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2월 2일 (일) [백] 주님 봉헌 축일
제1독서(말라 3,1-4)
제2독서(히브 2,14-18)
복음(루카 2,22-40)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 우리 소명의 원천
자신을 바치지 못한 봉헌은 ‘감사’가 없기에
탐욕 채우기 위한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어
주님 향한 봉헌, 삶 중심에 예수님 모시는 것
감사로 바쳐진 봉헌만이 주님께 받아들여져
오늘 말라키의 예언에 마음이 솔깃합니다.
우리 모두가 애타게 그리며 “찾던 주님”께서 홀연히 오실 것이며
그분께서 손수 “레위 자손들을 깨끗하게” 만들어
마침내 주님 마음에 쏙 들게 해주실 것이라니,
진정 든든해집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더 잘 이루시도록
좁은 마음을 찢어 넓히리라 다짐하게 됩니다.
지난해 연말 부산교구에서는
네 분의 사제가 나셨습니다.
사제서품은 교구의 가장 큰 경사인 만큼
모든 교구민들이 기도드리며 기뻐했는데요.
우리 본당은 울산에 있는 만큼
부산 주교좌 남천성당에서 거행되는
서품식 참례를 위해서 새벽부터
집을 나서야 했음에도 많은 분들이 함께하셨더군요.
하지만 새 사제를 위한 교구의 잔치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새 신부님의 출신본당에서 바쳐지는
첫 미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열성 신자도 많고
각지에서 이어지는 새 신부님들의 미사도 인기폭발,
북새통을 이루니까요.
좋은 일입니다. 기쁘고 감사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아주 속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찌나 속이 거북했던지, 여태 기분이 씁쓸한데요.
오늘, 주님께 몽땅 봉헌하는 마음으로
그 얘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몸이 편찮으신 자매님은
성지에서의 새 사제미사를 꼽아 기다리셨답니다.
그런데 딱 네 분이신 신부님들이
그 많은 신자들에게
안수해주시는 모습이 너무 수고로워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새 사제 안수를 사양하는 마음으로
대신에 새 사제를 위한 묵주기도를
바치고 오셨다더군요. 행복했답니다.
저는 자매님의 배려 깊은 마음이야말로
사제를 위한 참된 봉헌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복된 이야기의 행복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마을버스에서의 일이랍니다.
기사님께서 소리를 치더랍니다.
“카드 찍고 타세요.” “카드 찍고 타세요.”
확실히 버스에 올라서는 사람보다
카드 찍히는 소리가 드물더라는 데요.
빡빡한 버스에 재빠르게 오르며
카드를 찍지 않는 할머니가
꽤 계시더란 얘기였죠. 기가 막혔습니다.
새 사제의 정성 어린 미사에 참례해서
과연 무엇을 얻으셨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사제의 강복을 받은 이유가
오직 남보다 더 복을 받겠다는 욕심이었다면
거짓 은총에 매달렸을 뿐이라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은 나보다 남을 섬기는 마음에
주어지는 하늘의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어느 신부님은
“인간이 자신의 것을
주님께 준다고 여기면 그것은 봉헌이 아니다.
주님을 소로 만드는 우상숭배일 뿐이다.”라며
그런 심보는 카인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자신을 잡아 바치지 못한 봉헌은
감사가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봉헌은
어떤 다른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소에게 ‘여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오직 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 겨워 봉헌할 때에만
아벨의 봉헌처럼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것이라 단언하셨습니다.
골백번 공감하여 제 마음에 쏙 담겼던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라 믿어져 전해 드립니다.
주님을 향한 봉헌은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에 기초합니다.
세상에서 치사하고 유치한 모습으로
주님을 욕되게 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남보다 더’ 복을 챙기겠다는 마음이 바로 욕심입니다.
아무리 좋은 축복도
먼저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심으로는 얻지 못합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라면
어떤 희생도 주님이 아닌 나를 위한 봉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참된 신앙이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약속이 꼭 이루어질 것을
의심치 않는 것임을 일러줍니다.
