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4월 24일 (일)
[백]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 사도 5,12-16
제2독서 묵시1,9-11ㄴ,12-13,17-19
복음 요한 20,19-31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통 거치시며
인내하고 순명해 부활하신 예수님
사랑 실천해 숭고한 의미 되살리길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할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그분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토마스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너무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 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를 안심시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적인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 매 순간이 부활일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인 예수님의 부활
의심 많은 토마스 사도의 회심,
믿음의 회복 스토리는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이자 지침 역할을 해왔습니다.
사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 세월 동안 그분과 동고동락해왔으며,
여러 차례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받았습니다.
그런 제자조차도 의심했던 것을 봐서,
초대교회의 수많은 그리스도 신자들도
부활에 대한 의혹이 컸던 것이 자명합니다.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기간 고민하고, 예비자 교리에 등록하고,
마침내 그리스도 신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한 신자들,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깊은 교우들에게, 부활 사건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는가 물었을 때,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사실 부활은
교회 수많은 축일 가운데
가장 등급이 높은 대축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활 없이 그리스도교는 없습니다.
부활 없이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부활 없이 구원도,
하느님 나라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토록 그분의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이자
진수가 되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신앙의 초석인
부활 사건 앞에 별 감흥이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라고 합니다.
부활 사건 앞에 밋밋한 사람들, 심드렁한 사람들,
대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타성에 빠진 신앙생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뼈를 깎는 쇄신 작업이 필요한데,
그러한 고통스런 과정을 외면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도 부활이란
당신 인생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이란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셔야 했습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십자가 길을 끝까지 인내하며
순명하며 걸어간 그 결과가 영광스런 부활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 없이 부활의 참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극복 없이 부활의 영광은 없습니다.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니
예수님 부활을 온몸으로 느끼고,
예수님 부활의 영광에 깊이 참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매일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기쁘게 참아내는 사람들,
자신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
시련이 다가올 때마다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을 따라 매사에 극도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분의 부활은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매일 죽는 사람들, 특히 자신의 죄에서 죽고, 이기심에서 죽고,
교만한 마음에서 죽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실 은총은 정말 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은
곧 예수님의 부활로 표현됩니다.
만일 그분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와 어둠 속에 잠겨 있을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그분의 부활로 죽을 운명,
필멸(必滅)의 존재인 우리 역시 불사불멸의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눈만 뜨면 감사드려야 하고,
백 번 천 번 감사드려야 할 은총의 대 사건이 바로 그분의 부활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주간 전례]
2022년 4월 25일 (월)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할 때 동행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도 12,25; 13,5.13; 15,37-39; 콜로 4,10 참조).
본디 이름이 ‘요한 마르코’(사도 12,12.25 참조)인 그는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도 일하였으며(1베드 5,13 참조),
주로 안티오키아와 키프로스,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기원후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고 난 뒤인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이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16,15-20ㄴ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에 마르코 복음의 특징에 관하여 묵상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처음부터 성자께서
‘하느님의 말씀’이시라고 선포합니다.
반면 마르코 복음은
그분의 신원이 서서히 밝혀지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복음서의 후반부 1/3가량을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관한 내용으로 채우기 때문에,
그 첫 번째 특징을 ‘십자가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서 초반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이 비밀에 부쳐져야 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워지실수록,
그분의 메시아 신분이 점차 공적으로 드러납니다.
베드로의 고백(마르 8,29 참조), 유다교 최고 의회 대사제 앞에서 응답(14,62 참조),
백인대장의 고백(15,39 참조)이 대표적입니다.
이 때문에 마르코 복음의 두 번째 특징은 ‘메시아 비밀’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세 번째 특징은 ‘제자들의 몰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만 알려 주시고,
구원의 때가 오지 않았기에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만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시고 특별한 교육까지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메시아 비밀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 복음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메시아 비밀 구도(예수님의 함구령과 제자들의 몰이해)에 따르면,
파스카 신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일상에서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할 때 파스카 신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26일 (화) [백]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3,7ㄱ.8-15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제1독서는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묘사합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한 사도들은 성령 강림을 계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공동체의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공동체 구성원은 실천적인 방식으로,
소유하고 있던 재산과 재물을 공유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만의 것으로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증언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사회 체제 또는 이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잘 증언하고자 공동체 구성원들이 복음 정신에 따라
공동 소유를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사이 니코데모의 대화가 소개됩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이나 지식만으로는 성령에 관하여 알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성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
곧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로소 성령에 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 안에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들이며 증언하는 것,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구체적인 방식으로 복음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27일 (수) [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3,16-2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에 따르면,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구원을 실현하시는 까닭은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구원은 성자를 믿는 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보통 신약 성경 본문들에서 하느님의 심판은
인류 역사의 끝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은 성자를 통한 성부의 계시를 인간이 거부할 때
이미 심판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합니다.
