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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2월 9일 (일) [녹] 연중 제5주일.

Berardus 2020. 2. 8. 18:47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2월 9일 (일) [녹] 연중 제5주일.

    제1독서(이사 58,7-10) 제2독서(1코린 2,1-5) 복음(마태 5,13-16)

    빛과 소금의 방식 맛을 내고 사물 밝히기 위해서는 스스로 소멸돼야 ‘빛과 소금’ 비유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역할 설명 하느님의 구원 능력 보존하고 밝게 드러나게 하여 인류가 하느님 힘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과제



      왠지 저항하거나 거역하기 힘든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빛을 담고 있는 얼굴, 환한 햇살 같은 미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온화함…. 오늘 복음은 그런 ‘빛’을 머금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임을 알려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 5,13.14)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내고 간직해야 할 삶의 소중한 가치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구현해온 사람에게서 발현되는 삶의 거룩한 열매가 바로 그러한 ‘빛’이고 그 빛으로 생산된 삶의 분말들이 ‘소금’입니다. ■ 복음의 맥락 연중 4주간에 이어서 연중 5주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교훈적 가르침을 주십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무엇이 진정하고 참된 행복인지를 여덟 가지로 정리하여 알려주신 연중 4주일 본문(올해에는 ‘주님봉헌축일’을 지냈기 때문에 다른 본문을 읽었지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로움에 주리고 자비롭고 평화를 위해 애쓴다면…(마태 5,3-12 참조),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이미지는, 제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어떻게 단련하고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개발 지침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구체적으로 해주어야 하는지 철저히 타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사랑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맛있게 하고 사물을 밝혀주기 위해서 스스로는 소멸되어야 하고, 그 소멸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물들 안에 존재하게 되는 방식,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묵묵히 간직하고 걸어가야 할 삶의 지고한 신념입니다. ■ 소금과 빛 예수님께서는 ‘빛과 소금’이라는 두 개의 상징적 은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역할을 설명해주십니다. 소금은 인간의 일상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요소입니다. 정상적 생활을 하는 가정이라면 소금 없는 집이 없을 것이고 인간의 신체에도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소금을 만들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빛’입니다. 빛은 하느님의 첫 번째 창조물이고, 따라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빛’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 은유를 제시하시는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14절)이며 ‘등경 위에 올려놓은 등불’(15절)로 설명하신 부분입니다. 생소하고 외딴 길을 갈 때, 저 멀리 불빛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면 그것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는 고마운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집 안에서도 등불이 등경 위에 있을 때 주변 전체를 볼 수 있어 일상이 아무 충돌 없이 진행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고 등경 위에 올려진 빛이기에 모두에게 가시적으로 공개되고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보여주어야 할 현실과 감추어야 할 현실이 따로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일관적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16절) 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 빛이 되려면 제1독서는 세상의 빛이 되는 방식을 정확히 제시해줍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 58,7)입니다. 인간의 의·식·주에 대한 기본권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며,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요구는 사회보장제도나 정치적 기구를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내어줌을 통해서 가능해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의 후반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다시 한 번 언급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준다면”(9-10절)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10절) ■ 하느님의 힘 바오로 역시 자신의 연설이나 활동이 하나의 ‘의견’ 혹은 ‘사회적 담론’에 머무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1코린 2,5)이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모든 활동이 인간의 언변이나 지혜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힘”(5절)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4절)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활동했던 헬레니즘적 배경을 염두에 둘 때, 당시의 모든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추종하고 찬양했던 ‘지혜’(소피아)를 배격하고 ‘하느님의 힘’을 강조했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선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 맺음을 통해, 그러한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해짐을 당당히 선포했던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생활 안에서 크고 작은 혁명을 주도한다고 해서 공동선과 구원이 쉽게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치밀한 조직과 사회적 연대로 인간의 기본권 보장을 촉구하고 구현하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복지적 협약 이후에도 여전히 도래하는 갈등과 모순, 파괴와 소외를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의 구체적 노력과 정성이 실종된 채, 공동선이라는 이념만으로 미화된 사회적 제도들은 인간의 품격과 존엄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이기주의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그런 미화된 가식과 위선으로는 결코 인간을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구원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빛과 소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진리를, 자신들의 언변이나 말재주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산위의 고을이나 등경 위의 빛처럼 드러내 보이는 이들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왜곡되지 않게 보존하고(소금) 밝히 드러나게 하여(빛) 인류가 그분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이러한 진리의 증거는 온전히 나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타인을 빛나게 할 때 비로소 나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빛과 소금의 방식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한주간 전례] 2020년 2월 10일(월) [백]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워 그녀에게 맡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초대 원장이었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복음묵상] 마르코 6,53-56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들의 행동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온 지방을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군중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필사적으로 자기가 아는 병자들이 낫기를 간절히 청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마을에 새로운 가게가 생겨 호기심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곳 계산대에는 하느님께서 계셨습니다. 놀란 부인이 묻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팔고 계시는지요?” 하느님께서는 답하십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 수 있답니다.” 부인은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잠시 뒤에 말을 쏟아 냅니다. “행복을 사고 싶습니다. 사랑과 평화도요.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자유도 주셔요.” 그러더니 또 덧붙입니다. “저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제 이웃을 위해서도 사고 싶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오해를 한 것 같군요. 여기서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씨앗만 팔고 있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바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라는 만큼의 필사적인 간절함과 그에 따른 적극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보고 있습니까? 그분을 만나려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자 뛰어다니고 있습니까? 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는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11일 (화) [녹] 연중 제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7,1-13 오늘 복음을 두고 흔히 ‘정결법 논쟁’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은 율법이 담긴 모세 오경 그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전통에 따라 이어진 관례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쟁점은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말마따나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든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이들의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요? 전통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뜻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점에 있어 프란치스코 교종(교황)께서 보여 주신 모습은 우리에게 일러 주는 바가 큽니다. 