성령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렸던
노년의 시메온과 온 삶을 주님을 향한 흠숭과
기다림으로 채워 지냈던 과부 한나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약속에 근거하여
시메온처럼 “그 말씀에 따라 살았으므로 후회가 없다”는
마지막 고백을 바칠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스스로의 봉헌을 꼼꼼히 자세히 상세하고
세밀히 살피며 신앙점검을 하기 바랍니다.
시메온처럼 성령의 약속 가운데 굳건한 삶을 살아가는
참 봉헌의 사람인지를 철저히 따져보기 원합니다.
성모님처럼 고통 중에서도 감사하는 삶만이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 살아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진리는 구질구질하지 않습니다.
뚜렷하고 명료하며 분명하기에
진리의 삶은 먼저 나를 비우는 말끔함에서 비롯됩니다.
하찮은 것에 매이지 않는 넉넉한 자유로
우리는 탐욕과 집착을 털어내는
맑고 향기로운 신앙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이분, 저분, 한 분도 빼놓지 않고
새 사제 네 분의 안수를
몽땅 받으려 분주했던 사람이 아니라,
사제의 수고를 덜어주는 마음으로 안수를 피했던 마음을
훨씬 소중히 봉헌 받으셨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기껏 거룩한 미사에 참례한 후에
혼잡을 틈타 돈 천원을 아꼈던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그 성스럽고 복된 미사의 은총을 다 잃었을 테니,
어서 회개하실 것을 촉구합니다.
저는 지금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봉헌이
아벨처럼 주님께 기억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특별한 봉헌 축일에 치사하고 졸렬하며
비좁고 누추했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말끔히 씻어 봉헌하시길,
그리하여 예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아가는
진정한 봉헌자로 돋움하시길, 소원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1테살 5,23) 간절히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못난 우리가 모두,
당신처럼 거룩해지리라는 기대를 결코 접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
[한 주간 전례]
2020년 2월 3일(월) [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5,1-20
예수님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마주칩니다.
이 사람은 한마디로 죽음의 세력입니다.
이는 그가 무덤에서 살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본디 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이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람은 사람들의 삶을
자꾸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갔습니다.
그를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지만,
이마저도 부수어 버리고,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쳤습니다.
이렇게 게라사 지방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이 되었고,
하느님의 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족쇄와 쇠사슬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인 더러운 영에게 이르십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어서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던
돼지에게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제야 게라사 지방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을 향한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게라사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다고 하여도,
이 일 때문에 생계에 가장 필요한 돼지
이천 마리가량이 죽어 속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된 사실보다도
당장 먹고살 문제에 마음이 쓰일 뿐이었습니다.
생계와 생명은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는 낱말입니다.
생계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염려하고
걱정한다면 참생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
계와 생명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4일 (화) [녹]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5,21-43
오늘 복음은
우리가 어떻게 욕망의 잠,
질투의 잠, 시기의 잠, 분노의 잠,
쾌락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 줍니다.
첫째, 우리 자신의 문제를 주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가져가야 합니다.
회당장은 유다인 사회에서 명망 있는 사람임에도
나자렛 목수의 아들 앞에 가서 땅에 엎드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처지를 깨닫고 그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둘째,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소녀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가시던 중에 하혈 병을 앓는 여인을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고쳐 주시고
대화를 나누시는 동안 회당장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지금 당장 자기 딸이 죽어 가고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립니다.
두려움이 있어도, 초조함이 있어도 기다렸습니다.
셋째,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혈 병을 앓는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던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의 죽음을 전합니다.
그 순간 야이로는 시간을 지체하신
예수님이 얼마나 야속하였을까요?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딸의 죽음 앞에서 울려 퍼지는 곡소리를 듣고도,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가 비웃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께서 외치십니다.
“탈리타 쿰!” 이 말씀에 소녀는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가 일어날 때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우리의 문제를 가져가십시오.
인내하십시오. 그리고 절망과 원망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5일 (수) [홍]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가타 성녀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평생 동정으로 살았다.
