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 죽림굴(대재 공소)
박해시대 피난처로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
▲죽림굴(대재 공소) 안내석
죽림굴, 곧 대재 공소(1840-1868년)는
현재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간월산 정상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근 간월산 일대의 옛 신자촌인 간월 공소에서
왕방재라는 고개를 넘어 왕래한 박해 시대의 피난처이다.
이 석굴 공소는 대나무로 덮여 있어서 ‘죽림굴’이라고 불렸다.
폭 7m, 높이 1.2m 규모지만 입구가 낮아
눈에 잘 띄지 않아 은신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죽림굴 입구
기해박해(1839년)로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과
간월 공소의 교우들이 보다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하여
공소를 이룬 곳으로,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죽림굴 내부
재 넘어 간월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 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 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Catacombae)였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사목을 담당했다.
특히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경신박해(1860년) 때
이곳에서 약 3개월간 은신하며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미사를 집전하며
스승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서한
(1860년 9월 3일자)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울산 병영 장대에서 순교하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대재 공소 회장 이양등 베드로와 허인백 야고보
그리고 김종륜 루카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죽림굴 표지석
1860년 경신박해 때
이 지방에서 교우 20여 명이 체포되었고,
뒤이은 병인박해(1866년)의 여파로
1868년에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100여 명이 넘었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대재 공소는 폐쇄되고 말았다.
죽림굴로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언양에서 간월행 버스를 타고 호류 폭포에서 내려
왕방재로 등산해 간월산 정상에서
배내 쪽으로 2km 정도 내려가는 길은 왕복 3시간이 걸린다.
혹은 언양에서 밀양으로 연결된 24번 국도로
석남사를 지난 뒤, 이천행 비포장 도로를 따라
이천(배내) 본 동네 입구에 이르기 전
안내판 표시가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닦여진 산길은 3.6km 정도의 거리이다.
죽림굴과 관련된 순교자 중에는
24세의 나이로 순교한 김 아가타가 있다.
그녀는 부산 지방의 첫 신자로 기록되고 있는
김교희 프란치스코(일명 재권, 1775-1834년)의 손녀이자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장하치명’(杖下致命)한
김영제 베드로의 누이동생이기도 하다.
▲죽림굴 가는 길(간월재 신불산 자연휴양림 입구)
경신박해 때 아버지 김상은
야고보와 오빠 김영제가 체포되자
그 뒤를 따르고자 김 아가타는 17세,
18세의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해서 잡혀가기를 청했다.
압송되다가 이들을 농락하려는 포졸들을 피해
간신히 도망친 김 아가타는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을 알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최양업 신부가 숨어 있던
동굴, 즉 죽림굴로 찾아 들었다.
극심한 고생으로 인해 탈진한 그녀는
죽림굴에 도착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누웠다.
그녀는 3개월간 이곳에 머물며
전교에 여념이 없던 최양업 신부를 도왔고,
양식이 떨어지면 최 토마스 신부가 손수 삼은 짚신을
언양 등지에 나가 팔아 식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때로는 등억, 화천 등 가까운 동리에 나가 구걸도 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했다고 한다.
후세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녀가 밖에 나갔다가
굴로 돌아올 때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산기슭 입구에서부터 등불이 나타나
험한 길을 인도한 기이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죽림굴 등산안내도
결국 병석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
김 아가타의 유해는 간월 공소 뒷산에 모셔졌다.
간월 공소는 1860년 경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동정녀 김 아가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기에
순례자들은 여인의 몸으로 천주를 고백하고
자진해 붙잡혀 가려 했던 그녀의 용감하고도
숭고한 정신만은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3월 4일 부산교구는 간월에 있던
김 아가타의 묘를 살티에 있는
오빠 김영제 베드로의 묘 옆으로 이장했다.
▲죽림굴 가는 길 이정표
1986년 10월 29일,
당시 언양 성당의 김영곤 신부와
평신도 11명이 죽림굴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그 해 11월 9일 평신도 4명이 재시도하여
대나무와 풀로 뒤덮인 굴을 발견하였다.
당시 굴 안에서 구유조각과 나무지팡이 등이 발견되었고,
지금은 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6년 2월에는 죽림굴 주변을 정리하면서
안내석을 새로 세우고 입구에 계단도 만들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8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