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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5월 1일 (일) [백] 부활 제3주일

Berardus 2022. 4. 30. 05:21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5월 1일 (일) [백]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사도 5,27-32,40-41

제2독서 묵시 5,11-14 

복음 요한 21,1-19


부활인의 행복, 놓치지 마세요

부활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아픔과 고통 극복해야 가능한 것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 의미 깨닫고
주님 마음 헤아려 기쁜 삶 살아가길



오늘 요한 사도는 그날 제자들의 명단에서

두 명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함으로 우리 모두를 그 자리에 초대합니다.

주님 곁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제자들의 겸연쩍었던 마음이 눈에 선하고

손수 음식을 건네주시는 주님의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요한 사도의 이야기가 무척 포근한데요.

티베리아스 호숫가를 비추던 아침햇살, 그날의 햇빛도 1억5000만 킬로미터를 내달려

그 소박한 해변의 식탁을 비추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를 비추고 있는 눈 시린 봄볕에도 주님의 사랑이 묻어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꽤 오래, 그날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분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껏 옛 삶으로 회귀하는 못난 모습이 딱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들의 마음을 전폭적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는 주님을 향한 그리움은 ‘딴짓’에라도

몰두해야만 견뎌낼 수가 있었을 것이라 싶은 연민이 고입니다

.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본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탓이라 싶고

이제 더는 주님과 함께할 수 없다는 ‘별리’의 괴리감이

그들의 마음을 허하게 했을 것이라고 편을 들게 됩니다.

때문에 베드로가 불쑥 “고기 잡으러 가네”라며

딴청을 부린 것도 가라앉아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던 의도라 짐작합니다.

서로서로 아리고 쓰린 속을 감춘 채로 ‘괜찮은 양’ 아무렇지도 ‘않은 양’

허세를 부리던 중이었기에 모두가 주저하지 않고 베드로를 따라나서며

고기잡이에 동행했을 것이라 이해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 마음에는

신학생 시절에 들었던 강론이 맴을 돕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거푸 똑같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이유는

바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배신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오래 마음에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그 강론을 들었을 때, 덜컥 마음이 내려앉던 기억도 생생한데요.

세상살이를 고작 스무 해에도 미치지 못했던 그때, 이미 세 번이 아니라 서른 번도 더,

서른 번이 아니라 삼백 번도 더, 주님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마음을 앓았습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셨을지 꼽으며

진심으로 영혼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주님의 질문에 과연 무엇이라고

답을 드릴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떳떳하고 진솔하게

사랑을 고백해 드린 적이 도대체 있기나 한지를 돌아보며

스스로의 허물에 진저리가 났습니다.

얼마나 많이 주님의 호소를 외면했는지,

딴전을 피우며 무시하고 모른 척했는지… 울음이 터질 것도 같았습니다.

어쩌면 ‘믿음의 순수’일 듯도 하고

아직 삶의 때가 덜 묻었던 덕일 듯도 하지만

그 무거움과 자책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선물은 아니라는 걸

여러 해를 지내서야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오늘 주님의 물음은

우리를 매우 곤란하게 합니다.

차라리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코린토1서 13장에의

정확한 답을 베껴서 백 점을 맞을 것도 같은데,

굳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거푸 하시니

“뻔히 아시면서 무엇이 더 궁금하시냐?”고 되물을 것도 같습니다.

다 아시면서 “왜 자꾸만 물으시냐?”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을 것도 같고

뚱한 표정으로 주님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방법을 깨우친 믿음인이기에 주님의 질문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 수월하고 편안한 안락을 추구하는

부활이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로 나아가는 길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놓여있으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나아가는 일만이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친 진리의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고난 없이 부활로 건너뛸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으며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상태로는 결코 부활의 열매만 달랑

딸 수가 없다는 걸 입으로 달달달 외울 수 있고

머릿속에 좌르르 꿰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사랑도 용서도 화해도

성경을 통해서 정답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로 표현하며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일에 머물러 지난 허물을 탓하며 우울해합니다.

주님 앞에서 쩔쩔매는 것이 참회의 삶인 양 오해합니다.

정녕 주님께서 통탄하실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모두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지은 어떤 죄도 깡그리 없애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 모든 사람이 항상 기쁘고

늘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좋은 축복,

귀하고 복되며 고귀한 은총을 빠짐없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인 까닭입니다.

하여 오늘도 그날의 제자들처럼

그분의 뜻과 동떨어져서 딴짓에 몰두하며 ‘헛수고’를 하는 우리 이름을 간절히 부르십니다.

부디 이제부터는 다시, 또, 새로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속내를 헤아려 드리면 좋겠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이런 뜻이 담겨있다고 믿습니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이사 43,4)

아멘.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전북 화산소재 되재성당 성모자상


[한주간 전례]

2022년 5월 2일 (월)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95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타나시오 성인은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석하였으며,

328년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성인은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을 벌이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특별히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6,22-29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군중이 요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고 일러줍니다.

세리와 군인들도 요한에게 다가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그들에게도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0-14).

