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교리]
도덕적 양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783~1802항)
교회 통해 갖추게 되는 하느님 나라 수준의 양심
각자의 내적 법정인 ‘양심’
고정되지 않고 성장하는 것
교회 공동체 안에서 훈련돼야
각 사회는 그 사회의 유지를 위해
그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법’을 제정합니다.
‘양심’은 배운 법을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각자의 ‘내적 법정’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양심이 고정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형성되고 교육되고 성장한다’라고 가르칩니다.
양심은 존재합니다.
이를 믿는 우리는 이제 양심을 계발하고
형성하고 발전시켜갈 필요가 있습니다.
더 잘 형성된 양심이 한 사회에 더 잘 소속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지켜낸 법은
‘사랑’의 율법이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로마 13,10 참조)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의 율법이 양심에 새겨지는 것일까요?
아기는 부모로부터 사랑받아야만
가족 공동체에 소속될 자격을 갖춥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는 이미 사랑의 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는
양심의 법만으로도 구원에 이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모세의 율법이나 그 리스도의 가르침을 몰랐다고
하느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삶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방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로마 2,14)할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같은 수준의 율법이 양심 안에 쓰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자신에게 준 ‘사랑의 수준’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적은 부모에게 적은 사랑만 받은 사람은
사회에서 적게 사랑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은 많은 사랑을 내어주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만약 아기가 늑대에게 키워졌다면 늑대의 본성만큼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양심은 늑대 무리와 함께 살 수 있는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양심의 수준으로 머물 곳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려면 어때야 할까요?
하느님 수준의 법이 양심에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법은 단순히 사랑하라는 계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법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준이 되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 사랑은 미사 때 말씀을 통한 가르침과
성체를 통한 희생으로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이 수준의 사랑을 체험한 이들은 그리스도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 백성의 자격을 얻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 수준의 양심이 형성되고
교육되고 계발되는 공동체인 교회에 머물러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양심을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체를 통해 법의 제정자가 우리 안에
함께 계심을 믿으려는 노력을 쉼 없이 계속하는 것입니다.
운전할 때 경찰이 내 옆에 함께 타고 있다면
신호등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법을 제정한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다 믿으면
양심이 올바로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 안에 머무시면서
마음으로 지을 수 있는 죄까지도 지을 수 없게 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 백성 수준의 양심을 갖추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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