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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 펠티에 / 성녀 보나(보바)와 도다

Berardus 2022. 4. 23. 15:32

  

of the Sisters of Our Lady of Charity

of the Good Shepherd

 
4월 24일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 펠티에

Saint Mary Euphrasia Pelletier
Santa Maria di S. Eufrasia (Rosa Virginia Pelletier) Fondatrice
St. M.Euphrasia Pallotta
Born:31 July 1796 as Rose Virginie Pelletier at Noirmoutier, France
Died:24 April 1868 of natural causes
Beatified:30 April 1933
Canonized:2 May 1940 by Venerable Pope Pius XII
Patronage:travellers
 
 
로사 바르지니아 펠레씨에르(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 펠레씨에르)는
브리타니 연안의 노와르무씨에르 태생으로,
뚜르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성 요한 에우데스(축일:8월19일)가 세운 수도회의 소속이었다.
이때문에 로사는 "피난처이신 사랑의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11년 뒤에는 원장이 되었고, 앙제 지방에 새 수도원 건립을 성공적으로 이룩하였으나,
"착한 목자와" 관련되는 새로운 수도회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회(Sisters of the Good Shepherd)는 1835년에 성좌의 승인과 더불어
급속하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창설자가 서거했을 때, 착한 목자 수녀들의 수효는 2760명이었다. 그녀는 1940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 펠티에 (1796 - 1868)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을
온 마음을 다하여 돌보십시오. 우리의 사명에는 거룩한 그무엇이 있습니다.’
성 마리 유프라시아는 프랑스 혁명기에 서부해안 느와무티에 섬에서 의사였던 아버지와
신심깊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헌  신적인 봉사와 사랑을 보면서 자란 성녀는 가난한 이들,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연민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며,
어린 시절 오빠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과 소녀시절의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마음이 부서지는 체험은
성녀의 마음 안에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더욱 깊어지게 하였다.
 
 
교회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성녀는
성당에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지하실을 청소하다 성 필베르의 상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14세때 성녀는 정들었던 느와무띠에를 떠나 뚜르의 기숙학교로 들어갔다.
그녀가 사랑했던 고향과 정든이들을 떠나와 성녀는 고통스러웠고 고독하였지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성녀는 18세때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상처입은 여성들을 위하여 일하는
 애덕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수련기때는 성서와 애덕성모 수녀회의 창립자인 성 요한 에우데스의 저술들에 심취하였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사랑하신 똑같은 사랑과 똑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메시지는 성녀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성녀의 수도생활을 통하여
그리고 고통받은 여인들에게 헌신하면서 성녀의 전 생애동안 퍼져나갔다.
 
 
29세때 성녀는 수녀회의 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뚜르의 수녀원 안에 ’작은 수녀원’인 성 막달레나 수녀회
(주:착한목자 관상수녀회로 이름이 바뀌었다)를 세웠다.
이 수녀회는 관상 수녀회로 부르심받은 이들과
또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열려있는 수녀원이었다.
그리고서 1829년 앙제에서 수녀원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수도회의 체제는 한 수도회 안에서도 분원간에 행정적인 협력이 없었다.
 
성 마리 유프라시아는 성 요한 에우데스에 의해 시작된 구원사업으로부터
전세계가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성녀는 수녀들을 전세계에 보낼 수 있도록 중앙본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어려움 끝에 1835년에 앙제 수녀원을 모원으로 하는 국제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 체제의
착한 목자 애덕성모 수녀회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인준으로 설립되었다.
 
 
성녀는 착한목자 수녀들에게 십자가의 사랑과 영혼구원을 위한 열성을 유산으로 남기고  
1868년 4월 24일 선종하였다.  
-(자료사진,기사제공:착한목자수녀회 2002.7.21)-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회 소개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회는 1835년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에 의해
프랑스 앙제에서 국제 수녀회로서 창립되었다.   
 
수녀회는 그 뿌리를 성 요한 에우데스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착취구조에 허덕이는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1641년 창설한 애덕 성모 수녀회에 둔다.
창립자인 성 요한 에우데스와 성녀 유프라시아의 영적 유산의 계승자인 수녀들은
위임받은 교회의 화해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인간적 나약을 이해하고 감싸주시는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죄와 그 결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애덕과 복음화의 사도직에 헌신한다.
수녀회에는 같은 은사를 사는 두 가지 생활양식이 존재하는데  
착한 목자 활동 수녀회와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가 있다.
활동 수녀회는 절망 속에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도적 활동을 통해 돕고,
관상 수녀회는 고독과 기도와 고행의 생활로써
 그 여성들의 회개와 구원을 돕는다.   
 