이런 요한의 답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구원에 이르는 길은 어려운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며,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요한과는 전혀 다른 답변을 건네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의 답변처럼, 착하고 바른 일,

곧 선행과 자선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공동체를 선행과

자선의 공동체로 이해하고 계신 분들을 때때로 봅니다.

물론 선행과 자선이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외적 활동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인간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역사적 인물이었던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믿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믿는 것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에 관한 그 믿음이 여러분 안에 얼마나,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3일 (화)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필립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로 짐작되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와 사도가 되게 하였다(요한 1,43-51 참조).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이 있는데,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작은 야고보’라 불리기도 하며

신약 성경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는 야고보(마태 13,55 참조)와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복음묵상] 요한 14,6-14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만나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 또는 교의 신학적으로 그 의문들에 대한 정답을 이미 알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에 생긴 의구심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저는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덕에 태어난 지 단 이틀 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뒤 신자로, 신학생으로, 사제로 살아온 것이 제 인생입니다.

그렇게 신앙인으로 살아오면서 늘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온전히는 따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기만 하면 당신께서 하신 것보다

훨씬 큰 일도 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니, 이 말씀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의 생애를 복음과 연결하여 묵상하다가

이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분노에 찬 이교인들에게 몽둥이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필립보 사도도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것도 모자라 그 상태로 다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모진 수난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복음 말씀대로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힘에 온전히 의탁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아니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두 성인의 삶과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또 그분의 힘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4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6,35-4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는 스테파노의 순교와 함께

초대 교회에 닥친 위기 상황을 전하며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독서의 중간과 마지막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큰 위기와 어려움에 직면해 있던 교회 공동체가

그 위기를 또 다른 기회로 삼아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 말씀을 듣게 된 고을들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과

그분을 통하여 이루어질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이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시련과 위기 속에서 또 다른 기회와 희망을 찾아 나가고 있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 땅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오늘의 복음 말씀과 무척이나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걱정거리와 고민들,

때로는 삶을 흔들어 대는 문제와 어려움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고통과 시련들은 어쩌면 그

것을 통하여 참된 것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인지도 모릅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지혜를 청하고,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주어지고 있음을 굳게 믿으며,

우리 삶의 아픔과 고통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깊이 느낄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5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6,44-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다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어디를 가든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 같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또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신학교에 들어온 신학생들

또한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로 고민하고 힘들어합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형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급기야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사제가 되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라며 불평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일선 본당에서도 이와 비슷한 불평과 험담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성당에 나오는 거야?”

“저 사람이 어떻게 성체를 모실 수 있지?”

오늘 제1독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준 사건을 전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린 다른 사람에 대한 불평을

여기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이방인에게,

그것도 이방인 여왕을 섬기는 내시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 본문은 그 내시가 하느님을 경배하던 사람이었으며,

그에게 베풀어진 세례가 바로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이 말씀을 거꾸로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교회 공동체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이끄심을 받

은 이들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결코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래서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몸소 선택하신 이들입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6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6,52-59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이번 한 주 동안 우리는

‘생명의 빵’에 대한 복음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8-58).

그런데 누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셨으며

또 그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 나눈 제자들이었을까요?

실제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몸소 당신의 몸과 피라고 말씀하신 빵과 포도주를 직접 먹고

마신 제자들이야말로 분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례를 미사에서 재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십니다.

그러나 미사에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흔히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생명의 빵’에 대하여 우리에게 전하는 요한 복음의 또 다른 부분은

영원한 생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요한의 첫째 서간도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게

‘하느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1요한 2,24-25 참조).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이 끝나는 오늘,

예수님의 살과 피로 얻게 될 그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7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6,60ㄴ-69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리따와

야포라는 도시에서 베드로가 일으킨 두 가지 기적을 들려줍니다.

리따에서 중풍에 걸려 팔 년 동안 침상에 누워 있던 애네아스를 고쳐 준 것과

야포에서 선행과 자선을 많이 베풀고 세상을 떠난 도르카스를 다시 살려낸 것입니다

.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베드로의 기적을 통하여 그곳에 사는 많은 이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은

단순히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주님께 돌아섰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맥상

‘믿는다’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지만,

여기에서 사용된 그리스 말 동사는 분명히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동사가 ‘믿다’ 또는 ‘회개하다’라는 행위의 결론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참조: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사도 3,19; 26,20];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사도 11,21]). 게다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신들의 복음 선포 활동의 목적이 바로 사람들을 ‘돌아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 14,15).

그런데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하고

이미 그분께 돌아섰던 많은 이가 오늘 복음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 주님에게서 떠납니다.

그분의 말씀이 듣기에 거북하고,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믿고 회개한 것처럼 살아가지만,

그 믿음이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거나,

그 믿음 때문에 자신이 희생해야 한다고 여겨질 때

우리가 보이는 행동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던가요?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가슴에 새기며, 단순히 머리로 믿는 것을 뛰어넘어,

온 마음과 온몸으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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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성월

5월이 되면
각 성당에서는 매일 성모상앞에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비록 성모상앞에서는 바치지 못하지만
삶의 자리에서 함께 하며
모두의 바람이 성모님의 전구로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