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신자들의 입교 동기 일 순위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오늘 복음을 읽어 드리면
예비 신자 교리반 등록을 취소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평화는 긍정적인 가치입니다.
늘 “평화를 빕니다!”(‘샬롬’)라는 말로 서로 인사하던 성경의 인물들에게도,
예수님께도, 평화는 갈구하는 대상이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고 간다고 말씀하시지만,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분(마태 10,34 참조)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옳아 보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드시고 나서 하신 ‘고별사’(13―17장)에 속합니다.
이 말씀을 마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잡혀가시겠지만(18장),
그래도 제자들은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가고 채찍질하고 죽일지라도
세상은 예수님께 결정적으로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세상이 예수님을 지배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스스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원하여
아버지께 가시는 것을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스승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보면서 기쁨과 평화를 지닐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평화와는 다른 당신의 평화를 주고 가시며,
어제 복음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보호자시며
우리에게 당신 말씀을 기억하게 해 주실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그야말로 돌에 맞아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던
바오로 사도도 의식을 되찾고 데르베와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을 거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제자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삼던 사도들은
이렇게 죽을 위험을 넘기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
진정한 평화 덕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