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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4월 10일 (일) [홍] 주님 수난 성지주일

Berardus 2022. 4. 9. 06:21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4월 10일 (일)

[홍] 주님 수난 성지주일

제1독서 이사 50,4-7

제2독서 필리 2,6-11

복음 루카 22,14-23,56


주님의 은총에 온전히 기대어 살고 있습니다.

‘섬기는 왕’이 되고자 하신 예수님
사랑과 기도로 주님 은총 청하며
자신의 힘과 의지는 내려놓은 채
겸손하게 예수님의 길 따라가길



예수님과 함께 걷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 모습은 왕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뤄짐을 보게 합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깔고 환호하며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환호하는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거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제자들의 생각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 되고자 하셨고,

세상의 임금이 아니라 모든 것의 왕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걷고자 하십니다.

그 모습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이 말씀대로 내 생각과 다른 그분의 생각,

내가 가고자 하는 길과는 다른 그분의 길을 저는 살면서 자주 만납니다.

예전에 섬으로 발령 받았을 때

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걱정을 했었습니다.

도시에서 할 일이 더 많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섬에 살아 보니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배우는 것도 많았습니다.

신자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신자 한 분 한 분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도 배웠고,

환대하고 경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습니다.

또 농사도 지어 보고, 바다에도 나가서 여러 가지 일들을 체험하면서,

새로운 것들이 참 좋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3년쯤 됐을 때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마냥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지만,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주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의 영화에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습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은 로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가 로마에 갔던 이유는 예수회에 지원해서 인도로 선교를 가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원 제한이 있어서 대기하고 있었고,

그 시간 동안 로마 근교의 버려지고 방치된 아이들을 봅니다.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어 돌보기 시작했고,

그 일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성인은 자신의 생각과는 달랐지만,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 지내며,

다른 길을 받아들이고 그 길 안에서 보람을 찾습니다.

내 생각과는 다른 하느님의 생각 앞에서,

내 고집과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분과 함께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걷기 위해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 전에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잡히시고 끌려가시게 됐을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걷지 못했던 걸까요?

아마도 다음의 두 가지가 부족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먼저 ‘사랑’이 부족해서입니다.

부족하다는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니죠.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과 함께 전도 여행을 다녔을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더 크고 충만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은 가장 큰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기도’가 부족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괴로워하시며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에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는 피곤하여 잠이 들어 버리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일어나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였던 예수님은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지만,

기도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립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부족함이 우리의 부족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성령님의 도움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사랑과 기도가 부족했지만 주님을 부르고,

또 그분의 은총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풍랑을 보고 두려워 물에 빠졌을 때에

주님께 구해 달라고 소리칩니다.

또 예수님을 결코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세 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은총에 기대어 으뜸 제자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거듭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내 의지로 이룰 수 있다는 교만함에서

주님의 은총을 청하는 겸손함으로 정화됐으리라 생각합니다.

러시아에 붙잡혔던 예수회의 월터 J. 취제크 신부님도

취조 과정에서 자기 의지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다가 큰 좌절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내 의지로 할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내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고 의지하게 됐을 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죽음을 대하고 취조관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취조관과 대결하는 나가 아니라,

하느님과 대면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자 했는지,

그분의 은총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내 의지가 그동안 많은 일을 이루게 해 주었지만,

그분의 길을 끝까지 걷기 위해서는 내 힘과 의지가 아니라

주님께 온전히 맡기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따라 나서는 그 길에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그분께 맡기는 마음으로’ 정화하고자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마음이어야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길가의 개나리꽃



[한주간 전례]

2022년 4월 11일 (월) [자] 성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2,1-11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하나의 장례처럼 여기는 상징적인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향유를 붓는 행위는

장례 의식의 일부로 여겨졌습니다(마태 26,12; 마르 14,8; 요한 12,7 참조).

고대 유다교 전통에서도 장례는 당시 유다인들과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권장되었던 선행 가운데 하나였습니다(토빗 1,17-18; 사도 9,36-37 참조).

