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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7주일 / 원수를 사랑하라… 용서와 정의를 말씀하시다

Berardus 2022. 2. 16. 04:55

[말씀묵상]

연중 제7주일

 

원수를 사랑하라… 용서와 정의를 말씀하시다

사울의 불의한 탄압에 맞선 다윗
응징과 보복 대신 정의와 선 실천
모든 이는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
하느님은 용서하고 내어주시는 분

 

고투 끝에 높은 산꼭대기에 오른

산악인의 낭보를 들으면,

많은 이들이 감탄과 동경을 보냅니다.

그러나 동경은 대개 동경에 그칠 뿐, 등산화 끈을 조여매고

동네 뒷산이라도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높은 산에 실제로 도전하는 이는 더 적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산준봉에 올라서 느끼는 벅찬 감동은

대다수에게 남의 일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다르는 덕의 경지,

특히 용서와 비폭력의 경지도 그렇습니다.

여러 계명 중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만큼은

참으로 오르기 힘든 봉우리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한 사례들을 통해서

그 모범을 따르도록 권하지만,

아득히 높은 목표 앞에서 엄두조차 못 내는 경우가 많지요.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첫걸음을 떼야 등반이 시작되는데,

그 첫발조차 내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은

용서와 정의를 말하면서 우리 걸음을 재촉합니다.

▲에른스트 요셉손 ‘다윗과 사울’.

먼저, 첫째 독서는 불의한 탄압을 견디다

복수의 기회를 얻은 다윗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민족의 명운을 건 전쟁터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다윗을 사울이 박해합니다.

사실 사울이 다윗을 억압하게 된 것은 자신의 실책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면서 약탈자들과 싸우던 사울은 아말렉족과의 전투에서

그분의 뜻을 어기고 전리품에 눈독들입니다.(1사무 15,9 참조)

이전까지 이민족과 치른 전쟁이 민족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전리품에 집착한다는 것은 탐욕과 폭력으로 인해

전쟁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뜻이고,

이 때문에 사울은 하느님의 신뢰를 잃습니다.

(1사무 15,35; “주님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일을 후회하셨다.”)

자신의 근본을 망각하고 불안해진

사울의 마음에 의심과 질투가 파고들었겠지요.

사울은 정예 병사 3000명을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 듭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목숨 걸고 충성했던,

심지어 자기 장인인 사울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다니요.

그런데 다윗에게도 역전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무방비 상태의 사울을 발견한 것이지요.

불의한 박해자의 심장에 복수의 칼날을 찔러 넣을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다윗은 보복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1사무 26,9)

그렇게 다윗은 사울의 불의를 응징하는 대신,

악을 선으로 갚는 방법을 택합니다.

정의는 용서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지만,

동시에 대단히 위험한 덕목이기도 합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고삐가 풀려버린 정의는

한계를 모르고 폭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모진 일을 할 때

양심이라는 제동장치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정의라는 명분이 붙으면, 그 제동장치가 곧잘 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의 명줄을 끊을 때까지 폭력을 멈추지 못합니다.

비열한 수단을 쓰더라도 상대를 궤멸시키는 것만이

지상 목표인 것처럼 달려듭니다.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리는 경우지요.

다윗은 괴물이 되는 대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떠올립니다.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 그렇습니다.

저 원수 사울마저도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최후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주권을 잊지 않았고,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악을 선으로 갚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복음은 원수를 사랑해야 할 근본 이유를 알려줍니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루카 6,35)고 가르치시는 것은, 흔한 처세술도 아니고

이룰 수 없는 백일몽도 아닙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날 수는 없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충 묻어라’고 눙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며(37절),

내어주는(38절) 이유는, 정의를 완전하게 실현하시고

갚아주실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 분”으로서 사람의 모든 진실을 아시고

그 최종 처분의 권리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비열하고 사악하며 가증스러운 존재마저도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인간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고,

당신께서 지으신 것을 당신께서 거두시는 것이

하느님의 주권이며 정의입니다.

인간이 자신만의 정의에 사로잡혀 한계를 모르고 치달을 때,

거기에는 하느님의 주권도 사랑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인간의 아버지요

주님이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다스림 아래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제국을 이루는 인간관계의 근본은

후원자(Patronus)와 의뢰인(Clientes)이라 부르는

이익 관계(Clientela)에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의 후원자가 아래 계층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면,

의뢰인은 후원자를 칭송하며 보답하는, 일종의 공생 관계였지요.

그래서 로마인들은 이익을

돌려줄 수 없는 사람에게 결코 호의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죄인이나 병자, 이방인들이 세상 밖으로 밀려난 것은

그들이 보답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이익 관계의 허상을 뒤집으시고,

모든 이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제2독서가 말하듯

인간은 실수할 수 있지만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1코린 15,49), 하느님은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한계 없는 사랑만이 완전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따르는 그분의 자녀는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