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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성 레오니데스 순교자 / 복녀 마리아 가브리엘라 사게두 / 복자 프란치스코 파브리아노

Berardus 2022. 4. 21. 17:34
 

The Resurrection-PINTURICCHIO

Fresco. Palazzi Pontifici, Vatican

 

요한 3,31-36

31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신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32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을 확증하는 사람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하시는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

36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4월 22일

성 레오니데스 순교자


St. LEONIDAS of Alexandria

San Leonida Martire, padre di Origene

Died:beheaded in 202 at Alexandria, Egypt

Canonized:Pre-Congregation

Leonida = simile al leone, forte, dal greco = similar to the lion, fort, from the Greek

 

세베루스 황제의 크리스챤 박해 때, 알렉산드리아 순교자들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순교자는 박학한 크리스챤 철학자인 레오니데스이다.

 

그는 기혼자이고, 그의 일곱 아들 중의 맏이는

저 유명한 학자인 오리게네스(philosopher Origen)이다.

에집트의 집정관 레투스가 박해를 시작하면서 그 역시 체포되었다.

당시, 17세이던 오리게네스는 순교의 열망에 불타서 부친을 찾아나서려 하자,

 그의 모친이 그를 집안에 가두었다.

이리하여 그는 부친에게 용감하고도 즐겁게 순교의 영광을 받으시라는 글을 보냈다.

레오니데스는 202년에 참수치명하였다.

 

▶ 오리제네스 
라틴어  Origenes 


Origenes(185?∼254?). 알렉산드리아의

성서학자이며 주석가. 교부.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으며 202년의 박해 때 부친을 여의었다.
주교 데메트리우스(Demetrius)와의 충돌로 피신한 교사 글레멘스(Clemens)대신에
알렉산드리아 교리신학파의 지도자로 지명되었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영위하였다.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마태오 복음서 19장 12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자신을 불구로 만들었다.
또한 이교철학자와의 호교적 논쟁에 대처하기 위해 신플라톤주의와 이교문학을 공부하였다.
215년에 이어 230년 팔레스티나의 재방문 때 그 곳 주교들에 의해 서품받은 문제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231년 체사레아(Caesarea)에 정착, 그 곳에 유명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250년 데치우스(Decius)의 박해로 고문받았으며 끝내 사망하였다.

 

성서주석서로는 ≪핵사플라≫(Hexapla)가 유명하며
그 밖에 그의 성서주석은 구약의 거의 전부와 4복음서들을 망라하고 있다.
신학서는 ≪원리에 대하여≫(De Principiis)가 주목되며
금욕적 저서 ≪순교에의 권고≫와 ≪기도에 대하여≫가 고대에 널리 읽혔다.
마르치온설을 반대한 그의 교리는 완전히 초월적인 일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였으나
철학적 사색은 가끔 매우 대담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의 정통성은 가톨릭 교회로부터 다소 의심되고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가타리나 축일:11월25일.게시판1491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오리게네스 사제의 순교 권고사에서

(Nn. 41-42: PG 11,618-619)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같이 당하고 있으니 그의 위로도 같이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옮겨 감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옳겨 갔다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가지 않고 아직 죽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죽음의 어둠에서 나와 소위 말하는 살아 있는 돌로 지은

생명의 빛이 비추는 건물에 들어간 이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셨으니" 우리도 그분을 위해 우리 생명을 바칩시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을 바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또 우리의 순교를 보고 감화를 받게 될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가 자랑할 시간이 왔습니다. 성서는 말해 줄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에 대해 자랑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가져 오고 인내는 사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가지고 오며

끈기는 희망을 가지고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많은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입시다.

우리가 많은 위로를 받기 원한다면 많은 고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애통하는 이들도 위로를 받겠지만 아마도 같은 정도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다 똑같은 정도의 위로를 받는다고 하면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많은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이들은 참여하는 고난의 정도에 따라 위로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확신에 찬사도의 다음 말씀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많은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은층의 시기에 나는 너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봉사때문에 경비병에 둘러싸여 패배자처럼 하지 않고

승리자처럼 엄숙히 사형대로 끌려 나가는 날보다 더 은총이 넘치는 때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으뜸들과 권세들을 완전히 눌러 이기고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를 거둡니다.

그들은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그분이 고통을 통하여 얻은 것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세상을 하직하는 날말고 구원의 날이 또 있단 말입니까? "나는 간청합니다.

우리가 하는 전도사업이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은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온갖 인내심으로무슨 일이나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하십시오."

다음의 말씀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시오.

