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 문제에 관한 토론이 이어지는데,
오늘 독서는 “오랜 논란”이 있었다고 짤막하게 전합니다.
하지만 이 단락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발언을 전혀 전해 주지 않습니다.
물론 그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지요.
사도행전 저자는 바오로가 어떤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그들을 이해시켰는가보다는 베드로가 어떻게 그를 지지해 주었으며
야고보가 어떻게 그 논쟁을 마무리 지었는가를 전해 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처음에 이방인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고 말씀하신 뒤에야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때에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을 부르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경 말씀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확인하고 증언합니다.
다른 민족들이 주님을 찾게 되는 일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미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협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할례 받은 이들과 할례 받지 않은 이들이 함께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게 되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또한 그렇게 교회의 일치를 도모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야고보는 유다인들에게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 것을 간청하고
, 이방인들에게는 유다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최소한의 규정을 지켜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먼저 함께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성령의 이끄심에 맡겼습니다.
성령께 귀를 기울이고 성경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내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을 이루시도록
길을 내어 드리고 그 길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하느님 귀에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는 성령께서 머무시는 장소가 되고
그 성령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쁨을 소유하려면 언제나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기쁨이 고통과 시련을 거슬러
험하고 끈질긴 투쟁으로 얻을 수 있는 열매이기도 하듯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노력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거나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