아가타는 철저하게 동정을 지킨 나머지
그녀와 혼인하고 싶어 하던 지방 관리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데키우스 황제 박해 기간(249-251년)에 순교한
아가타 성녀에 대한 공경은 초대 교회 때부터 널리 전파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6,1-6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예수님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단순히
당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건이기에 그러합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셨지만
몇 가지 외에 다른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던 것은
손뼉이 마주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 가정환경,
친인척만 보고 선입견을 가졌고
예수님께 믿음의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우유 시음 실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연기자 몇 명이 우유를 마시고
그것이 마치 상한 것처럼 구토를 하자
다른 참가자들도 우유를 못 마시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한 명은 정말
식중독에 걸려 입원까지 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 우유는 매우 신선하였는데도 말입니다.
우유가 상하였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생기자,
사람들은 그 우유의 신선함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 우유 자체는 맛과 영양을 지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우유를 마시고 독만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사랑의 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손을 통하여 기적의 열매가 맺어질 수 있고,
그 열매는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입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 기적은 무용지물,
더 나아가 독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6일 (목) [홍]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바오로 미키 성인은 1564년 무렵
일본 오사카 인근의
도쿠시마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회 소속의 대학을 졸업한 뒤 수사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대단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오로 미키 수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박해 때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1597년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1862년 그를 비롯한 동료 순교자들이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6,7-13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단순한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사실 제자들을 파견하려면 적어도
그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마르 8,19-21 참조).
어디 그뿐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한다는 소리에
그러시면 안 된다고 반박하여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듣습니다.
(마르 8,33 참조).
또 그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하여 논쟁을 하는가 하면(마르 9,34 참조),
야고보와 요한은 출세할 생각으로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
(마르 10,37 참조).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파견하십니다.
단순하기로는 제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떠나라는 소리에 그냥 떠납니다.
더구나 지팡이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챙기지 말라시니 그냥 그렇게 합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겪게 될 불편함도,
위험도 많을 터인데 그들은 그냥 떠납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점은
하느님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깜냥보다
더 큰 것을 바라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못 합니다.’,
‘안 됩니다.’ 하고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제게 단순한 응답을 가르쳐 줍니다.
그 어떤 일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실천인 것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단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7일 (금) [녹] 연중 제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6,14-29
오늘 복음은 헤로데의 폭력으로
세례자 요한이 죽게 된 이야기입니다.
헤로데 임금이 동생의 아내
곧 제수인 헤로디아와 혼인하자,
세례자 요한이 이를 두고 여러 차례 잘
못된 행실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헤로데는 그 말에 불편해하면서도 세례자 요한이
군중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적절한 기회가 닿아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맙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항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을 하기 마련입니다.
헤로데에게도 그럴 만한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자꾸 비방하고 나서면 국가 분열이 일어나
안정된 정치를 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국가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참석한 생일잔치에서 약속을 어기기라도 하면,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어 국정을 운영하는 데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가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폭력을 당한 사람은
신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목이 잘릴 때
그가 외쳤던 비명도 하느님께서는
가슴 아프게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른 체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폭력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폭행을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셨고,
그 폭력의 악을 폭로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명시적으로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헤로데가 되는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8일 (토) [녹]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6,30-34
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의 소임을 맡으면서
개인적으로 중점을 두는 사항이 있습니다.
‘공동체성’입니다.
공동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인성적으로나
영성적으로나 더 나아가 사목 적으로도
훌륭한 사제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바로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이시며,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시키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공동체성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공동체성을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잘 보여 줍니다.
복음 선포의 일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몹시 피곤하였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이 절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곳으로 배를 타고 떠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로로 달려가
예수님과 제자들보다도 먼저 그곳에 다다르자
예수님께서는 쉬는 것을 포기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휴식할 시간을 달라고 군중들에게
양해를 먼저 구하실 수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동체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틀에 갇혀 있지 않고,
‘너’에게로 건너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배 속’,
‘내장’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가엾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에 자신의 속이 뒤틀릴 정도의 감정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커다란 고통보다도
가시에 찔린 자기 손톱에 신경이 가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나’에서 ‘너’에게로 건너갈 때
우리의 공동체성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아집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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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시작됩니다.
이번 주에는 입춘이 있지만
영하의 날씨를 예보하고 있습니다.
요즘 신종 바이러스 폐렴으로 염려하는 마음이 큽니다.
이럴 때 일수록 서로를 위하고
또 서로를 위하여 조심해야 갰습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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