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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묵상]020년 1월 26일 (일) [녹] 연중 제3주일

Berardus 2020. 1. 25. 06:47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월 26일 (일) [녹] 연중 제3주일

    제1독서(이사 8,23ㄷ-9,3) 제2독서(1코린 1,10-13.17) 복음(마태 4,12-23)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 우리 소명의 원천 예수님의 공생활 ‘첫 시작’ 요약하며 인품과 활동 소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 선포하신 예수님 죽음과 어둠에서 사람 살려내는 몫으로 제자들 부르심 돌봄이 필요한 양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으로 치유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 27,1) 인생에서 어둠을 비추는 빛, 따라서 걸어야 할 길을 발견했다면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 맞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에 하느님 아드님의 공생활 시작을 경청합니다.(마태 4,12-23) 예수님의 ‘시작’은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우리 소명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은 광야에서 몸소 악마의 유혹을 체험하십니다. “행동에 앞서 마음을 가다듬는 수렴의 시간, 필연적으로 임무수행을 준비하기 위한 내적 투쟁”(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 기간입니다.(마태 4,1-11) 이제 예수님은 요한이 넘겨지자 요한과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작고 멸시 받는 변방인 갈릴래아로 물러가시어 그 곳에서 당신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마태 4,12-13,58) 마태오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활 ‘첫 시작’을 요약하며 자신이 보는 예수님의 인품과 활동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세상의 역사를 바꾼 예수님 활동이 중요한 동사, ‘선포하시다, 부르시다, 가르치고 고쳐주시다’로 표현됩니다. ■ 예수님이 선포하시다 예수님 가르침의 막이 열린 곳은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였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서쪽 해안에 위치한 카파르나움은 상업 중심지이자 세관이 있던 도시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니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는 데는 적합한 장소입니다. 마태오는 갈릴래아에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 (마태 4,16)에게 떠오르는 빛으로 소개합니다. 제1독서는 오늘 복음과 연결되는데 이사야서의 ‘임마누엘의 책’(이사 7-11)에 속한 본문입니다. 마태오는 이사야 예언자가 기원전 733년 아시리아 황제 티글랏 필레세르 3세에 의해 정복된 이 땅의 해방에 대해 한 예언이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공생활로 성취됐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 설교의 기본적인 내용을 종합적으로 요약하는 말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입니다. “회개하여라”는 정신과 마음의 변화, 보는 눈과 듣는 귀, 삶 전체를 하느님께 되돌리라는 요구입니다. 회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첫 조건입니다. 마태오는 오늘 복음 바로 뒤에 이어지는 산상설교(마태 5-7장)에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이어 8-9장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는지 보여 줍니다. ■ 예수님이 부르시다 두 부르심 장면 (마태 4,18-20,21-22)은 같은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걸어가시다가, 눈여겨보시고 부르십니다. 눈은 마음이 가는 곳을 따라갑니다. 하느님 아들 예수님 시선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굽어보시는 하느님 아버지 시선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부유한 율법학자가 아니라 갈릴래아의 가난한 어부들을 유심히 바라보시고 그들을 첫 제자로 부르십니다. “따라오너라”라는 말은 원래 “뒤를 따라간다”는 말로 복음서의 전문적인 제자직 용어입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은 항상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 제자들에게 부르심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사명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사람을 낚는 것은 어둠과 죽음에서 사람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명을 위해서 예수님 공생활 동안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 가르침을 들으면서, 그분 마음에 기대면서 계속 그분에게서 수련을 받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사람을 낚기 위해 파견될 때 그들 편에서 부르심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파견된 사람은 예수님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항상 하느님 섭리에 의존해야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자기 선호에 따라 복음 선포자를 따라가며 분열된 코린토 공동체 신자들에게 자기 소명을 상기시킵니다. 자신이 “인간의 말 재주가 아니라 십자가의 힘으로”(1코린 1,10) 복음을 전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신자들이 그들 부르심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어버리면서 영적인 어둠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망각한 공동체는 하느님 집이 아니라 온갖 분열과 자기 자랑과 이기적인 야심과 파벌로 형성된 인간들의 모임이 돼 갑니다. ■ 예수님이 가르치고 고쳐주시다 이제 예수님은 부르신 제자들을 데리고 온 갈릴래아로 선교 여행을 다니며 어떻게 사람을 낚아야 하는지 직접 교육하십니다.(마태 4,23)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고쳐 주시면서 사람들을 낚으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자치유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 안내자와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마태 9,35). 예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불리시던 아버지 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흩어진 양들을 돌보도록 파견된 메시아-목자이십니다(에제 34,23). ■ 성경 읽기, 수행의 여정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랍니다.”