"이제 내 바랄 것이, 주여, 무엇이오니이까? 내 소망, 그것은 당신께 있나이다."

 

오리게네스 사제의 강론에서

(Homilia 9,1-2: PG 12,871-872)  

 

우리는 하느님의 제단과 집을 짓는 살아 있는 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는 성경 말씀대로 살아 있는 돌입니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세의 돌 중에서 가장 강하고 단단한 돌을 기초로 깔고 전체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도록

그 위에 집을 짓듯이 산 돌 중에서도 일정한 돌을 골라서

이 신령한 집의 기초로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초로 놓여진 사람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사도들과 예언자들입니다.

사도 바울로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누가 만일 이 집을 짓는 데에 마땅한 돌이 되려고

스스로 준비하여 기초에 가까운 돌로 놓여지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집의 기초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씀대로 "이미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듯 고귀한 기초 위에 거룩하고

신성한 건물을 짓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이 성전 건물에는 제단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살아 있는 돌인 여러분 중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밤낮으로 하느님께 청원을 드리고,

간구의 희생을 바치는 사람이 예수께서 제단을 만드실 합당한 돌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제단의 돌은 얼마나 귀중해야 할 것인가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입법자 모세가 말한 대로 "제단은 쇠가 섞이지 않은 완전한 돌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같이 완전한 돌은 과연 누구입니까?

사도들이야말로 완전하고 흠 없이 거룩한 돌이며

그들의 일치와 화목으로 모두 함께 한 제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며, 입을 열어

"주여, 당신은 모든 이의 마음을 아시나이다."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음이 되어 말과 마음을 합하여 기도할 수 있었던 그들이었기에

예수께서 성부께 제사를 바치시도록 한 제단을 만들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모두 한마음이 되어 같은 생각을 하며 다투는 일도 없고 헛된 영광을 찾는 일도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같은 말을 하도록 노력한다면

우리도 아마 제단을 만들기 위한 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사제의 「요한 복음 주해」에서

(Tomus 10,20: PG 14,370-37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의 성전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자기 육신이나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여기서는 유다인들을 뜻합니다.)

즉 아버지의 집을 자신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네들을 성전에서 쫓아낸 데 대해 화가 치밀어 하나의 표적을 청합니다.

 

그 표적을 통해서, 자기네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하시는 일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구세주께서는 성전에 대해 말씀하시는 듯하지만 실은 당신 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하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성전과 예수님의 몸 두 가지 다 교회의 상징이라고 나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산돌로 세워져 거룩한 사제로서 신령한 집이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로 모시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참된 성전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의 돌들의 일치와 조화는

 "내려가 다 흩어졌나이다." 라는 시편 21편의 말씀에 따라

끊겨 나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

박해와 혼란을 끊임없이 충동질하고 성전의 일치를 깨뜨리는 자들이 일으키는 전쟁으로 인해

이 일치는 끊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복구되고 몸은 사흘째 되는 날,

즉 환난의 날이 지나고 그 다음날인 완성의 날 후에 일어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을 세우는 이 뼈들이 주님의 위대한 날에 그분의 죽음으로부터의 승리로 인해

다시 살아날 때, 새 하늘과 새 땅의 셋째 날이 참으로 동틀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수난을 뒤쫓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온 몸의 부활 신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묻힌 다음 다시 일어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성도들의 온 몸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먼저 십자가에 못박혀 이제 생명이 끊긴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로처럼 우리 각 사람도 그로 인해 우리가 세상에 대해 죽고 세상은 우리에 대해 죽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밖에는 자랑할것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세상에 대해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또한 묻혔습니다.

"실상 우리는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 고 바울로는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우리도 하나의 보증을 얻었다는 뜻으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 고 말합니다.

 

 

4월 22일

복녀 마리아 가브리엘라 사게두


Blessed Maria Gabriella

Beata Maria Gabriella Sagheddu

Born:1914 at Dorgali, Sardinia, Italy

Died:23 April 1939 during Vespers of tuberculosis; body found incorrupt in 1957;

relics in a chapel at the monastery of Vitorchiano

Beatified:25 January 1983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pending

 

 

복녀 가브리엘라

 

교회일치를 위한 주보성인

 

복녀 마리아 가브리엘라는

 교회일치운동(에큐메니즘)을 위한 주보 성인으로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분이다.   

21세 때 로마 근교 그롯타 훼라타 트라피스트 수녀원(현재의 빅톨기아노 수녀원)에 입회하여

2년 후 서원을 하고 이 때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를 위해 바칠 개인적 봉헌을 하며

그 직후 폐결핵에 걸려 15개월간의 병고를 치른 뒤 1939년4월23일

 25세의 젊은 나이로 귀천하였다.  

