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성 가시미로
San Casimiro
St. Casimirus, C
St. CASIMIR of Poland
3 October 1458 -
4 March 1484 at Grondo, Lithuania of tuberculosis
Casimiro = che vuole la pace, dal polacco
1458년 폴란드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스도인의 덕행 특히 정결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비심을 탁월히 닦았다.
신앙의 옹호자로 성체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공경심에서 뛰어났다.
1484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동 시대의 사람이 쓴 성 가시미로의 전기에서
(Cap. 2-3: Acta Sanctorum Martii 1,347-348)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명령대로 재물을 사용하였다.
가시미로는 성령 안에서 놀랍고도 거짓 없는 불타는 사랑으로 전능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 사랑은 그의 마음에 속속들이 퍼지고 넘쳐흘러 저절로 이웃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겐 그리스도의 가난한 이들과 순례자, 병자, 포로, 그리고 근심 중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어 버리고 자기 자신마저 송두리째 바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었고,
그 일보다 더 원하는 것이 없었다.
가시미로는 과부나 고아와 억압당하는 이들에게 보호자요 변호자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요 아들이요 형제였다.
그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넘쳐 행한 모든 일에 관해 일일이 이야기하여 한다면
하나의 큰 책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정의에 대한 그의 사랑과 절제, 그가 지닌 슬기와 용기, 인내와 항구심을 다 말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그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자유분방한 나이에
이와 같은 탁월한 덕을 지니고 있었다.
가시미로는 국왕인 자기 아버지에게 왕국과 속령의 국민들을 다스림에 있어
정의를 실천하도록 매일같이 간곡히 청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부주의나 인간의 약점 때문에 어떤 국사를 소홀히 다룰 때
그는 빠짐없이 아버지께 그 사실을 겸손히 지적해 주었다.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의 문제와 청원을 마치 자기일인 듯 받아 주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가난한 이의 옹호자"라고 불렀다.
자신은 왕자이고 귀족의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건 하찮은 사람이건 관계없이
어떤 사람이라도 대하고 말하는 데에 있어 아무런 어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나 권력자보다는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인 온유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언제나 더 좋아했다.
그는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누리는 권력을 결코 구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주려고 하는 왕권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라고 부르셨던 재물로 인해 영혼이 해를 입고
세속 사물의 오염으로 인해 부패되는 것을 염려했다.
집안 사람들과 그를 잘 알고 있었고 아직도 생존해 있는 위대한 많은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일생을 동정으로 살다가 동정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가톨릭홈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 성인인 카시미로는
폴란드 왕가에서 13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난 왕위 계승자였으나
그의 스승인 요한 들루고시의 가르침과 덕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카시미로는 이미 십대 소년이었을 때부터 엄격하고 철저한 규칙 생활을 하여 맨바닥에서 자고,
대부분의 밤시간을 기도로 보내 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자신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헝가리의 귀족들은 그들의 왕과 불목하게 되자 카시미로의 아버지인 폴란드의 왕을 설득하여
그 아들을 보내어 헝가리를 점령하려 했다.
카시미로는 수세기 동안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정부에 순종했던 것처럼 그의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그가 지휘하기로 된 군대는 적군보다 확실히 수적으로 우세했다. 그
러나 그 부대의 일부가 보수를 받지 못하자 이탈하고 말았다.
카시미로는 자기 참모들의 충고를 듣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분노하여, 15세의 카시미로를 3개월 동안 감금했다.
나이 어린 카시미로는 그의 생전에 다시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는 기도와 공부에 전념했으며, 독일 황제의 딸과 결혼하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독신을 지키기로 한 자신의 결심을 끝까지 지켰다.
그는 아버지의 부재중에 잠깐 동안 폴란드의 왕으로서 통치했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서 자기가 맡고 있는 리투아니아를 방문하던 중
25세에 페질환으로 사망하여 리투아니아의 빌나에 묻혔다.
폴란드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은 갖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굳건히 머물러 있었다.
그들의 젊은 수호 성인이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것이었다. 평화는 전쟁으로 얻을 수 없다.
때로는 덕으로도 안락한 평화를 얻을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평화는 철의 장막까지도 꿰뚫고 들어간다.
카시미로는 성모 마리아께 대한 지극한 사랑을 지녔다.
특별히 그는 라틴어로 된 마리아의 찬미가 "Omni die dic Mariae - 의역하자면
"매일매일 마리아를 노래하나이다."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그는 이 노래의 사본을 자기와 함께 묻어 줄 것을 부탁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458년 위대한 폴란드 국왕의 왕자로 태어나 동정의 뜻을 두고
죽을때까지 충실히 이를 지킨 성 가시미로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의 국왕 가시미로 4세이고
어머니는 독일의 엠페롤 2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사벳이었다.
그녀는 신심이 매우 두터운 부인으로서 자녀들의 교육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한 공경심을 갖게 했다.
가시미로도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으며
특별히 성모님께 대한 존경과 정결의 신성함을 마음속 깊이 간직했다.
6세때부터는 유명한 사제 아래에서 여러 학문, 특히 종교에 대해 잘 배웠다.
