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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3월 15일 (일) [자] 사순 제3주일

Berardus 2020. 3. 14. 06:39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3월 15일 (일) [자] 사순 제3주일.

    제1독서(탈출 17,3-7) 제2독서(로마 5,1-2.5-8) 복음(요한 4,5-42 또는 4,5-15.19ㄴ-26.39ㄱ.40-42)

    ‘참 좋은 생수’

    이방인에게 물을 청한 예수님을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샘이며 메시아로 알아본 사마리아인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 커질 때 주님께 의지하고 청원하게 돼



      물은 생명입니다. 사순 제3주일 복음에 나오는 야곱의 우물가에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가 생명의 양식이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깨달음을 줍니다. 배고픈 사람이 빵을 찾듯이 목마른 사람이 그 생수를 찾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광야 생활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탈출 16,35) 그들이 신 광야를 떠나 르피딤에 진을 쳤을 때 마실 물이 없어 사람과 가축이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어 큰 소동이 일어납니다. 백성들이 주님의 현존을 시험하고 시비해 생긴 지명인 ‘마싸’와 ‘므리바’에서 모세가 지팡이로 친 호렙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십니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말씀(제2독서)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가 누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밝힙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부어 주신 평화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 사랑으로 인내하고 주님께 신뢰를 둡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징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 코로나19 확산의 불안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은 시련 속에서 더욱 빛납니다. 사마리아의 고을 시카르(Sychar, Shechem)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는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남녀 성별 구분이 철저하고 사마리아를 이방지역으로 취급하는 문화의 시각에서 보면 이 사건은 낯선 만남입니다. 주님께서 공동우물에 조석도 아닌 정오 무렵,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청하시니까요. 여행에 지치신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목마름을 느끼시고, “마실 물을 좀 다오”하시며 대화의 문을 여십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인과 말은 물론 상종도 하지 않는 유다인임을 알아봅니다. 사마리아는 한때 북이스라엘 수도였지만 아시리아에 정복(기원전 722년)되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배되고 이민족이 이주(2열왕 17,24)해 살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하느님의 선물인 생수 곧, 성령을 주실 분임을 암시하십니다. 여인은 그 생수를 흐르는 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은 그 물이 우리의 심연에 솟는 샘이 되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의 강’ (요한 4,14; 7,38-39)임을 이르십니다. 성령님은 신자들 마음 안에 머물러 기도하고, 친교로 일치시키며, 진리 안에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평신도 사도직의 근원이 되는 생명의 물입니다.(교회 헌장 4)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그녀는 과거와 현재의 남자관계가 불거지자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고 화제를 예배로 돌립니다. 유다교의 상징인 예루살렘(시온산)성전에 대적하여 사마리아인들은 게르짐산에 성전을 세워 예배를 드렸습니다.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 이민족인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경배 드린 예수님은 구원의 길이십니다. 하느님은 영이시기에 신약의 진실한 예배는 특정 장소에 매이지 않고 “영과 진리 안에서” 드려야 함을 계시하십니다. 메시아께서 오심을 아는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하시며 당신의 정체성을 밝히십니다.(요한 4,21-26) 예수님은 문화적 장벽을 넘어 7단계 대화로 사마리아 여인이 그리스도를 알고 증언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녀는 물을 청하는 예수님이 유다인, 생수를 주실 분,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샘, 예언자, 진실한 예배를 드릴 분, 마침내 구원의 메시아심을 분명히 깨닫게 되자 물동이를 버리고 “와서 보십시오” (요한 4,29) 하며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이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주님께서는 이틀을 그곳에 머무르십니다. 더 많은 사람이 와서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믿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게 내 양식”(요한 4,34)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전 생애가 온전히 성부께 봉헌된 제물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생명을 바치셨고, 그 덕분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주님께서 목말라 하시며 우물가에서 기다리십니다. 십자가상에서 ‘목마르다’ 하신 주님이십니다. 구원의 길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가 성령을 목말라하기를 바라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목말라 할 때 그분께 의지하고 청원하게 됩니다. 우리의 목마름이 주님의 목마름과 만나 친교를 이룰 때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 풍작의 열매를 거둡니다.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 없이 시작된 올해의 사순시기는 특별합니다. 성전은 고요하고 깊은 침묵에 깃들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마음속에 모시고 ‘코로나19 극복을 청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 목마른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과 생수를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가난한 마음이 되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친교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오니 주님께서 이끌어주소서.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서울 수서동성당 성모동산 [한주간 전례] 2020년 3월 16일(월) [자]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4,24ㄴ-30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사건은 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두 예언자 이야기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엘리야 예언자 시대에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과 기근이 들자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보내십니다. 사렙타는 이방인의 지역입니다. 과부와 아들은 한 줌의 밀가루와 그것을 간신히 구울 수 있을 정도의 기름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에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대접하고, 그 이후에 그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1열왕 17장 참조). 엘리사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십니다. 용맹한 장수였지만 나병 환자였던 나아만은 사마리아 예언자의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임금에게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때에 엘리사 예언자가 나아만의 나병을 낫게 하자, 그는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이방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방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루카는 하느님의 구원이 유다인만을 향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 이전에 구약 시대에도 이미 하느님께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보내시어 이방인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되새겨 줍니다. 이것은 유다 민족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고 믿었던 당시의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17일 (화) [자]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8,21-35 사랑하는 것이 먼저일까요? 