 

사후 44년째인 1983년, 이방인들의 사도 바오로의 축일이며

교회 일치 주간의 마지막 날 1월25일에 바오로 대성당에서 복녀위에 올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교회일치운동을 위해  어떤 구체적인 활동도 한 적이 없다.  

하느님의 일하시는 방식이 늘 그러하듯 작은 자, 가난한 자를 통해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심을 우리는 이 복녀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마리아 가브리엘라 사게두는

 1914년 이탈리아 사르디나 섬 도르갈리에서 태어났다.  

섬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굳센 의지와 강한 성격의 격렬하고 자발적이며 솔직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가정은 소박하고 부지런한 농가였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들의 생활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있을 때까지 그녀의 삶은 같은 나이 또래의 많은 소녀들과 별차이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많은 결점과 제멋대로의 완고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가브리엘라는 반항적인 성격에 인내심도 없었으며

 상당히 많은 주위 사람들에게 문제아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일화를 한 번 보기로 하자.

 

그녀의 어머니가 가브리엘라에게 감자껍질을 정원 구석에 갖다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가브리엘라는 꼼짝도 않고 못들은 체 하며 구석에 앉아있었다.  

어머니는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반복해서 말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핑계를 늘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그래도 허사였다.  

어머니는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알아채고

여섯 살 먹은 아이를 감자껍질과 함께 버리고자 하는 장소로 들고갔다.  

어머니의 갑작스럽고 단호한 행동에 순간 어리둥절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가버리는 것을 본 그녀는 자기가 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번개같이 반응을 보였다.  

가브리엘라는 감자껍질이 든 바구니를 들어다가 그 장소에

 도로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후에 그녀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나는 길 위에 작은 돌멩이만으로도 화가 났고

 화를 내다못해 발작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녀는 분명 어릴 적부터 작은 성녀는 아니었다.  

평범한 한 인간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인간을 어떻게 압도적인 자기포기에로 인도하는지를 복녀 가브리엘라를 통해 보게 된다.  

이것은 평범한 우리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쎄지가 될 수 있다.  

 

 

다른 한편 가브리엘라는

 학교에서 총명하고 부지런한 학생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어떤 어려운 과제를 받더라도 주춤하거나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특히 수학을 좋아하였는데 어떤 학생보다  자신의 선생님보다도 잘한다고

자신의 우수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였다.  

이러한 면들로 인해 가브리엘라에 대한 평가는 아주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개성을 지닌, 자기주장과 투쟁심이 강하고 격하기 쉬운 소녀라고 평가했다.  

다른 사람들은 명랑하고 개방적이며 균형이 잡힌 솔직한 소녀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던 가브리엘라가 18세가 되었을 때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에게는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는데 언제나 병약하였다.  

가브리엘라는 토토나라 불리는 이 여동생을 마음깊이 사랑하였으며 헌신적인 자세로 돌보았고

특별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  

이 여동생이 16세의 나이로 죽은 것이다.  

이 사별은 가브리엘라에게

너무도 큰 아픔이었으며 이때부터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물론 그녀의 강한 기질이 하루 아침에 달라진 것은 아니나 그녀의 믿음은 조용히 심화되어갔다.  

외적으로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게 가브리엘라는 오랜 시간을 침묵 속에 보냈다.  

 

마음의 내적 변화의 첫 표시가 그 동안 완강히 거부해온 가톨릭 운동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였고

그때까지 절대로 가톨릭 운동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왔으므로 이것은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녀의 솔직함은 사람들 앞에 창피를 당하더라도 “내적 소리”에 따르게 하였다.  

이 운동은 그녀에게 신앙의 학교가 되었다.  

가브리엘라는 이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으며 점점 더 열렬하고

 깊은 복음의 묵상에로 이끌려 갔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개인적인 관계가 깊어감에 따라 전생애를 하느님을 위해 바치겠다는 결심이

굳어 갔으며 이것은 그녀에게 수도원 입회를 의미하였다.  

도르갈리 성당의 주임 사제이자 가브리엘라의 고백 신부인 동 바실리오 멜로니에게

성소에 관한 고백을 하였다.  

그러나 이 신부는 가브리엘라의 친구에게는

 그롯타 페라타 트라피스트 수녀원에 입회할 허락을 내리나

그녀에게는 입회를 기다리게 하였다.  