후대 유다교 라삐들에게 장례는 단순한 자선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빈부 격차에 상관없이 산 이들과 죽은 이들 모두에게

베풀 수 있는 선행으로 이해되었습니다(마태 25,35-45; 마르 15,42-47; 사도 8,2 참조).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묵상합니다.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 한 리트라,

곧 320그램 정도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예언적 행위이며,

그분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선행을 상징합니다.

마리아의 이 선행은 예수님께서 늘 제자들과 ‘물리적으로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종말론적 행위를 의미합니다(마태 26,11; 마르 14,7; 요한 12,8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유다,

예수님께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를

하나의 ‘표징’으로 확인하려고 몰려든 유다인들,

그리고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그분과 함께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하는 수석 사제들이 있습니다.

성주간 월요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 가운데 누구에 가깝습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12일 (화) [자] 성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3,21ㄴ-33.36-38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오늘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최후의 만찬 장면을 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있음을 알고 계신 스승,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홀로 수난과

고통의 잔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그리스도,

인간적 번민과 두려움에도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잘 알고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스승님께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답하십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은

아무도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라고 서술합니다.

밤은 어둠으로 가득 찬 시간, 사탄이 일하는 시간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성자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전에 어둠과 사탄,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비참한 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편 스승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베드로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감내하셔야 함을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알아뵙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에서 메시아의 비밀과 제자들의 몰이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는 데 필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13일 (수) [자] 성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6,14-25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오늘은 마태오 복음에 따른 최후의 만찬 장면을 읽습니다.

첫 장면은 유다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주면

무엇을 해 줄지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줍니다.

구약 성경의 배경에서 ‘은돈 서른 닢’은 율법에 따른 액수입니다.

탈출기 21장 32절에 “소가 남의 남종이나 여종을 받았으면,

그 주인에게 은 서른 세켈을 갚아야 하고,

소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즈카르야 11장 12절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값어치로서 은 서른 세켈이 은유적으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구약의 예언이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한편 무교절 첫날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스카 음식을 차릴 장소를 묻습니다.

여기서 무교절 첫날은 파스카 양을 잡고

집 안의 누룩을 모두 치우는 날로 여겨집니다.

무교절은 파스카 준비일인 니산 달

(오늘날의 4월) 열나흗째 날을 포함하여 여드레 동안 계속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전하라 명하십니다.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여기서 “나의 때”라고 옮긴 그리스 말 표현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며 완성되는 시간,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영광을 받으실 구원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끝으로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유다는

예수님을 향하여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스승’이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을 향한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되는데(23,7.8; 26,49 참조),

복음서 저자는 이를 통하여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을 미리 전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14일 (목) [자] 성주간 목요일 - 성유 축성 미사

오늘 아침, 주교는 자기 사제단과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일치와 친교를 드러내며, 한 해 동안 사용할 성유들을 축복하고 축성한다.
또한 미사 중에 사제들은 자신의 직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도록 수품 때 한 서약을 공적으로 새롭게 한다.
교구 내의 사목자들은 성유를 받아가 일 년 동안 성사

(세례, 견진, 병자, 성품)를 집전할 때 사용한다. 이로써 성사 집전에서 교구 전체의 연대성이 드러난다.

[복음묵상] 루카 4,16-2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성주간 목요일에 봉헌되는 ‘성유 축성 미사’는

예수 성심 대축일 미사, 서품 미사와 더불어 사제단의 일치와 연대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미사입니다.

특별히 이 미사에서 사제단은 주교와 함께 사제들의 서약 갱신식뿐만 아니라

, 병자 성유 축복, 예비 신자 성유 축복, 축성 성유 축성 예식을 거행합니다.

세례성사로 예비 신자는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견진성사를 통하여 신자는 성령 안에서 필요한 은총을 받고

신앙의 성숙으로 나아갈 힘과 양분을 얻습니다.

성품성사로 성직 지망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제로 축성됩니다.

그러므로 사제는 개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결합하고 사제단 안에서 일치를 이루도록 끊임없이 초대받습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과 해방의 메시지가 다음과 같이 선포됩니다.

“너희는 ‘주님의 사제들’이라 불리고,

‘우리 하느님의 시종들’이라 일컬어지리라.”

