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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장님 말씀] 이 땅에 평화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미사 강론)

Berardus 2022. 7. 2. 06:23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미사 

 

2022. 06. 25. 성모당

오늘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년이 되는 날입니다.

한 때는 ‘6.25사변’이라고도 불렀었는데 지금은 공식적으로

‘한국전쟁’, 혹은 ‘6.25전쟁’이라고 부릅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갑자기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해온 전쟁인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3년 1개월 동안 이 한반도에서 치러진 전면전이었습니다.

6.25노래를 아십니까?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로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요즘은 안 부르는 것 같습니다만,

옛날에 학교 다닐 때 해마다 6월 25일이 되면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조회를 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노래 전체 가사를 알아보려고

어제 인터넷을 찾아보았더니

한 때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되었었고

지금은 가사조차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만

참으로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6.25전쟁 발생 직전, 국군과 북한군의 전력을 비교해보면

병력으로도 북한군이 배가 많았습니다.

전력 차이를 말할 때 당시 북한군에는 전차가 242대가 있었는데

국군에는 한 대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차만이 아니라 현대전에 있어서 포병 화력이

상당히 중요한데 6배의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한군이 남침한 지 불과 3일 만인 6월 28일에

한국 정부는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주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것입니다.

7월 7일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창설되어 본부를 일본 도쿄에 두고

첫 번째로 미군 스미스 부대를 한국전에 파병하였지만

북한군에게 패전을 하고 말았습니다.

북한군은 남침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 왔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모릅니다.

국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버텨주었기 때문에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사리 상륙작전’을 아십니까? ‘장사리’는

영덕 장사해수욕장이 있는 동네를 말하는데,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기만 작전으로 장사리 상륙작전을 펼쳤고,

그래서 그 장사리에서 우리의 국군과

학도병들이 많이 희생되었던 작전이었습니다.

최근에 장사해수욕장 옆에 큰 군함 모형으로

기념전시관을 세웠는데 동해안에 가시면 한 번 가 보시기 바랍니다.

하여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북으로, 북으로 밀고 올라갔습니다.

10월 10일에 원산을 점령했고, 10월 19일엔 평양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래서 다급해진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다다랐을 즈음인

10월 25일에 중공군이 참전을 하였습니다.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북한군과 함께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데 후퇴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12월 4일에 평양에서 철수했고

12월 14일부터 흥남철수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흥남철수작전은 민간인 철수작전이 아니라 퇴각하는 미군을

해상을 통하여 철수시키는 작전이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 오키나와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선적의 화물선

빅토리아호가 이 작전에 동원되었다가 만 여 명의

민간인 피난민들을 태워서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에

거제도에 내려놓았던 사건은 기네스북에 올라갈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 빅토리아호의 선장이 ‘레너드 라루’라는 사람인데,

그분은 그 엄청난 일을 하고 난 후인 1954년에 미국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를 하여 평생을 평범한 수사님으로 사시다가

2001년에 87세의 일기로 선종하셨습니다.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서는 이 분의 삶이 너무나 훌륭해서

시복청원을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7년 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세계가정대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뉴저지에 있는 성 베네딕토회 뉴튼 수도원에 있는

그분의 묘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주 가톨릭신문을 보니까 거제시에서 이분에 대한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어 공연을 할 것이라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하여튼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합세와 공격으로 인하여

북한에서 퇴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통상 ‘1.4후퇴’라고 합니다.

왜 1.4후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1.4’라는 말은 1951년 1월 4일이라는 말인데,

바로 그날 대한민국 정부가 다시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퇴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서울은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북한군과 중국군은 오산과 장호원, 제천, 삼척까지 남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전열을 다시 정비하여 대반격을 시작하였고,

드디어 3월 14일에 서울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그 후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2년 이상 계속되다가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밤 10시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던 것입니다.

이상이 6.25전쟁의 개요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피해를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수백만의 사상자들과 천만 명의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6.25 전후로 해서 북한 정권에 의해 돌아가신

가톨릭 성직자 수도자만 해도 100명이 넘습니다.

지난 주 가톨릭신문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근현대 순교자 하느님의 종 81위를 시복청원하기 위해

국내 절차를 마치고 교황청 시성성에

자료를 제출할 준비를 끝냈다는 보도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 81분이 거의 다 6.25 전후로 해서

공산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은 분들입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대구수녀원 원장(1932-1934년)을 하셨고

초대 한국관구장을 하셨던

베아트릭스 수녀님도 그 중의 한 분이십니다.

프랑스 분인 수녀님은 6.25 당시

서울 수녀원에서 한국관구장으로 계셨습니다.

수녀님은 전쟁이 터지고 서울이 함락되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수녀원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7월 17일에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어서

이북으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 참혹한 ‘죽음의 행진’을 하셨고 11월 3일에

중강진 부근에서 총살형으로 순교하셨던 것입니다.

성모당 오실 때 앞집 수녀원 담장에

이 분 사진이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칠곡 왜관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1952년에 왜관으로 오기 전에는

북한의 함경남도 덕원에 있었습니다.

사실 베네딕도 수도원이 1909년에

독일에서 한국으로 진출하였는데,

처음에는 서울 백동(지금의 혜화동)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그곳을 서울교구에 넘겨주고 원산 근처의

덕원이라는 곳으로 가서 수도원을 짓고

신학교도 지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함경남북도 뿐만 아니라

연길까지 사목을 맡아 하고 있었는데,

중국과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결국 수도원과 신학교까지 공산 정권에 빼앗기고,

특히 6.25 전후로 해서 많은 수도자들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결국 수도원은 전쟁 중에 남한으로 피난을 와서

부산에 머물고 있었는데 최덕홍 주교님의 배려로

1952년부터 왜관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는

6.25 전후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했던

38분을 시복하기 위해 교황청에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당시 흥남본당의 주임신부를 했던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님이십니다.

시인 구상 선생님을 아시지요? 하느님의 종

구대준 신부님이 구상 선생님의 형입니다.

구상 선생님도 원래 이름이 ‘구상준’입니다.

구상 선생님은 1951년 1.4후퇴 때

대구로 내려와 살게 되었는데

그 해 낸 첫 시집 제목이 ‘구상’이었습니다.

시집 속표지에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북한의 공산당들이 2년 전에 납치하였다가

이제는 그만 순교하였을 나의 오직 하나의 형

대준 신부의 이름으로 이 시집을 올리나이다.”

구상 선생님은 1955년부터 한 20년 간 왜관에서 살았습니다.

부인이 의사라서 왜관에서 오랫동안

‘순심의원’을 개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관에 가면 ‘구상문학관’이 있는데

한 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구상 선생님의 시 중에 ‘焦土의 詩’라는 연작이 있는데

1956년에 시집으로 출판을 하였고

이중섭 화가가 표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중섭 선생님은 6.25전쟁 전까지

원산 사범학교 미술 선생님을 하셨기 때문에

두 분이 젊을 때부터 잘 알고 있었고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올해로 꼭 72년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김대중 대통령 때,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때도 남북정상이 만났습니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들어와서 남북정상회담이 세 차례나 있었고

또 북미정상회담도 세 차례 있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될 듯 될 듯 기대를 잔뜩 하였는데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정말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정성과 기도가 부족한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신명기 30,1-5)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전쟁은 안 됩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민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혼란에 빠져있고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내 욕심이 아니라 하느님 뜻과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하며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더욱 더 기도를 열심히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더 이상 전쟁이 없이

진정한 평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기도와 정성과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루르드의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님,

우리나라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성인성녀와 복자들이여,

저희와 우리나라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