격한 성격의 그녀에게 이것이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허락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의 격렬한 성격은 더욱 조용해져 갔으며 다른 사람들이 반대를 해도

그녀는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변해갔다.  

 

같은 해 가을, 가브리엘라는 그롯타 페라타 트라피스트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하나의 문을 통과하였다.  이 문은 다른 문들과 다를 바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과는 영원한 거리를 둔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느님께 완전히 속하는 완전한 봉헌을 위해서 자신을 마음대로 할 권리를 포기하였다.  

물론 그녀의 수도생활이 모범적인 자기포기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참된 인간의 성장이란 어느날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서도 그녀의 성격적 약점이 가끔 튀어나오곤 하였다.  

수녀들 중 한 사람은 “수도생활 초기에 그녀의 가장 큰 어려움은 성급함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한 번은 그녀가 대원장실의 문을 노크하였다.  반응이 없자 또 한 번 두드렸다.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연이어 6번씩이나 시도를 하였다.  

끝내 격분하여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리고는 가버렸다.  

그러나 가브리엘라 수녀는 적응하기 힘든 어려움의 원인을

다른 자매들한테서 찾지 않고 자신에게서 찾았다.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브리엘라의 이러한 약점은 또 다른 많은 긍정적인 면으로 인해 메워졌는데

그것은 그녀의 변함없는 솔직함과 아낌없는 헌신이다.  

“누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그녀는 항상 거기 있었다”라고 한 수녀는 말한다.  

기도할 때에는 잠심 속에 머물렀으며 자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포기할 줄 알았다.

고백 신부인 동 멜로니에게 보낸 편지는

한 인간의 영적투쟁에 있어서의 진지한 자기인식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기인식은 인간을 진정한 사랑에로 이끌어준다.

 

 

「저는 실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수도원에 입회하는 것과

 완덕에 나아가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완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수도원에 입회할 때

자신의 “나”와 자신의 모든 결점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완덕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이 지니고 있는 가치도 별것이 아니겠지요.  

주님께서 저를 위해 이 길을 준비하셨고

그분은 제가 싸울 때 제 편에 서시어 싸움을 이기도록 잊지 않고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이기주의와의 싸움에서 가브리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승리를 거두기 시작한다.  

예전과는 달리 사람들의 눈에 두드러지는 것을 이제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라는 수녀들의 평가를 보면,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수학 실력을 떠벌리고 다니던 예전의 그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가브리엘라는 시간과 함께 서서히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다.  

수도생활이 주는 평화와 기쁨이 외적으로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1937년 10월31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그녀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따라 수도서원을 발하였다.  

이 때 하나의 기도문을 작성하였는데 이 기도는 그녀의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을 보여준다.  

 

「온전히 단순한 마음으로, 큰 기쁨 안에서 저를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이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서원을 발하면서 당신께 저를 완전히 그리고

 전부 봉헌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37년 12월 다음 해 1월에 예정되어 있는

 ‘그리스도교 일치주간’에 관한 공식 통보가 송부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세계 기도 주간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수련장과 긴 이야기를 나눈 후 대원장을 찾아가 면담을 청하였다.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그러나 결심한 바를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당신은 제가 하느님께 저의 생명을 바치기를 원한다면 저에게 그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이것 외에 저의 생명이 어떤 다른 가치를 지닐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말로 가치있는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저희들에게 만일 장상이 허락한다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대원장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으므로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고 하였다.  

며칠 후 가브리엘라는 다시 대원장을 찾았고 “하느님이 저에게 그것을 원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저는 이 봉헌을 하도록 내적으로 재촉받고 있습니다.  

저의 의지로는 도저히 어떻게 달리 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수녀원의 영적 지도 신부와의 상담 후 그녀의 간절한 바램을 실현시킬 수 있는 허락이 떨어졌다.  

이 봉헌은 문서로 작성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도 신부, 대원장, 수련장은 그 해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에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의 특별한 봉헌으로 인한 참여를 알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밤 가브리엘라 수녀는 어깨 부위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2월에는 벌써 기침이 심해지고 안색은 창백해졌다.  

감기라는 몇 번의 오진 끝에 폐사진을 찍기 위해 로마 병원으로 갔다.  

물론 그 날 저녁 수도원으로 돌아올 계획으로….  

검사를 마친 의사들은 어떤 병인지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폐결핵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치료해볼 방법이 있기나 한지 등을 찾아야만 된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즉시 입원실로 옮겨졌고 긴 시간을 요구하는 검사가 연속되었다.  

 

병원에서의 시간들은 그녀에게 마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오직 주님의 뜻만’을 찾게 된 것이다.  