착한목자 수녀회의 영성  
 
착한목자 수녀회 영성의 중심은 육화하신 예수님의 인성,
특히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착한목자 예수님의 마음에 있다.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착한목자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보고 내가 돌보리라.
양떼가 마구 흩어지는 날,목자가 제 양떼를 돌보듯이, 나는 내 양떼를 돌보리라.
먹구름이 덮어 어두울지라도 사방 흩어진 곳에서 찾아오리라. ...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떼를 쉬게 하리라.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 오리라.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힘 나도록 잘 먹여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 주겠다."
(에제키엘 34)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나약함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품어 안으신다.
길 잃은 사람을 찾아 데려오고,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시며,
약한 이들에게 힘을 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한없이 자비로운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다.
 

성 마리 유프라시아는
 연민과 자비로 충만한 착한 목자의 모습과 정신이
바로 착한 목자 수녀들이 살아야 할 원형이고 본받아 할 참된 모범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착한 목자 수녀들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스스로 하느님의 자비를 끊임없이 체험함으로써
어둠 속에 헤매는 사람들 가운데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현존이 되고 있다.
 
성 마리 유프라시아는 어떤 상처나 죄악도
인간의 영혼의 본질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으며,
그녀의 보호 아래 있는 여성들이 회심하고
 하느님이 선물하신 그들 고유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착한목자로서 그들을 이끌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삶을 위하여 착한목자 수녀들은
정결, 청빈, 순명 서원외에 제 4 서원인 열성을 서원한다.
열성의 주요한 특징은 각 개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모상을 소중히 여기고 각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열성 서원은 영혼 구원을 위한 서원으로, 착한목자 수녀들은 구해야 할 영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예언자적인 용기를 가지고 자비와 화해를 전달하면서 살도록 투신하게 한다.
착한목자 수녀들의 성소의 중심이 바로 이 열성이며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가 이 열성에 있다.
이 열성은 연민, 자비, 화해, 일치, 정의의 얼굴로 이 사회 안에 드러난다.
 
관상 수녀들은 고독과 기도 안에서 자신의 삶을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특별히 착한목자 활동 수녀회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다.
착한목자 관상 수녀들의 성소의 중심은 기도이다.
수녀들은 기도 안에서 교회가 수녀들에게 맡긴
화해의 사명에 대한 열성과 착한목자의 자비로운 성심으로
온 세상을 포용한다.
봉쇄는 주님께 대한 온전한 주의 집중과 기도에의 완전한 봉헌의 표지이며 표현이다.
수녀들은 공동체를 살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착한목자의 성심에 데려올 수 있도록
거룩한 공간을 창조한다.
 
착한목자 관상 수녀회 소개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는 착한 목자 수녀회 창립자인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에 의해서
1825년 11월 30일에 막달레나 수녀회라는 이름으로 투르에서 첫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당시 활동 수녀회의 보호 아래서 도움을 받았던 아가씨들과 윤리적으로 위험에 처했었으나
개심한 여성들 중에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원했던 이들이 있었다.
또한 여성들 중에서도 관상 수도 생활 안에서
다른 이들의 회개를 위하여 보속과 희생으로 자신을 바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염원을 대하게 된 유프라시아 수녀는
하느님께서 이들을 관상 수도생활에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들을 위해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착한 목자 관상 수도회이며 1834년 교회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고독과 기도와 고행은 그들의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현재 전세계에 약 850여 명의 관상수녀들이 생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98년 첫 한국인 수녀가 탄생한 이래 현재 4명의 유기서원자와
 3명의 수련자가 생활하고 있다.
 
우리의 발자취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는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가 프랑스 뚜르의 애덕 성모 피난처 수녀회의 원장으로 있을 때
1825년 11월 30일 프랑스 뚜르에서 세웠던 ’막달레나 수녀회’를 기원으로 한다.
그 후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가 앙제의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회를 창립하면서 거기에서
막달레나 수녀회도 함께 세웠고 1834년 교회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1985년부터는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성녀가 막달레나 성녀의 이름을 수녀회의 명칭으로 삼고, 그녀를 수녀회의 수호성녀로 삼았던 것은
그녀에게서 주님께 대한 오롯한 사랑과 제자의 모범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고 충실하게 십자가 아래 있었고 또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한
충실한 증거자였기 때문이다.
 