사랑받는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용서하는 것이 먼저일까요? 용서받는 것이 먼저일까요? 대부분 사랑받고 용서받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용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 만 탈렌트는 당시 기준으로 셈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금액인데, 여기에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에게는 모질게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자비를 입었지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종에 관한 이 비유는, 주인 곧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용서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전에 이미 용서받았다는 것을 먼저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천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가엾은 마음”에서 비롯합니다. 가엾은 마음은 자비를 말하는 다른 표현입니다. 어떤 대가나 조건 없이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용서의 실천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죄를 용서받은 체험은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원동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18일 (수) [자]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7-19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합당한 길일까?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기도는 어떻게 하고 또 무엇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수없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율법은 이런 질문들에 가장 효과적으로 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율법의 본질적 역할은 잊은 채 글자 그대로 이를 따르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은 점점 형식화되고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 주는 것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자신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율법의 의미를 되살렸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을 가늠해 보고 성찰할 수 있는 계명과 율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바른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이자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계명과 율법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19일 (목)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다윗 가문의 요셉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3,55; 1,19 참조). 그는 같은 나자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이다. [복음묵상] 마태오 1,16.18-21.24ㄱ 요셉 성인은 복음서에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이야기에 언급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탄생에, 구원자의 탄생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다윗의 후손을 일으켜 영원한 왕좌에 앉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예언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오늘 복음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으며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명확하게 전합니다. 이러한 사건에서 요셉은 눈에 띄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마리아의 잉태를 지켜 주며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의로운 요셉. 성경에서 의롭다는 표현은 하느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칭찬입니다. 그렇기에 이 표현은 요셉을 가장 잘 묘사합니다. 요셉 성인의 의로움은 구원 역사와 성가정의 바탕이 되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그 의로움은 믿음에서 옵니다. 바오로 사도도 율법과 구분되는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응답처럼 요셉의 의로움은 예수님 탄생의 사건이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행동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요셉 성인의 모습은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초대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20일 (금) [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28ㄱㄷ-34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호세아의 외침은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백성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당신께 돌아올 때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이 살게 하시며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강복하시는 모습은 백성들에게 화해하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게 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호소에 백성들은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 숭배를 일컫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향한 백성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가장 큰 계명 안에서도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장 큰 계명 또는 황금률로도 불리는 이 계명은 단순합니다. 모든 것을 다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 계명은 구약 성경의 요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고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무엇이든 다른 것이 놓인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을 신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더욱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계명처럼 들리지만 실상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의 실천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21일 (토) [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8,9-14 성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제사를 떠올립니다. 성전에서 바치는 예배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전은 제사만 드리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기록들이 성전을 기도하는 장소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감실에 모셔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기도하고 성체 조배를 하는 것처럼 유다인들도 성전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으로 생각하고 그곳을 찾아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유명한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기도를 바칩니다. 그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에 하느님 앞에서 “꼿꼿이 서서” 기도합니다. 감사 기도이지만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합니다. 그의 눈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향하고 그들의 죄를 향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자비를 청합니다. 그의 눈은 자신을,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의 대화입니다. 의롭게 되어 돌아간 사람은 세리입니다. 의로움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을 구원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이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스스로 쟁취하거나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 온세상이 뒤숭숭한 요즘입니다. 뉴스에서는 확진자 니 집단감염이니 하면서 온 정신을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쏟고 있습니다. 길에는 다니는 사람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욱 움추리게 만듭니다. 이 모든 상황이 한 순간에 안정화되기는 어렵겠지만, 이 또한 언제가는 수그러들 것으로 희망합니다. 그때까지 우리 모두 좀 더 서로를 위하여 개인위생에 힘쓰며 모두 힘내시고 잘 견디어 내시길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