병원에서 공동체 수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꼭 한 가지만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생활은 저에게 말할 수 없는 큰 희생이라는 것을.  

저에게는 매일 매일이 또 밤낮으로 저의 의지, 욕망, 갈망 그리고 제 안에 있는 모든 거룩한 것

또 불완전한 것들마저 포기하는 것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완전히 하느님의 뜻에 저를 내맡길 기회가 저에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이 십자가의 커다란 선물을 점점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대원장에게는 이렇게 쓰고 있다.

「무엇보다도 많은 생각, 고민들이 저를 괴롭힙니다.  저는 이것을 극복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주의를 기울여 보려고 열중하지만 역시 의심과 비난의 마음을 쉽게 털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고민과 의심, 두려움으로 인해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제 마음 안에 파헤쳐 놓은 상처처럼 아픕니다.」

 


5월3일 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것 같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의 유일한 위로는

 제가 고통으로 하느님의 뜻을 채워드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녀의 갈망은 너무도 커서

그것이 거의 순교와도 같은 고통을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가브리엘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마음 안의 죄로 인한 일치의 파괴, 자유의 손상을 체험해야만 했다.

 

그러나 심한 시련 속에서도 비관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을 과장시켜 부풀리는 것과는 거리?멀었다.  

가브리엘라 수녀가 그렇게 대담하게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한 후 그렇듯 두려워 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러하시지 않았던가?  

수난의 날, 파스카를 그렇게도 고대하셨으나

마침내 그 때가 왔을 때는 두려움과 떨림이 그분을 덮치지 않았던가?

 

「아빠 아버지, 저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이루소서」

 

가브리엘라 수녀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어떤 치료도 이제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어느날 가브리엘라 수녀는 교수님과 그녀의 치료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도원의 영적 지도 신부가 이 담화에 함께 하였다.  후에 이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정확한 논거와 증거로 일관되어 있어 나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학자는 결국 그녀가 병원을 떠나도 된다는 것을 허락하여 줄 수밖에 없었다.」

 

5월29일 그녀는 그롯타 페라타 트라피스트 수녀원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그녀를 포옹하려는 수녀들에게 웃으면서 거리를 두었다.  

그녀의 얼굴은 환히 빛나고 있었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삶, 수도원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조금 좋아지는 듯 했으나

다시 고열과 기침으로 심각한 상태가 되곤 하였다.  

그러나 수개월의 병상 생활 동안 유모어와 자상함을 잃지 않았으며

평범하고 단순한 수도원의 삶을 다시 한 번 의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제는 그 단순한 삶 안에서 일치를 위해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그 깊이에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하였다.  

자신의 삶을 “진리 안에서 성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았다.

 

이 젊은 환자가 해야만 할 그다지 즐겁지 않은 임무가 한 가지 남아있었으니

그것은 사르디나에 계신 어머니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리는 일이었다.  

결국 대원장이 먼저 알리고 어머니의 답장이 왔다.  

그 안에는 하느님께 맡기려는 어머니의 마음과 큰 아픔이 함께 실려 있었다.  

가브리엘라는 어머니가 자기를 이해하고 계심을 느꼈고 이제는 직접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마음놓고 울 수 있다는 것은 가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역시 우리는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눈물은 우리 마음을 가볍게 해줍니다.  

아픔의 첫 순간이 지나가면 모든 것을 예수 성심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받아 당신의 신적 사랑의 불로 살라버리십니다.  

저는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짓 희망으로 어머니를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

저는 어머니가 저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주님게 영광이 되는 것이 저에게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 주십사고

부탁드립니다.  

제가 주님의 사랑 때문에 고통받게 된 것을 큰 행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혼인 잔치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쁨은 더욱 더 큽니다.… 」

 

이 편지를 쓸 즈음에는 병세가 너무 악화되어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한 그녀의 편지에는 희망과 신뢰가 넘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은 아직 10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더 기다리게 하였으며 크나큰 용기를 가지고

더 많은 시련을 견뎌내야 했다.  

그녀의 마음에는 이 병을 통해 완전히 하느님께 맡기고자 하는

 갈망이 점점 더 커져가야 했다.  

 

8월이 되면서 가브리엘라 수녀의 건강은 좋아지기 시작했다.  

열도 내리고 기침도 줄었으며 식욕도 좋아졌다.  치유를 기대해도 될 것인가?  

하루는 대원장이 그녀에게 “당신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도록 기도할까요?”라는 제안을 하였다.  