영성  
기도는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의 성소의 핵심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안에서 사명에 대한 열성으로 온 세상을 포용한다.
정의와 자비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대화 안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기도와 보속 안에서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특별히 착한 목자 활동 수녀들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다.
관상하는 목자들은 관상과 기도의 정원에서 고독과 침묵의 공기를 호흡하고,
복음적 금욕으로 옷입고, 노동으로 생계를 구하면서 단순하게 살아간다.
공동체는 우리 삶의 본질적인 것이다.
공동체는 사랑의 신비와 하느님 안의 친교로의 증거를 주도록 불리움 받았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우리는 믿음 안에 세워져서 희망에 살며
완전한 애덕을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이다.
봉쇄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온전한 주의 집중과 기도에의 완전한 봉헌의 표지이며 표현이다.
우리는 공동체를 살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착한 목자의 성심에 데려올 수 있도록
거룩한 공간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의 관상 생활의 핵심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느님의 수위성,
기도와 관상,
침묵과 고독, 마음의 봉쇄
화해의 사명, 착한 목자의 자비, 정의
공동체 생활,
복음적 금욕,




 
성요한 에우데스 (1601~1680) 축일:8월19일
 
예수성심과 성모성심 신심의 아버지요 박사이며 사도인 성 요한 에우데스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신실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당시 얀세니즘에 대항하여 종교쇄신운동을 주도하던 ’프랑스 학파’에서 성장하였다.
사목자로서의 그의 삶은 예수성심 안에서 관상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예수 성심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마리아 성심에 대한 의탁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는 사제가 된 후 45년 동안 전교여행을 계속하면서
그의 강론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전하였다.
전교 여행 중에 만난 사제들의 실상을 인식한 그는
 사제들의 양성과 교육, 성화를 위해 신학교를 세웠고,
예수 마리아 수도회-오늘날의 유디스트-를 창설했다.
또 죄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애덕 성모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애덕 성모 수녀들은 "회개하는 소녀들과 여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제 4서원인 열성서원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영혼의 구원", 특별히 내가 파견되는 곳의 사람들을 위하여 살고 일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제 4서원으로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회의 내적인 핵심이 되었다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의 열렬한 사도였던 그는 예수 성심 축일과 성모 성심 축일제정에,
그리고 의식서 저술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냉냉하고 형식적이던 당시 신앙생활에 커다란 쇄신을 불러 일으켰다.
1925년 시성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관한 탁월한 저술들이 남아있다.  
(자료사진,기사제공:착한목자수녀회.2002.7.21)
 
하느님의 사랑
 
"나는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끊임없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의 본질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즉 온전한 사랑과
지극히 순수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렵니다."

 

[이콘]그리스도의 부활과 지옥순례
러시아 ·야로슬라블(Jaroslavl) 화파.17세기.90.5x54.5cm
 
부활제는 일년 중 그 극치를 이루는 예배의식이며
그리스 정교회의 예배의 심장(心臟)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성화는 부활제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지옥 순례를 소재로 한다.
 
아담은 손으로 그리스도를 붙잡고, 에바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천국의 문앞에 있는 선한 목자,
그 왼쪽에는 천국의 선한 목자에게 에녹(Henoch)과 엘리아가 난간 뒤에서 절하고 있고
그 아래에는 유향을 든 여인들라 무덤을 지키는 천사,
중앙에는 부활하는 그리스도가 무덤으로부터 일어서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왼쪽 윗 모서리에는 예루살렘의 성벽이 보인다.
흥미 진진한 묘사로서 높은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유럽 聖畵(ICON)集에서)
 

 
4월 24일
성녀 보나(보바)와 도다 축일

St.Bona & St.Doda
(Bona, Bova, Beuve)
680년경 동정,프랑스, 베네딕또회
 
성녀 보나(보바)
Reims S.Pietro의 수도원장.
오스트리아의 왕이었던 Sigeberto의 딸이었다.
수녀원의 수도원장이 되면서 분도 수도회의 수도규칙을 도입하였다.
성녀의 조카인 Doda를 영적으로 잘 교육시켜 성덕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Doda도 후에 수도원장이 되었으며 성녀 보나와 아울러 성녀가 되었다.
성녀는 673년 4월 24일에 임종하였으며, 교회는 이 날을 성녀 보나와 도다를 기념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 보바는 성 발데리쿠스(Baldericus, 10월 16일)의 여동생으로
 다고베르트(Dagobert) 왕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덕으로써 왕궁과 나라 전체를 교화하였다.
 성녀 보바는 하느님께 자신의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모든 결혼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녀의 오빠인 성 발데리쿠스가 639년 몽포콩(Montfaucon)에 수도원을 설립한 이후
 랭스(Reims)에 베네딕토회 수녀원을 설립하자,
성녀 보바는 680년 죽을 때까지 수녀원장으로서 살았다.  
성녀 보바의 조카딸인 성녀 도다(Doda)는 그녀의 발자취를 따랐고
 그녀를 이어 수녀원장직을 계승하였다.
두 성녀의 유해는 후에 랭스의 성 베드로(Petrus) 수도원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비록 두 성녀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0세기에 그곳 수녀들과 관련된 전승들이 작가에 의해 다시 기록되었다.
성녀 보바는 보나(Bona)로도 불린다.
-(가톨릭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