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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4월 17일 (일) [백] 주님 부활 대축일

Berardus 2022. 4. 16. 06:34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4월 17일

(일) [백] 주님 부활 대축일

 

제1독서 사도 10,34ㄱ.37ㄴ-43

제2독서 콜로 3,1-4

복음 요한 20,1-9


살아계신 예수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 아닌
오늘 우리에게 살아계신 분으로 체험돼야

우리 일상은 부활의 희망으로 의미를 얻고
죽음을 넘어서는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 체험하고 따랐던 제자들처럼
주님의 삶과 죽음의 방식을 기쁘게 따라가길



서른아홉 살 젊은 엄마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별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부부는 남아 있는 짧은 시간 동안

추억거리를 하나라도 더 만들겠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환자답지 않게 쾌활한 얼굴로 먹고 싶었던 음식을 사달라 해서 식당에 앉았는데,

속이야기를 꺼냅니다.

간간이 휴대용 호흡기를 찾으며 이어가는 말은,

죽음이 너무 두렵고 남편과 어린 딸을 남겨 두고 가는 길이

너무 불안하다는 것이었지요.

수많은 임종을 지켜본 사제로서 대답했습니다

. “자매님, 결코 마지막이 아닙니다.

엄마 뱃속의 태아는 자궁 밖으로 나가면 세상 끝나는 줄 알아도,

뱃속에서 나와 탯줄을 끊는 순간 또 다른 삶으로 나갑니다.

산모와 태아 사이에 본능적인 사랑과 애착이 있겠지만,

참사랑은 아기가 세상으로 나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함께 터득하고 완성시켜 가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도 그렇게 삶의 다음 단계,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이고,

그때는 더 이상 헤어짐도 아픔도 없을 겁니다.”

며칠 후에 젊은 아내요 엄마가

가족들과 아름답게 인사를 나누고 평안히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가 삶의 끈을

불시에 끊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합니다.

부활은 우리 일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 삶에 언제나 동반하는 것처럼,

부활의 희망도 우리 삶의 시간을 동반하면서

죽음을 넘어서는 위로와 격려를 부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부활을 경축하면서 우리 일상이

부활의 희망으로 의미를 얻게 된다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먼 옛날 일어났던

한 사건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사건의 과학적 증거를 찾기 위해서

여태 애쓰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도 간혹 사망진단을 받았다가

소생하는 경우가 생기는데(라자루스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복음서는 그런 식의 소생 소식을 전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서 찾은 것은

그분의 얼굴을 쌌던 수건과 아마포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과거에 한 번 있었던

시신의 변화 그 이상의 것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 체험은 주로 “예수님께서 살아계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다”라는 형태로 성경에 기록됩니다.

복음서를 포함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선

“예수님은 살아계시다”는 고백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첫째 독서는 다양한 부활체험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

예수님께서는 문이 닫힌 집에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요한 20,19),

엠마오로 가는 제자 둘에게 낯선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가

홀연히 사라지기도 하셨습니다.(루카 24,13-35)

마리아 막달레나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지요.(요한 20,14)

심지어 바오로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그분께서 승천하고 한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만지고

음식을 나눌 수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시는가 하면,

상상하기 힘든 환상 같은 형태로 오기도 하셨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언젠가 일어났던 신기한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

제자들의 삶 속에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살아계신 분으로 체험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본기도는

“오늘 외아드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주셨으니”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부활은 오늘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분이 주님이시라고 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에게 그분은

그저 신기하게 되살아나신 분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남달리 장수를 누리거나,

죽었다가 소생한 예가 없지 않습니다.

가까이 2014년에도 심폐소생술이 실패해서

영안실까지 내려갔다가 소생한 예가 부산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생한 이를 주님이라 모시고 섬긴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육신의 소생 이상을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사도 10,38)고,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사도 10,40)으며,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사도 10,42)하셨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고백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처형한 제국의 지배를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지배, 모든 권력보다 위에 계시며,

그분이야말로 이 세상을 주관하는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신”(사도 10,38) 예수님을 따라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체험하면서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그분의 삶과 죽음의 방식을 따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주님 외에 다른 어느 누구도,

어느 것도 앞세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그런 점에서 오늘 부활을 체험하고

기쁨을 온전히 누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의 주님,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땅에 매이지 않고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제자들에게 오늘은 정녕 기쁘고 또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부활축하 달걀



[한주간 전례]

2022년 4월 18일 (월) [백]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8,8-15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파스카 성야 미사를 시작으로 교회는

여드레 동안 주님 부활의 기쁨 속에서 축제를 지냅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묵상합니다.