가브리엘라는 이 말에 「어머니, 당신이 하신 일을 벌써 후회하고 계십니까?  

지금 우리는 성인들에게 저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서 짐을 꾸리도록 청해야 됩니다.  

저는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죽기를 더 원하는지 아니면 살기를 원하는지 조차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행하겠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위탁인가?

 

대원장은 매일 가브리엘라를 방문하여 그녀와 나눈 대화를 기록해두었으며

그롯타 페라타 수녀원과 친교를 맺고 있는

 영국의 성공회 나스돔 수도원에 보내는 편지에 이것을 적었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두 수도원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치 운동의 대화에 외면적으로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안에는 그리스도교가 다시 일치되어야 한다는

이 중요한 일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나스돔의 수도자들은 젊은 수녀의 봉헌을 알고 있었으며 이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 즈음 나스돔에서는 성공회 신학자와 예수회 회원들이 처음으로 공동모임을 가지고

그리스도교 일치에 관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1938년에 있었던 이 모임은 대담한 모험이었으며 이 첫 시도는

두 교회의 책임자들이 모임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나스돔 수도원의 형제인 옥스포드 대학의

사학자요 성공회의 박식한 신학자인 그레고리 딕스였다.  

이 성공회 수도자는 가브리엘라 수녀에게 예수 성심 상본을 보내면서 대원장에게 계속해서 그

녀의 소식을 전해달라는 것과 가브리엘라의 말을 자필로 써서 보내달라는 청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이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젊은 수녀는 그 그림을 감사히 받았다.  

그리고 감사의 답장은 원장에게 맡기며 자신은 묵묵히 침묵 속에 머물러 있었다.  

나스돔의 형제들이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을 때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전생애를 수많은 갈라진 형제들을 위해, 전인류를 위해 바치지 않았던가.  

성공회 형제들은 그것의 작은 상징인 것이다.  

8월 어느날 고열과 기침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그녀는 머리가 터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 아픔의 영향을 받아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하였다.

「예수, 나의 주님, 나의 형제, 나의 신랑이시여,당신께 청하오니

 나를 세상에서 봉헌되는 미사성제,

모든 잔, 모든 성체에서 당신의 합당한 봉헌물이 되게 하시고

존엄하신 분께 드리는 영광에 봉사할 수 있게하소서.  

예수 당신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나를 도우소서.  내 안에서 당신이 영광 받으시기를.」

가브리엘라는 어디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재자로서의 확실한 의식과

 인간 삶의 의미를 얻었을까?  

 

착한 목자 주일, 한 수녀의 임종이 다가왔다.  

이 날에는 모든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에서 요한 복음의 착한 목자 비유(요한10,1-18)가 낭독된다.  

뒤따르는 31절은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죽는다.”는 말씀이다.  

동료 수녀와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아주 새로운 뜻으로 전달되었다.  

저녁기도 후 수녀들이 임종자 주위에 기도하기 위해 모였을 때

임종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니라 대축일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군가 종을 잘못 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는 이것이 옳다, 잘 친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마땅히 축일 종소리가 울려야 한다고….

 

소식은 나스돔 수도원에도 전해졌다.  

대원장 동 베네딕도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이 희생과 봉헌을 통해 우리가 지고 있는 임무와 과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결국은 착한 목자이신 주님 자신이 이 일치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 」

 

수 개월 전 나스돔 수도원에서 가브리엘라 수녀에게 보낸 예수 성심 성화는

수녀의 싸인과 함께 그곳으로 도로 돌려보내졌다.  

그레고리 딕스 수도자는 그것을 받고 너무 기뻐서 이렇게 써보냈다.  

「저는 그녀가 제가 하는 모든 일에 함께하여 줄 것이며,

삼위일체의 일치에로 들어가는 것이 크리스챤 소명의 목적이기에

그녀와 함께 이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가 세상을 떠난 후

교회 일치를 위한 신자들의 열성은 한층 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 시기 프로테스탄트 교회와의 쇄신 운동과 함께

여기저기서 일치운동이 일어났으며 가톨릭교회 역시

자신들만의 유일주의를 넘어 참교회일치운동에 참가했다.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세계 기도주간은 어려움도 많았지만 1939년부터 계속 이어져왔다.  

1964년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지향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받아들여졌고,

이 문헌 안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일치를 위한 공동기도를 바칠 가치에 대해 언급하였다.  

어느 종파에 속하는 크리스챤의 기도기든 이 기도는 그리스도의 다음 기도에 동참하는 것이다.  

“아버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되게 하소서.”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침으로써 이 길에 앞장섰다.  

