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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배타적 투쟁이 아니라 공존의 소중함으로

Berardus 2020. 3. 5. 05:08

    [말씀 묵상] 배타적 투쟁이 아니라 공존의 소중함으로

    사순 제2주일 제1독서(창세 12,1-4ㄱ) 제2독서(2티모 1,8ㄴ-10) 복음(마태 17,1-9)

    악 몰아내는 방법은 모욕에 아예 응답하지 않는 것

    본래 지닌 신적 초월성 드러내며 높은 산에서 모습 변하신 예수 “두려워하지 마라” 건네신 말씀 불안하고 혼란한 오늘날 되새겨야




      오늘 복음은 세상과 구별되는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고, 이는 그 체험을 간직하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기 위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학습된 의심과 경계, 증오는 오히려 세상과 인간을 격리시키고 인간과 인간을 분열시키는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불길하게 여기는 부정적 시각보다 더 훌륭한 의식은 세상을 좀 더 축복과 은총의 자리로 인식하고 인간으로서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복음은 영광스런 변모(마태 17,1-9) 본문을,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예고(16,21-28) 다음에 배치합니다. 수난과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혼란스러워 하던 제자들에게, 이제 모세(구약의 율법)와 엘리야(예언자들)의 시대를 아우르는 ‘완성의 때’가 오고 있음을 이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알려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의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 두 개가 있는데 ‘오르다’와 ‘내려오다’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 오르셨다”(1절)로 시작하고 “그들이 … 내려올 때에…”(9절)로 마무리됩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만나기 위해 그분의 현존이 있는 곳으로 오를 필요가 있고 그 만남이 이루어진 후에는 낮은 곳으로, 불의와 가난, 지침과 병듦이 있는 바로 그 현장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루벤스의 ‘그리스도의 변모’. 아름다움에 대한 계시 사건은 “높은 산”(1절)에서 발생합니다. 고대로부터 산은 하느님의 현존이 있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는데…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2절)고 합니다. ‘변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메타모르포오마이’이며 이는 모양, 형태, 양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 transfigure 혹은 transform으로 번역) 사실 이 사건을 예수님의 ‘거룩한 변화’로 옮기는 번역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거룩한 분이시기에 거룩하게 변화되었다는 표현은 사실상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공관복음의 병행구절을 봐도 ‘거룩하게 변하다’는 표현은 찾을 수 없고 ‘영광스럽게 변하다’라는 표현만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예수님의 ‘변화’보다, 그분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계셨던 눈부신 신적 초월성에 대한 ‘계시’의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한번 상상해 봐도 좋을듯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높은 산에 올라, 평소와 전혀 다른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영광스러움과 그로 인한 충만한 거룩함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감수해야했던 어려움들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군중들과 함께 지내면서 늘 피곤에 시달려야 했고 정치적 기득권자들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위협과 긴장 속에 있어야 했던 그들에게 그 순간은 이례적인 아름다움이었을 겁니다.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4절)라고 하며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4절 ㄴ)라고 구체적 계획까지 세우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입니다. 시각적 요소와 함께 청각적 요소도 등장하는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5절)이라는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들려왔던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청각적 요소들은 이미 시각적인 요소들을 통하여 계시된 예수님의 신적 초월성을 분명히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가올 십자가 사건으로 절망에 빠질 수 있는 제자들에게 그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임을 미리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 보여줄 땅으로 떠나라 아브람(아브라함)도 유사한 여정을 걷게 됩니다. 고향에서 친족과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하느님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고 하십니다. 자족과 안위에서 ‘일어나 떠나고’ 하느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가야’ 하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에 아브라함은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게 반응합니다. 준비의 시간이나 이유를 묻지 않고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4절) 떠나는데, 이로써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2절)고 하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됩니다. 나오고, 떠나서, 가야할 곳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곳, 바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안락하고 행복하다고 느꼈던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보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불안이 불행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과잉된 보도로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고 그 때문에 누군가 불행해지는 일이 없도록 묵묵히 자기 주변을 돌보며 차분한 자세로 일상에 임할 때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수고가 필요하고, 따라서 현재의 위기는 더 진실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축복과 은총일 수 있습니다. 함께 이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공존과 상생이라는 참된 인간성과 존엄을 회복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툼과 상처, 무례한 검열과 무차별한 의심을 넘어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