1471년 그의 형이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을 때
이웃 나라 헝가리 백성들도 전부터 국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를 폐위하고 폴란드의 한 왕자를 받들려고 했다.
그러므로 폴란드 왕은 가시미로를 파견하기로 했는데, 그때 그는 겨우 23세 였다.
젊어서도 총명했던 그는 마음속 어딘가 불안감이 없지 않았으나
평소 해왔던 대로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해 80명의 군인을 이끌고 헝가리로 향했다.
그러나 국경에는 어느 누구 맞으러 나온 사람이 없었다.
코르비누스 왕이 자기의 폐위를 원하는 반대자들과 화해하고 가시미로 왕자의 일행을
물리치기 위해 대군을 보내려고 한 때였기 때문이다.
왕자는 나이 든 신하의 권고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자는 점잖게 귀국했지만 부왕은 적과의 대결을 하지 않은 아들에게 대단한 불만을 품고
서울에 들어오지 말고 도부스기이 성에 있을 것을 명했다.
가시미로는 오히려 이 시기를 기도와 선행의 기회로 삼아 엄격한 고행을 하며
거칠고 누추한 의복을 입고 밤에는 마루 위에서 잤다.
특별히 가끔씩은 주님의 수난과 성체께 대한 묵상을 했다.
그는 종종 자정에 일어나 성체 조배를 했다.
성당 문이 이미 잠겨 있으면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오랜 시간 기도했다.
아침에는 반드시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를 했다.
그는 침묵을 가장 즐기면서 또한 가난한 자나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즐겼다.
스스로 고아나 과부나 학대받고 있는 자들을 도울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그들의 구제에 대해 간청했다.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모든 백성에게
-가장 가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공평한 정의를 베풀기를 충고한 때도 있었다.
가시미로는 성모 마리아를 공경한 나머지 라틴어로 찬미가를 지어 매일 읊으면서 /P>
자기가 죽으면 자기 관 속에 이 찬미가를 적어 넣어 주기를 부탁했다.
이것은 여러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오늘날까지 성모님을 찬미하기 위해 읊어지고 있다.
그 찬미가의 시초는 "하늘의 모후의 찬미가는 매일 읊어질 지어다!"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를 공경해 드린 그는 정결의 덕을 존중시하여
그를 파괴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내던지려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던 것도 의심할 바가 아니다.
가시미로는 29세 때 의술로도 고칠 수 없는 중별에 걸렸다.
의사들은 어리석게도 왕자가 동정을 파괴하면 병세가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고 그 뜻을 그에게 전하니
그는 몹시 화가 나서 "내가 존중하는 것은 주 예수뿐이지 내 생명이 아니다.
나에게는 이 이상 현세에는 아무 희망도 없다.
너희는 그와 같은 주님의 뜻에 위반되는 일을 말한 죄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책망했다.
그 후 점차 병세는 위독해져 경건한 마음으로 병자 성사를 받고
잠시도 십자가를 손에서 떼지 않은 채 끊임없이
"아! 주님! 제 영혼은 당신 손에 맡깁니다"하고 기도하며 이 세상을 떠났다.
때는 1484년 3월 4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살아서부터 폴란드 백성의 존경을 받았지만,
사후에는 한층 더 공경을 받아 그의 전구를 구하는 자가 아주 많았다.
그 결과 무수한 기적이 나타났는데, 그중 한 예를 든다면,
1518년 폴란드가 6만의 적군의 공격을 받아 바야흐로 패망이 결정적이었을 때
백은(白銀)의 갑주(甲胄)를 차리고 백마를 탄 한 기사(騎士)가 나타나
겨우 2천명의 폴란드 군인을 지휘하며 의기 양양한 적군에 쳐들어가 순식간에 정세를 회복하고
대승리를 거두고 나라를 태산 위에 안정시켰는데,이것도 천국에 있는 가시미로의 원조임을 알고
그의 형 시기스문도 왕은 동생의 열성 조사를 교황청에 신쳥했다.
그 후 엄밀한 조사 결과 교황 레오10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리고 그의 무덤을 열어보니
밤색의 머리털, 생생한 얼굴은 옛 모양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마치 잠든 자와 같았다고 한다.
아마 그의 탁월한 정결의 덕이 이 기적을 일으키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에는 종이 한장이 쥐어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하늘의 모후의 찬미가는 매일 읊어질지어다!"라는 그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평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란 어떤 의미일까?
중동 평화 조약이나 핵무기 감축 협정같이 국가 간의 평화를 위해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만, 성 가시미로의 경우는 좀 다른 방법으로 평화를 이루었다.
폴란드 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가시미로는 ‘평화의 중재자’로 불렸다.
그것은 그가 당파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헝가리의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진군했지만
참모들의 충고에 따라 철군하고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다시는 군대를 소집하지 않았다.
평화는 무슨무슨 선언이나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으로써 우리 각자에게서 시작된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때, 말하기 전에 먼저 상대의 입장을 생각할 때,
싸움에 휩쓸리지 않기로 결심할 때 우리는 평화의 중재자가 된다.
부수고 파괴하기보다 세우고 건설할 때,
남을 비판하기보다 칭찬할 때, 절망하기보다 희망을 가질 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정과 직장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내면이 평화로울 때 다른 사람과도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