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3월 1일 (일) [자] 사순 제1주일.
제1독서(창세 2,7-9.3,1-7)
제2독서(로마 5,12-19)
복음(마태 4,1-11)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죄의 유혹에 고뇌·번민하는 모습 보여
결국 세상의 것이 아닌 말씀으로 사탄 이기신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면 믿음 지켜낼 수 있다는 가르침
사순 시기, 주님 사랑 위해 내 뜻을 꺾는 결심해야
교회는 지난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의 의미를 잘 새기며 지내시는지요?
스스로 다짐하고 결단한 일을 성실히 실천함으로
진정 하느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님께서 지고 가신
‘사랑의 십자가’는 생각만 해도 슬픕니다.
하지만 도저히 가늠되지 않는 그 큰 사랑 덕분에
우리는 사랑이란 누군가의 희생과
대가로 맺어진 결실임을 배웁니다.
교회가 사순 시기를 통해서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랑이지요.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 젖어
주님처럼 사랑하고 희생할 것을
묵상하도록 돕고 그 사랑을 배우도록 권합니다.
사순의 가르침은 당신께 배운 사랑을
몸소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에덴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복된 매일을 살았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런데 허망하게 그 축복을 날려버렸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
죽음의 저주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의 처지를 바오로 사도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로마 7,15)라며 가슴 아프게 토로했는데요.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살기 원하는 우리도 같은 심정입니다.
모두가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을 살아서
주님께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고민도 하고 애를 쓰는 것 역시 사실이니까요.
때문일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유혹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알려주며 경고합니다.
유혹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허약함을
하와와 아담의 이야기로 들려주고
예수님께서 당하신 극심한 죄의 유혹의 장면을 숨기지 않습니다.
복음의 장면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도
죄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고뇌하고 깊이 번민하셨으리라는 걸
짐작하도록 이끌어주는데요.
완전한 인간이신 주님이셨기에
죄와 치열하게 싸우셔야 했으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시련을 딛고
이겨내는 용단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매력적이고 감미로운 유혹을 떨쳐내는 것은
예수님께도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강조하신 것이라 싶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다는 의미라 싶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일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라는 당부라 읽힙니다.
주님께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힘든 싸움을 치렀으며,
아버지 하느님처럼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어려운 역경을 수없이 겪었으며
스스로 이겨내야 했다는 아픈 고백이라 듣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의 것이 아닌 기록된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사탄의 유혹쯤이야 너끈히 이길 수 있다는
승리의 공식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사제는 많은 신자분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고’ 혹은 ‘싫어’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립니다.
사제의 입장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계명을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으로
오해한다는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이 모두가 순수하게 복음을 가르치지 못한 제 허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무엇을 보태고 더하며 덜어낸 결과인 듯 하여
주님께 죄송한 마음을 치우기 힘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지침은
매우 간단하고 명료하니 말입니다.
언제나 무슨 일에나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니 말입니다.
오직 ‘말씀대로’ 따르면 헷갈릴 것도 없고
돌아볼 것도 없이 말끔할 테니 말입니다.
결국 다사다난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모든 문제는 주님의 말씀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살아내지 못한 결과이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 것이 아니며
내 뜻대로 조정할 수도 없는 주님의 것입니다.
죄의 유혹보다 훨씬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는 주님 사랑에 감사드릴 때,
주님의 뜻을 위하여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위하여 내 뜻을 꺾을 때,
하늘의 용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사순,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주님의 눈치만 살피던 구차한 마음을 씻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한 다리를
죄에 걸치고 지내던
못난 모습에서 돌아서야겠습니다.
내가 물러서기보다 주님께서 양보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도 치워내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끊어내지 않고 머뭇대며
미루던 결단을 실행해야겠습니다.
흐릿하고 모호한 믿음의 경계를
깔끔하게 정리 정돈할 때,
기쁜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의 은혜는 외면했던
자신의 십자가를 다시 찾아,
기꺼이 짊어지는 마음에 임합니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 몰입하고,
조건 없이 순명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할 때 쏟아져 내립니다.
힘에 부쳐 나 몰라라 내던졌던 십자가를
다시 찾아 끌어안는 마음에 사순의 은혜를 담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곁에서 얼쩡대며 서성이지 않도록,
죄 앞에서 쩔쩔매는 일이 없도록,
미련 없이 돌아서는 지혜를 살아가도록
맹렬히 기도하니 힘내기 바랍니다.
죄의 유혹보다 훨씬 강한 주님 사랑이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니 도전하기 바랍니다.
당신의 뜻이기에 봉사하고 희생하며
먼저 다가가 화해하는 배포를 한껏 키우시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참된 믿음으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에제 11,19)을 되찾기 바랍니다.