삼년 반이라는 짧은 수도생활 그리고 특별한 영성서적 한 권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녀는 일치 운동의 중심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참된 의미의 일치운동은 내적인 회심없이는 있을 수 없다.  

사실 새로운 마음, 자기 포기, 풍부하고도 아낌없는 사랑으로부터

 일치에로의 사랑이 싹트며 익어가는 것이다.(교회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교회일치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봉사자인 폴 쿠트리에 아빠스의

“가브리엘라 수녀의 삶과 죽음은 영적인 일치를 형성해 주었다.”라는 말은

기도와 자기포기, 이웃사랑으로 채워진 단순하고 평범한 삶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 것인지를 잘 가르쳐준다.

 

이 비상한 삶에 대한 놀라움과 경탄은 온 이태리와 사르디나를 감동시켰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수도성소를 느끼고 그롯타 페라타 수녀원을 찾았다.  

공동체는 이 많은 성소자를 다 받아들이기에 너무 작고 좁았다.  

그리하여 1957년 결국 일부 수녀들은 빅톨기아노로 가서

 60명 가량 수용할 수 있는 새수도원을 세우게 된다.  

이곳에서 1968년 피사 근처에 바르셀레나 수녀원, 1973년에는 아르헨티나에 세 번째 창립이

1981년에 칠레에 또 하나의 창립이 이루어졌다.  

1984년에는 인도네시아에 1994년에는 필리핀에 새로운 창립이 다시 이루어지게 되었다.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홈에서)-

 

 

 

시토(트라피스트)회

Ordo Cisterciensis Strictioris Observantiae (O.C.S.O)

 

역사

오랜 수도생활 역사 안에서 성 베네딕도라는 이름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베네딕도 이전에도 에집트 사막과 소아시아에는 엄격한 수도생활이 번성하고 있었으며

독수도생활과 공동생활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6세기 경 베네딕도는 이 두 흐름의 장단점을 식별하고 조화를 이루게 함으로써

교설과 실천이 통합된 균형있는 수도생활 형태를 확립하였다.  

그가 세운 수도원은 전쟁으로 인해 사라지지만 수도규칙은 계속 남아

성 베네딕도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 여러 수도회를 탄생시켰다.  

그는 수도생활의 영역을 넘어 유럽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리하여 그는

‘서방 수도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10세기 초 클루니 수도원은 이 베네딕도의 규칙을 바탕으로 확고한 수도회를 이루었으며

이는 전 유럽에 퍼졌다.  

그 후 11세기 초에 이러한 클루니적인 전통과 관습을 넘어

좀 더 원천에 다가가고자 하는 영적 쇄신 운동이 유럽에 있었다.  

이 쇄신 운동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룬 것이 시토회이다.  

 

시토회 세 창립자

 

시토의 창립자 성 로베르토, 성 알베리코, 성 스테파노 아빠스들과

초기 수도자들은 클루니와 다른 수도원들이 쌓아온 전통을 중요시하면서도

당시 클루니에서 소홀히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한

 여러 요소들을 되찾아 기도와 노동, 봉쇄와 세상과의 친교,

침묵과 공동생활,자유와 순종 등 조화시키기 어려울 것같은 요소들 사이의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것을 복음적 가치의 조화라 부를 수 있으며, 이러한 가치들 사이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공동체 안에는 기도와 관상 그리고 형제애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건강한 생명력을 지닌 시토회는

곧 전유럽에 퍼져 900군데의 수도원을 지닐만큼 발전하였으나 이후

초기의 아름다운 균형은 무너지고 세기를 걸쳐 긴 쇠퇴기 동안 끊임없는 쇄신의 노력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 쇄신 운동은 17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트라프 수도원의 드 랑세 아빠스를 중심으로 성공하게 되는데

이 트라프 수도원의 개혁에 따라 엄률시토회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 개혁의 정신을 받아들인

남녀 시토회 수도자들은 그 발상지인 트라프의 이름을 따 트라피스트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교회 이천년의 역사 안에는 언제나 쇄신운동이 있어왔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반성적 혹은 자기 발전적인 노력만은 아니며

성령의 역사하심에 인간이 응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 쇄신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고 있으며,

이 움직임에 맞춰 현재 전세계에 170여개의 남녀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시토회 역시

시대의 표징과 전통의 빛 안에서 성령의 일하심에 응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홈에서)-

 

 

 

시토회

라틴어 Ordo Cistereiensis

영어 Cistereians(O. Cist.)