복음에서 여인들이

그리스도의 빈 무덤을 찾아간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자,

그분께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고 전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마태 27,56 참조)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을 확인하려는 것보다,

그분에 대한 존경과 희망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이르시는데,

제자들을 가리켜 “형제들”이라 부르시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이 호칭은 마태오 복음 28장 10절과 요한 복음 20장 17절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관련해서만 사용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매수된 이야기를 덧붙여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는 유다인들이 퍼뜨렸을 거짓 소문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님의 시신을 훔쳤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마태오 복음사가가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관하여

누군가는 과학적 논거나 고고학적 증거를 요구하면서

고집스럽게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은 그저 과학적 접근의 대상도,

단순한 역사적 접근의 대상도 아닙니다.

구원의 진리는 오직 신앙의 눈을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19일 (화) [백]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20,11-18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최후의 만찬 장면을 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있음을 알고 계신 스승,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홀로 수난과

고통의 잔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그리스도,

인간적 번민과 두려움에도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잘 알고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스승님께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답하십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은 아무도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라고 서술합니다.

밤은 어둠으로 가득 찬 시간, 사탄이 일하는 시간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성자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전에 어둠과 사탄

,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비참한 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편 스승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베드로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감내하셔야 함을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알아뵙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에서 메시아의 비밀과 제자들의 몰이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는 데 필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20일 (수) [백]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24,13-35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클레오파스라는 제자와 다른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예

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순 스타디온은 약 11킬로미터로, 일반인이 한 시간에

3.5킬로미터가량 걷는다고 보면, 세 시간 남짓 걸어갈 거리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여정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와

그들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으시자,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여길 뿐,

메시아 또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고,

구약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십니다.

이어서 저녁때가 되자,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하룻밤을 묵으려고 집에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뒤

그것을 떼어 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시자,

그제야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된 파스카 신비는 미사 안에서 체험될 수 있는 신비입니다.

미사는 성경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말씀 전례와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누는 성찬 전례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21일 (목) [백]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24,35-48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돌아와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전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십니다.

슬픔과 절망, 좌절과 두려움의 심연 속에 빠져 있던 제자들은

여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손과 발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자국들을 만져 보게 하십니다.

이어서 구운 물고기를 잡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령도,

영혼의 환영도 아니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부활하신 당신의 몸은 누구나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그분께서는 몸소 음식까지 잡수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걸으시며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던 것처럼,

이제 다른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이로써 제자들은 스승님께서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습니다.

덧붙여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

생각과 말과 행위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22일 (금) [백]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21,1-14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요한 복음 21장 1-14절의 고기잡이 이야기는 루카 복음(5,1-11 참조)과

마태오 복음(4,18-22 참조)

그리고 마르코 복음(1,16-20 참조)의 고기잡이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고기잡이하던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부활하신 그분께서 고기잡이하던 제자들을 다시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밤새 그물질을 하였지만,

빈손인 채 날이 밝습니다.

피로와 절망에 빠져 있던 그들은

물가에 서 계신 부활하신 분을 보지만,

그분을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는 말씀대로 하자,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지경에 이릅니다.

이 대목에서 요한 복음서 저자는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라고 서술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파스카 신비를 겪은 제자들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활동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많은 고기’는 새 계약의 교회 공동체의 선교 활동을,

‘찢어지지 않은 그물’은 모든 민족들을 포함하는 인류를

이 공동체 안으로 모아들이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고기를 건져 올린 제자들은 뭍에 올라와 스승님과 아침 식사를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시어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십니다.

이 모습은 교회 공동체의 성찬례를 떠올리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는

이처럼 주님께 초대받았기에, 함께 둘러앉아

그분께서 주시는 양식을 나누는 거룩하고 복된 ‘밥상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23일 (토) [백]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6,9-15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

두 제자,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묶어 전합니다.

곧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복음은 앞선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의

복음을 간결하게 서술합니다. 한편 이 구절의 구성은 단순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함-목격 증인이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전함-

목격 증인들의 증언을 믿지 않음’이 반복됩니다.

첫 번째로, 예

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그분을 목격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두 제자가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 세 번째로, 열한 제자가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되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이들의 말을 믿지 않던 터였습니다.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함께 모여 있던 열한 제자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제자들이 불신과 깨달음을 반복하며 인간적 나약함을 보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어쩌면 이것은 교회 공동체 전체에게 부여된 사명일지 모릅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지닌 부족함과 모자람에도

이 구원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파스카 신비를

온 세상에 널리 선포해야 할 거룩한 사명을 지닙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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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축하드립니다.
40일동안 꾸준히 기도와 보속으로

코로나와 함께 하며
맞이하는 부활입니다.

기쁨과 슬픔
아픔과 즐거움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다시금 시작하는 마음으로 굳굳하게 견디어 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