사순을 보내며 부활의 기쁨은 오직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몸소 체험하기 바랍니다.
통 큰 하느님의 은혜로 모자란
우리 삶에 새로운 가능성이 활짝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장재봉 신부-
[한주간 전례]
2020년 3월 2일(월) [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5,31-46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
레위기의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기준이자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맞갖은 생활을 하고자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도, 서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제도들도 이것을 목표로 합니다.
수많은 율법과 규정들도
하느님의 거룩함에 맞게 살아가려는 방편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율법은 많은 경우에 부정적으로 표현됩니다.
‘하지 마라.’ ‘하면 안 된다.’
구약의 백성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그릇된 것을 피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조금 달랐습니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최후 심판에 대한 내용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기준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할 것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작은 이’를 일상 안에서 어렵지 않게 만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그나마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최후 심판의 이야기는 우리의 눈이
저 높은 하늘을 향하기 전에 낮은 곳으로,
이웃에게로, 한 명의 작은 이에게로,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향하게 합니다.
일상에서 마주한,
때로는 무심하게 지나친 그 하느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3일 (화) [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7-15
하느님께서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계신다면,
기도는 왜 할까요?
많은 이들이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기도가 오로지 무엇을
청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흔히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하는데,
좋은 대화가 일방적이지 않듯이
혼자만의 독백이나 일방적인 청원을
좋은 기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주님의 기도’가 완전한 기도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청원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짧지만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 부분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이고,
다른 부분은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과도 잘 어울립니다.
사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더 구체적으로 더 많은 말로
무엇인가를 청하는 것은
우리의 불안과 약함 때문일 것입니다.
부족함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절대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점점 더 당연한 것이 늘어나고 부족한 것은
많아지니 청할 것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것을, 거
의 모든 것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청원보다 감사를,
감사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그것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4일 (수) [자]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1,29-32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요나 예언자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요나는
하느님을 피하여 도망치지만
결국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 과정에서 요나는 큰 물고기의 배 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며 회개합니다. 그
리고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반응은
요나의 반응과 대조적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멸망한다는 요나의 외침에
모든 사람이 곧바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릴 재앙을 거두십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요나는 예수님을 예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겼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동안 갇혀 있던 시간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꽉 막혀 도무지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시며 요나 예언자를 상기시키십니다.
하느님을 피하여 도망쳤지만
결국 뉘우치고 돌아온 요나 예언자,
또 그의 선포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지체 없이 회개하고 구원을 청하였던 니네베 사람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징은 바로 회개입니다.
가던 길에서 하느님의 길로 돌아오고,
생각을 바꾸어 자신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위해서는
엄청난 기적이나
대단한 표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회개는 단죄나 하느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의 초대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5일 (목) [자]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7-12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위로가 됩니다.
또한 “누구든지”
그렇게 청할 수 있다는 것은 더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듯이
하느님께서도 청하는 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것을 청하고
유익한 것을 청하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청하더라도
그것이 나쁘고 악한 것이라면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에서 잘 알려진
기본적인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행하지 마라.”
이것은 당시 유명한 라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해석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은 청하는 이의 자세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실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
이웃에게 행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복음이 전하는
‘가장 큰 계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6일 (금) [자]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20ㄴ-26
복음서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로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여
율법을 따르고 지키던 이들이었습니다.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유다교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실천하며 살았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실상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도 힘겨워하며 살아갑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그들을 능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법은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법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준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법대로’ 살던 사람들이었고
그것이 그들 삶의 가장 큰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법대로’ 사는 것에 만족하고 떳떳해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생각하고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리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해쳐서는 안 될뿐더러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많은 이들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예물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웃과 화해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청하고,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갚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이 지닌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그 의미를 먼저 생각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로움에 이르는 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7일 (토) [자]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43-48
상선벌악(賞善罰惡).
선한 이는 상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다는 뜻으로
가톨릭의 네 가지 기본 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지니지 않은 이들에게도
당연한 내용이지만 성경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느님의 다른 모습도 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왜 모든 이를 똑같이 대하시냐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악인이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기다림은 악인에게
자비를 체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하지 않는 이들도 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닮으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따라 거룩해지고,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따라 완전해지고자 노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실천의 바탕이자 행동의 기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한편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겁고 힘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깊이 체험한 이들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 사랑과
자비를 손수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
사회 관계망이 무너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웃이 나에게
병원균을 옮긴다는 사실이 너무나 혼란스럽습니다.
코로나19로 고통 받는 분과
치료에 전념하시는 분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하여
조용히 기도를 바는 한 주가 되어 봅시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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