머무르셨던 숙소 비용을 직접 계산하시고, 바티칸의 관저가 너무 크다며 그 대신에 사제들이 묵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내십니다. 또 고급 방탄차가 아닌 일반 차량을 타시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시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예전 교종들께서 하신 방식 그대로 하신다고 하여도 그 누구도 비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늘 당연시하던 관례를 다시 복음의 빛에 비추어 과감하게 포기하시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려고 교종께서 얼마나 노력하고 계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빌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습과 규정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12일 (수) [녹]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7,14-23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곱씹어 보면 우리의 내면이 얼마나 죄로 얼룩져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날마다 우리 내면을 정화한다고 하여도 더러움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것들 외에, 세상 그 어떤 것도 영적인 면에서 우리를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더럽고, 정결하지 못한 것을 이토록 잘 알고 계심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깨끗하여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에 찌들어 있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만 자기들이 하느님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하느님께서는 그 반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깨끗해질 수 없는 우리를 더러운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 먼지로 뒤범벅이 되고 찌들어 있는 우리를 역겨워하지 않으시고 그냥 안아 주시는 하느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손수 정화수를 끼얹어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니 영적 결벽증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소 죄를 짓고 깨끗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죄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시는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더러운 모습 그대로 그분께 한 걸음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 스스로 깨끗함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깨끗한 마음을 먼저 맛보도록 합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13일 (목)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7,24-30 대형 마트에서 버려지는 쓰레기에 관한 텔레비전 뉴스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들은 유통 기한이 많이 남아 있는 유제품을 선호하여서 대형 마트는 가장 신선한 상품을 앞에 진열한다고 합니다. 항상 신선한 것을 판매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주려는 것입니다. 반면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식품들은 어차피 팔리지도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뒤로 밀려났다가 버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쓰레기로 처리되는 빵, 야채, 가공식품들이 엄청납니다. 선진국에서는 가축 사료나 에너지 재활용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상당수의 나라에서는 말 그대로 쓰레기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버려지는 것들이 식량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너무나 절실한 생존의 음식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볼 때 “부스러기”라는 표현은 배고픈 이들에게는 정녕 간절한 단어입니다. 그 부스러기가 생존을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빵을 먹는 이들은 정작 그 빵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 예수님께 청하였던 “부스러기”에도 이러한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에 응답하시어 그녀의 딸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어 주십니다. 부스러기의 은총이 이렇게 크다면, 도대체 빵의 은총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는 몸소 생명의 빵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빵이 되어 오시는 그분 안에서 우리는 어떤 간절함을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14일 (금) [백]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치릴로 성인과 메토디오 성인은 형제로,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나 터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두 형제는 전례서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알파벳의 슬라브 말로 번역하였다. 둘은 체코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에게 파견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로마로 돌아간 두 형제 가운데 치릴로 성인은 수도 서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69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메토디오 성인은 교황 특사로 모라비아에서 활동하다가 885년 무렵 선종하였다. [복음묵상] 마르코 7,31-37 오늘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단 한 번이 아니라 여섯 가지 행위를 통하여 고쳐 주십니다. 이를 살펴볼 때 우리도 영적으로 더욱 잘 듣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소음이 가득한 공간이 아니라 침묵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신 이유는, 침묵이 더 잘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이는 귀를 열려는 행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귀를 열고 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그저 기도서에 나온 기도문을 줄줄 읽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기도란 ‘말함’보다도 ‘들음’이 핵심입니다. 셋째, 침을 발라서 혀에 손을 넣으십니다. 이 행위는 마치 어린아이를 위하여 엄마가 먹을 것을 잘게 씹어서 먹여 주는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듣고, 이를 마음에 새기도록 영적인 힘 곧 성령을 집어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마음은 정화되고 우리는 새 힘을 가질 자세를 갖춥니다. 넷째, 하늘을 우러러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단둘이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다섯째, 한숨을 내쉬십니다. 우리의 처지를 깊이 공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 다음, 우리의 처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파타!”라는 말씀을 통하여 비로소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리게 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가 말을 제대로 하도록 치유하시고서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쓸데없는 이야기,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말은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처럼 여겨지더라도 소리 내지 말고 침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떤 말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귀와 입과 마음이 열린 사람이 지녀야 할 자세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갖추기 위하여 위의 여섯 단계를 다시금 되새깁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15일 (토) [녹] 연중 제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8,1-10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단어가 있습니다. “사흘”입니다. 성경에서 사흘이 가장 중요하게 쓰인 대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에 부활하시기까지의 기간일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둘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은 예수님과 닮아 있습니다. 군중은 사흘 동안 먹을 것도 없이 예수님 곁에 있다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길에 쓰러져 죽을 곤경에 놓였던 이들이 다시 살아나게 된 셈입니다. 곧 죽음과 부활의 도식 안에서 이 군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닮은 군중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다음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어떤 면에서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미리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복음에서 우리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이야기를 통하여 ‘부스러기 은총’과 ‘빵의 은총’에 대하여 묵상하였습니다. 곧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에게 내리는 부스러기 은총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빵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되새겼습니다. 바로 이 점에 비추어 오늘 복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빵의 은총을 얻고 참생명을 누리려면 ‘사흘’이라는 숫자로 상징되는 ‘자기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정신이 없으면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신다 하여도 참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해야 비로소 빵의 은총에 더하여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찬 은총 또한 누릴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일곱 광주리의 은총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 요즘 거리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한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미세먼지 때문 이였지만 현재는 신종 폐렴으로 서로에게 예방차원으로 사용을 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여 의심스러운 경우 스스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외출을 자제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좀 더 건강에 유념하는 한 주 되시기를 빕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