일이 없도록
묵묵히 자기 주변을 돌보며
차분한 자세로 일상에 임할 때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수고가 필요하고,
따라서 현재의 위기는 더 진실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축복과 은총일 수 있습니다.
함께 이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공존과
상생이라는 참된 인간성과
존엄을 회복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툼과 상처, 무례한 검열과 무차별한 의심을 넘어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서울중곡동소재 천주교중앙협의회 성당
[한주간 전례]
2020년 3월 9일(월) [자]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6,36-38
2016년 자비의 희년의 주제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또한 자비를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장에서도
“자비로이 부르시니”라는 말씀을 찾을 수 있습니다.
흔히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정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가장 큰 특징은 ‘자비’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행동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자비로운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비에서 비롯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미 그분의 자비를 듣고,
보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자비를 이미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되와 그릇을 만듭니다.
또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과 소통합니다.
그것으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고 자비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지라는,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을 닮아 가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하느님께서도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는 대신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는 것보다
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 가야 하겠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10일 (화) [자]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3,1-12
“모세의 자리”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마치 모세처럼 율법의 의미를 해설하고
조상들의 관습을 지키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올바로 살아가도록 길을 제시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은 따르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들의 말은 옳지만
그들의 행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의로운 길을 제시하지만
스스로 그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말과 행실.
오직 예수님 시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있는 것과 말하는 것을
모두 실천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그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더 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말만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좋든지 싫든지,
지도자들과 길을 제시하는 이들에게 맡겨진 책무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와 함께 강조하는 것은
그것에 합당한 실천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표현은
예수님 당신에 대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통하여 우리를 섬기셨던,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11일 (수)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0,17-28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하여 세 번째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하신 마지막 예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였습니다.
제베대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머니와 함께 높은 자리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 일로 제자들 사이에는 불만이 생깁니다.
이 이야기는
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생각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과는 다른 결과를,
자신들의 스승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이지만
제자들은 세상의 영광과 구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자신을 온전히 버림으로써 얻는 영광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군림하고 힘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임금처럼 생각하고 서로 높은 자리를 얻으려고 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섬기는 것보다 섬김을 받는 것에 익숙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속적으로 쉽게 받아들이며
세상의 시각으로 이해하고는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질문하십니다.
신앙인으로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답해야 합니다.
섬기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그 질문에 답해야 할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12일 (목)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6,19-31
오늘 복음에서는
두 인물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부유하고 호화롭게 살았던 “어떤 부자”와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았던 “라자로”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고 죽음 이후의 모습도 대조적입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평안을 누리지만
부자는 불 속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죽음 이후의 세상이
현세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현세에서 고통을 받던 사람은 위로를 받고,
편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였던 사람은 고통을 받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 있는 비유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는 재화의 문제입니다.
루카 복음은 부와 가난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잔치를 벌이며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와
그 집에서 구걸하지만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라자로의 대조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가난의 문제에 대한 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또한 재화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숙고하게 합니다.
둘째는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는 내용은
이미 구약 성경에도 나와 있었습니다.
예언자들도 하느님의 길로,
정의의 길로 돌아오도록 호소합니다.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가르침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공동체 안에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재화는
공동체와 공동선을 위한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13일 (금)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1,33-43.45-4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신약 성경의 독특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부터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이 비유에서 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주인이 애써 일군 포도밭은 하느님 백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모으시고
그들을 잘 이끌도록 종교 지도자들을 세우십니다.
여기서 종교 지도자들은 소작인으로 비유됩니다.
포도 철이 되자 주인은
소출을 받아오도록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냅니다.
소출은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며 맺는 열매일 것입니다.
종들은 하느님께서 백성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파견한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종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거부당하였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포도밭 주인은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죽이고
포도밭을 차지하고자 합니다.
주인이 보낸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비록 지도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고
결국 당신의 아드님마저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자비는 지금까지도 이어집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14일 (토) [자]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5,1-3.11ㄴ-32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주요 인물은 아버지와 두 아들
곧 큰아들과 작은아들입니다.
이 비유는 아버지의 자비를 강조합니다.
아버지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집을 떠난 작은아들을 기다리며,
또 큰아들의 불평을 들어 주고 그를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드러내고
하느님의 특징적인 모습을 요약해서 전하기에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습니다.
이 비유를 읽으며
작은아들의 모습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 봅니다.
죄를 짓고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방종한 생활을 한 작은아들이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발길을 돌리는 모습은,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회개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돌아오는 이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큰아들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다른 모습입니다.
착실하게 아버지의 명을 따라 살았던
큰아들은 작은아들의 귀환을,
회개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큰아들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공동체를 지키며 열심히 활동하지만
언제나 그 자체가 기쁨이 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무거운 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회개한 이를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큰아들에게는 불평과 불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는 아버지가 ‘늘 함께 있다.’라고
한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두 아들 가운데 어느 모습에 더 가깝습니까?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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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주일미사 ,
매일미사가 없는 요즘입니다.
무엇인가 모르게 허전한 마음이 듭니다.
경북, 대구 지역의
모든 분이 아주 힘든 시기를 격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도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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