 

1098년 프랑스 부르군드지방시토(Citeaux)에서

성 로베트트(St. Robertus de Molesme, ?∼1111)가 설립한 수도원에서 시작된 수도회,

회의 이름은 모원의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성 베르나르도(St. Bernardus de Clairvaux)의 기여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곧 서부유럽으로 확산되어 13세기 중엽에는 680여 개의 소속대수도원들이 있었다.

 

은수적(隱修的)인 수도외의 생활양식으로 교회, 제구(祭具), 제의(祭衣) 등이 매우 소박하며

성 베네딕토의 회칙을 기초로 한 규법을 준수하여 단식, 침묵, 단순노동 등이 매우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1119년 교황 갈리스도 2세에 의해 인간된 `사랑의 헌장’(Charta Caritatis)이 회헌이 되었으며

이런 시토의 규정들은 다른 중세수도원 들, 특히 의전수도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세기에 시토회에 각국가단위의 구심점들이 형성되자

시토에 있는 수도원은 국외 시토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엄격한 회칙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어

이것은 라 트라프 (La Trappe)의 수사들에 의해 실현되었다.

1902년 레오 13세 때 트라피스트회는 시토회에서 `엄률 시토회’로 분리하여 독립하였고,

이 전의 시토회는 `성 시토회’로 존속하였다

1898년 시토 대수도원이 복구되었을 때 엄률을 채택하였으며 로마에 거주하는 시토의 아빠스는

엄률시토회의 총장이 되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토마스 머튼

(1941년 트라피스트 수도원 입회.칠층산,명상의씨 저자)

 

트라피스트회

라틴어 Ordo, Cisterceinsium Reformatorum  

영어 Trappists

 

1098년 프랑스의 시토(Citeaux)에 세워진 수도회,즉 시토회 중 `엄률(嚴律) 시토회’의 주요 수도회.

1892년 시토수도원이 모원(母院)으로 회복될때까지 라 트라프(La Trappe)가 엄률 시토회의 중심지였다.

이 곳에 1664년 랑세(A. J. Le B. de Ranc )에 의해 개혁의 물결이 일게 되었으며

이 때 `트라피스트’란 이름이 생겨났다.

이는 이전의 시토회의 성격을 보유하면서 더욱 엄격성을 추가한 회였다.

트라피스트의 생활은 `기도와 참회, 침묵과 노동’으로 요약된다.

-(가톨릭대사전에서)-

 

 



 4월 22일
복자 프란치스코 파브리아노


Beato Francesco da Fabriano
Fabriano, 1251 - Fabriano, 22 aprile 1322

 

프란치스코 베님베네(Franciscus Venimbene,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파브리아노에서 의사인 부친 콤파뇨 베님베니와

 모친 마르가리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울기보다는

 웃는 아이로 자랐고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

 

불과 16세 때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지만 그의 성덕과 학덕은 남달리 뛰어났다.

 수련기를 마칠 즈음 그는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 전대사를 받으려고

아시시(Assisi)에 갔다가 레오 수사를 만났다.

프란치스코는 특히 책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도서실을 만든 첫 번째 프란치스코 회원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연옥 영혼들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졌고,

매우 정성스럽게 미사를 봉헌하는 분으로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가톨릭홈에서)-



간추린 프란치스칸 영성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 사도적 선교적 영성, 작음과 형제애

 

작음과 형제애
  프란치스꼬회의 공식명칭은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이다.

이 명칭은 바로 프란치스칸 영성을 요약해 주고 있다.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rnitas)를 바탕으로해서

 복음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 작음의 정신은 그 안에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형제들은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가난한 자가 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로부터 복음화되고 복음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처럼 일과 노동을 통해 땀흘려 일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며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처럼 하느님께 신뢰하며

 복음적 불안정의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일과 노동은 생계유지의 제일차적인 수단이며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며 그분이 보내주시는 은인들의

 애긍을 통해서 살아가게 된다.
  형제애의 정신은 사랑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프란치스꼬는 수도회 개념보다는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하였다.

우리 모두는 맏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이 형제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이다.

 

이러한 형제애는

가난 안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형제 상호간의 사랑과 애정어린 순종은 기쁨의 영성을

프란치스칸 영성의 특징적인 요소로 부각시켜 준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는 신분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로 확장된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크리스챤이든 이교도이든 원수이든 강도이든

성한 사람이든 병자들이든 모든 이가 한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더 나아가 프란치스꼬가 그랬듯이

이 형제애는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더 확장된다.

 바로 우주적인 형제애,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 형제애의 본질이다.
-(작은형제회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