(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오랜 세월 좌충우돌과 우여곡절과 어둔 밤을 거쳐 제가 배운 것이 있다면 성경 읽기는 사랑의 행위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충실함, 꾸준함, 경청, 응답이 사랑을 유지시키듯이 성경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사랑과 경배의 정신이 깊어진다면 그분 말씀을 더욱 쉽게 알아들을 것 같습니다. 결국, 성경읽기는 하느님 자녀로서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마음을 알아듣고 응답하기 위한 진지한 수행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정하상교육관 대성당 [한주간 전례] 2020년 1월 27일(월) [녹]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3,22-30 먼저 하나만 기억합시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창세 1장 참조).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변하는 것은, 실제로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다고 규정하고 판단하는 우리 인식의 편향성이 그것을 나쁜 것이라 매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완전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누구 눈에는 좋고 또 누구 눈에는 나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우리 시선의 왜곡이 참으로 나쁜 것입니다. 제 눈에 낯설고 불편하면 악마로 규정하는 일이 우리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신심 활동을 하는 신자들 사이에 편 가름의 잘못이 자주 목격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리 나쁘더라도 그를 형제애로 보듬어 줄 수 있는 근력을 키워야 합니다. 교정 사목을 하면서 사형수를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왜일까요?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간다움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닐까요? 비록 누군가가 아무리 나쁘더라도 늘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나시는 성령께서는 화합과 용서의 힘을 간직하도록 신앙인을 도우십니다. 서로 달라도 하나의 신앙을 지켜 나가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서로가 다른 것이 당연하듯, 서로가 하나로 일치하는 것이 성령의 세상에서는 당연합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악마입니다. 악마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서로를 품어 주어야겠습니다. 다름에 대한 적응, 이것이 참 좋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첫걸음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28일 (화) [백]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3,31-35 마르코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참가족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살아보겠다면서 많은 결심을 하고 실천할 것을 계획합니다. 물론 계획한 대로 실천하는 경우는 참 드물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결심하고 실천 계획 세우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도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겠다면서 절제와 극기, 봉사와 기도 생활을 무리하게 계획합니다. 실패로 돌아선 신앙생활의 결심들 앞에 늘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또 다른 신앙생활을 꿈꾸기도 하지요. 그러나 참된 신앙은 그저 예수님 발치에 머물고, 그분의 말씀이 무엇인지 몰라도 애써 이해하려 겸손되이 경청하는 것입니다. 제 계획에 눈멀고 귀먹어 바로 옆에 계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 동안 하느님을 잊고 살았던 사실을 반성하며, 다시 한번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길을 걷겠노라 다짐하였던 신명기계 역사서의 정신은, 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듣는 귀를 가지는 것이 변화와 회개의 시작입니다. 듣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결심하고 계획하는 일은, 알지도 못하는 길을 무작정 나서는 무지한 사람들의 반복된 죄악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29일 (수) [녹]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4,1-20 씨앗의 운명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면, 더욱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좋을 테지요. 서른 배보다는 예순 배, 예순 배보다는 백 배의 열매가 백번 나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씨앗을 우리 삶에 빗대어 보자면, 씨앗이 뿌려진 흙의 상태가 천차만별이라 열매를 얼마나 맺을지 가늠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일까요, 늘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오늘도 얼마간의 요행을 바라며 삶의 씨앗을 곳곳에 뿌려 보기도 합니다. 말씀을 씨앗에 빗대어 표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다양한 땅의 모습을 염두에 둔 흔적을 담아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 ……. 어찌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길과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져 버린 말씀의 씨앗은 온갖 역경에 내던져진 가엾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조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 씨앗에게는 크나큰 상처일 수 있겠지요. 교회의 역사 속에 열매 맺지 못한 말씀의 씨앗도 있었지만, 말씀은 끊이지 않고 우 리 신앙인의 삶 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식의 경쟁적 말씀 선포와 승리주의의 우월적 선교는 진정한 말씀의 선포가 아닐 것입니다. 말씀은 길과 돌밭, 가시덤불 속에서 뿌려졌고, 그런 말씀의 아픔들이 있었기에 어딘가에 열매를 맺는 말씀의 기쁨들이 생겨난 것이겠지요. 오늘의 아픔을 제거한 자리에 말씀이 열매 맺지 않습니다. 