한편 제2독서에서는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과 같은 내용을 듣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읽으신 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맡기신

거룩한 사제직이 사제들의 인간적 부족함과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잘 보존되며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기도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15일 (금) [홍] 주님 수난 성금요일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오랜 전통에 따라 성찬 전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로 이어지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한다.
본디 이날의 전례는 말씀 전례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이 들어와 오늘날과 같은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
오늘은 금육과 단식을 함께 지킨다.


[복음묵상] 요한 18,1―19,4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주님 수난 예식은 매우 간소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수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되새겨 보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수난 예식의 건조함은 교회 공동체가

다 같이 그리스도의 고통 속에 잠기게 합니다.

주님 수난 예식의 허전함은 교회 공동체가 다 함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도록 초대합니다.

주님 수난 예식의 고요함은 교회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간절히 희망하게 합니다.

이 같은 분위기를 위하여 말씀 전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를 묵상합니다.

제1독서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입니다

.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제2독서는 자비로운 대사제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한편 요한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수난기는 그 자체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매우 풍성하고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하며 구원해 주셨다는 의미,

그리고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 되어 주셨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16일 (토) [백]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파스카 성야의 모든 예식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거룩한 밤을 기념하여

교회 전례에서 가장 성대하게 거행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날을 기념한다.

따라서 교회는 장엄한 전례로, 죽음을 이기시고

참된 승리와 해방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한다.

파스카 성야 미사는 죄의 노예살이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어둠이 덮인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시어,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뻐하는 미사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 미사는 빛의 예식, 말씀 전례, 세례 전례, 성찬 전례로 구성됩니다.

빛의 예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그 밤을 기억하며,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다짐을 표현하고자 사제가 축복한 파스카 초에서 불을 댕겨 교우들의 초에 옮깁니다.

말씀 전례에서는 어떻게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구약의 백성을 선택하셨으며,

마침내 어떻게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신약의 백성과 인류에게

보편적 구원을 완성하셨는지 들려줍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일곱,

곧 창세기 2개, 탈출기 1개, 이사야서 2개, 바룩서 1개, 에제키엘서 1개의 독서를,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둘, 곧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파스카 성야에 이처럼 길게 성경 말씀을 듣는 이유는

이 미사의 기본이 하느님 말씀의 봉독이며 경청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전례는 강론 뒤 이어지는데,

세례 받을 예비 신자가 있으면 이때 세례성사를 거행합니다.

그리고 성야 미사에 참석한 모든 교우는 세례 서약을 갱신합니다.

끝으로, 성찬 전례를 거행합니다.

모든 이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에

다시 한번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성주간 전례 가운데 성삼일 전례, 그 가운데에서도 파스카 성야 미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이며 본질이고 정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묵상] 루카 24,1-12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파스카 성야 미사는 죄의 노예살이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어둠이 덮인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시어,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뻐하는 미사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 미사는 빛의 예식, 말씀 전례, 세례 전례, 성찬 전례로 구성됩니다.

빛의 예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그 밤을 기억하며,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다짐을 표현하고자 사제가 축복한 파스카 초에서 불을 댕겨 교우들의 초에 옮깁니다.

말씀 전례에서는 어떻게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구약의 백성을 선택하셨으며,

마침내 어떻게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신약의 백성과 인류에게

보편적 구원을 완성하셨는지 들려줍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일곱, 곧 창세기 2개, 탈출기 1개, 이사야서 2개, 바룩서 1개,

에제키엘서 1개의 독서를,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둘,

곧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파스카 성야에 이처럼 길게 성경 말씀을 듣는 이유는

이 미사의 기본이 하느님 말씀의 봉독이며 경청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전례는 강론 뒤 이어지는데,

세례 받을 예비 신자가 있으면 이때 세례성사를 거행합니다.

그리고 성야 미사에 참석한 모든 교우는 세례 서약을 갱신합니다.

끝으로, 성찬 전례를 거행합니다.

모든 이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에

다시 한번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성주간 전례 가운데 성삼일 전례, 그 가운데에서도 파스카 성야 미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이며 본질이고 정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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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듯한 꽃들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채워주시는 주님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꿋꿋하게 견디어 냅니다.
모두에게 희망이 가득한 주님의 부활이 되길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