성자를 통한 성부의 계시는
악을 저지르는 자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성부에게서 온 빛이신 성자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갈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고 하시며,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한 복음에서 ‘진리를 실천하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다’와 동의어처럼 사용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계시를 믿고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28일 (목) [백] 부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3,31-36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오늘 말씀에서 ‘증인’, ‘증언’이라는 표현을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사도들이 대사제 앞에서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유다인들이 나무에 매달아 돌아가시게 한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성부께서 성자를 당신 오른편에 앉히시어,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해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사도들의 이 증언이 참되다는 것은,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요한 복음사가의
‘독립적인’ 묵상으로 여기는 것이 문맥상 설득력 있어 보이는데,
그는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께서 증언하신 내용은
성부에게서 직접 보고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이는 성부께서
참되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은 내재적 삼위일체론,
곧 세 위격이시나 한 실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내적 친교와 일치를 표현합니다.
성부께서 교회에 보내신 성령께서는 파스카 신비로 완성된 성부와
성자의 구원 업적에 대한 증인이십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며 교회 구성원인 우리도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29일 (금)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가타리나 성녀는 1380년에 선종하였고,
1461년에 시성되었으며,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복음묵상] 요한 6,1-15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한 파스카 신비를 어떻게 삶에서 실천할지 묵상해 봅니다.
제1독서는 율법 교사이며 바리사이였던
가말리엘이 최고 의회에서 발언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타르수스의 사울, 곧 바오로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성령 강림 뒤 사도들의 활동이 본격화되자,
유다교 지도자들은 술렁거리며 흔들립니다.
이런 배경에서 가말리엘이 연설을 합니다.
만일 사도들의 활동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그들을 없앨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연스럽게 흩어져 버릴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기존 종교 형식을 뛰어넘어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가능성을 열어 놓고
유연성을 갖춘 합리적이며 겸손한 태도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서들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는데,
주님의 갈릴래아 공생활의 정점이자 종결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부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라는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로마 제국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영광스럽게 되실
하느님의 종이시기에 군중의 기대에 곧바로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일상에서 위기와 어려움에 부딪히며 살다 보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메시아’ 또는 ‘하느님’의 모습에 사로잡혀,
자칫 모든 불행이 하루아침에 없어질듯이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에서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방법은
어쩌면 멀리 돌아가는 길,
곧 십자가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영광의 길일지도 모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30일 (토) [백]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6,16-2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때는 저녁입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과 동행하지 않으십니다.
그때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
저녁은 빛이 적은 시간으로
사탄이 활동하는 때를 상징합니다.
게다가 호수 가운데에 배를 띄웠는데 바람까지 불어
배 안으로 물이 들이칠지 모르는 매우 위급한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러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과 동행하자 어느새 목적지에 닿아 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주님께서 침묵하시는 듯한 순간,
그분께서 곁에 계시지 않는 듯한 순간을 맞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현존, 곧 그분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체험하는 순간
어두움 속 두려움은 사라지고 어느새 목적지에 이르러 있음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걷는 우리의 신앙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풍랑이 없는 고요한 길, 평안한 길, 꽃길만 걸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여정 가운데 풍랑을 만나더라도 목적지까지 닿을 수 있는 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며
그로써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김상우 바오로 신부)-
***********************************************************
요즘 철쭉, 진달래등이 활짝 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각 성당의 성상 주위를 수많은 꽃들이 이쁘게 장식을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쁜 꽃처럼 아름답게 꾸며봅니다.
-Berardus-
'▒▒ 영성♡공간 ▒▒ > ∞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5월 1일 (일) [백] 부활 제3주일 (0) | 2022.04.30 |
---|---|
[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 부활인의 행복, 놓치지 마세요 (0) | 2022.04.27 |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0) | 2022.04.21 |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4월 17일 (일) [백] 주님 부활 대축일 (0) | 2022.04.16 |
[말씀묵상] 주님 부활 대축일 / 살아계신 예수는 주님이시다 (0) | 2022.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