아픔 속에 아파하는 이들 덕택에 오늘의 신앙이 따사로운 햇살 속에 무럭무럭 자라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씨앗 옆에 숨 막혀 죽어 가는 씨앗들이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30일 (목)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4,21-25 다른 것을 비추는 등불처럼 신앙인들에게 이웃과 세상의 참된 모범으로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도덕적 잣대가 강조되고는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등불이 빛으로 주위를 비춘다는 사실에만 치우쳐, 그 등불 자체가 빛을 낸다는 고유한 성질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등불은 그 자체로 빛납니다. 빛은 빛을 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비추지요.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 때문도 아니고, 다른 이를 비추어야 한다는 희생 때문도 아닌, 그저 등불이 등불로서 제 역할에 충실할 때 더 많은 빛이 널리 퍼져 나갑니다. 이런 논리가 오늘 복음 마지막 구절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더 가지려고 하다 보면 제 본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는 위험에 빠집니다. 오히려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고 자신의 고유함을 되짚어 보며, 나 자신이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르고, 그 다름으로 나는 이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사유하는 데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잣대를 따르기보다, 각자의 고유하고 소중한 모습을 제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 나가는 길, 그것이 신앙이고,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곳에 함께하십니다. 하느님과 동행하려면 내가 허투루 보내는 나의 시간과 공간을 먼저 챙겨 나가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31일 (금) [백]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의 말이다. 그는 1815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근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요한 보스코는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 사제가 되었다. 특히 청소년을 사랑했던 그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오다가 1859년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 생활을 익히게 하려고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도 세웠다.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19세기의 탁월한 교육자로 꼽히는 그는 1888년에 선종하였고, 1934년에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4,26-34 마르코 복음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그분 자체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마르코 복음은 재촉합니다. 마르코 복음 막바지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메시아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우며 또한 멋스러워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당시 유다 사회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지요. 세상의 논리로 보자면 실패 그 자체인 십자가, 그 십자가를 지신 분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당위에 대한 저항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대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오늘을 애쓰며 살아갑니다. 신앙이 목적을 가지는 순간, 오늘, 지금의 시간에 대하여 결핍 의식을 지닐 때가 가끔 있습니다. ‘아직 멀었어. 좀 더 노력해야 돼.’라고 되뇌이며 내일의 희망찬 하느님 나라를 꿈꿉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자리,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납니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실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맞갖게 사는 것은 오늘 ‘이렇게 해야 돼!’라는 당위를 다시 한번 되짚어 물어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오늘의 ‘당위’가 어떤 이를 겁박하고 억압하는 일은 없는지, 오늘 나에게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짐으로 여겨지는 일은 없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우리 곁에, 이 자리에서 커져 갑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2월 1일 (토) [녹]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4,35-41 제가 아는 수녀님이 수녀원 입회 25주년을 맞아 소감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입회한 날 저녁 식탁에 사과가 있었습니다. 각자 사과를 반쪽씩 먹었는데, 수녀님은 사과를 더 먹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봉헌의 삶을 살고자 수녀원에 들어왔는데, 그까짓 사과 반쪽에 마음을 빼앗기는 자신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수녀가 된 지 25년이 지났으니 제가 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입회할 때처럼 저는 여전히 그 조그마한 것에도 마음을 빼앗긴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입회할 때에는 그런 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러한 저를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녀님의 말씀을 들으며 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여전히 나약하고 이기적이며 부족함이 많지만, 이러한 저 자신을 예전보다는 조금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저 자신과 타협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권능을 더 깊이 헤아리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센 돌풍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호들갑을 떨었던 제자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넘실대는 파도를 넘어 하느님의 품을 향하여 항해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와 함께 그 길을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 경자년 쥐띠해가 시작됩니다. 쥐는 부지런하고 꾀가 많다고 합니다. 올 한해는 쥐처럼 부지런하고 지혜롭게 사는 새해 되시길 빕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