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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3월 6일) 성녀 콜레타 동정

Berardus 2022. 2. 6. 21:20


 

 2월 7일(3월 6일)

성녀 콜레타 동정


Sta. Coletta

St. Colette,VIRGIN AND ABBESS

Saint Colette the Franciscan

Santa Coletta (o Colette) di Corbie

Foundress of the Poor Clare Colettines

13 January 1381 at Corbie, Picardy, France as Nicolette Boilet,

named in honor of Saint Nicholas of Myra

- 6 March 1447 at Ghent, Belgium of natural causes

Beatified:1604 by Pope Clement VIII

Canonized:1807

Name Meaning:victorious army (= Collette)

Patronage:Corbie, France, loss of parents

 

 

프랑스 건르비 태생인 꼴레따는

 그녀의 어머니의 열렬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녀는 신심 활동에 커다란 기쁨을 느꼈으며

 부모가 죽은 후에는 은둔소로 숨어들었다.

여기서 그녀는 많은 천상 위로를 받았으며

동시에 매우 엄격한 고행 시련들에 의하여 정화되고 신앙은 굳건해졌다.

꼴레따는 하느님의 감도하심을 받아 은둔 생활을 버리고

 프랑스 전역에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가난 글라라" 수도원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생존 중에 17 개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녀는 사랑, 참회, 겸손, 온유의 모범을 보이며 살다가

1447년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콜레타는 1381년 1월 13일

 작은 마을 코르비에서 모범적인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머니의 끊이지 않은 기도의 응답으로 은총을 받고 태어난 아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을 때 이미 60살이었으며

그때까지 아이가 없었다.
 기도로 태어난 탓인지 어린 소녀는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며 엄격한 생활을 지키며,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바쳤다.

14살이 될 때까지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키가 작아서

 이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는 크게 상심하였다.

 

콜레타는 하느님께 아버지를 위로해 주시길 간청하였다.

그 후 그녀는 매우 빨리 자라기 시작하여 정상적인 키가 되었다.

 한 편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지도 모를

 자신의 빼어난 미모를 가져가시라고 기도하였다.

 이 요구도 받아들여져서 매우 심한 외모로 자랐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에 존경을 보여 주었다.
22세 때 부모가 죽자 교회의 허락을 얻어

교회 바로 옆에 조그만 곳에 혼자 갇혀 지냈다.

방의 조그만 창문을 통해 복된 성체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여생을 은수자로 살고 싶어 하였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 3회 회칙을 받아서 나날이

 더욱 세라핌적 사부를 닮고자 회칙에 따른 완전한 가난,

극심한 극기와 끊임없는 기도 안에서 살려고 열망하였다.
18세가 되던 어느 날 기도에 열중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무척 슬퍼하시는 것만 같은 형상으로

 예수님과 성 프란치스코가 나타나셨다.

그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님을 향해 “콜레타에게 죄인을 위한 보속과

 성녀 클라라 수도원의 개혁을 맡기면 어떻겠습니까?”하고 말씀드렸고

 주님께서는 쾌히 승낙하셨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성녀 클라라의 회칙의 엄격한 준수를

 재도입하고자 하는 열망을 그녀 마음 안에 불러일으키려 하셨던 것이다.

당시 많은 클라라 수도원들은 완화된 형식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개혁에 관한 생각이

악의 세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여 계속 거부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벙어리와 장님이 되었고 다마스커스의 사울처럼

 결국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는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무엇이나 하겠나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즉시 말문이 열리고 눈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가난한 클라라회를 하나씩 설립하여 생전에 17개나 세웠다. 

 그녀의 사후에 프랑스가 아닌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수도회가 설립되어

 성 클라라의 초기 회칙이 새로이 번창하였다. 
  그녀의 기도의 응답으로 또 그녀의 사업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서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포함하여

 무수한 기적들이 일어났다.

 40년 동안 열심히 일하다가 그녀는 1447년 3월 6일 겐트에 있는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여러 수도원에 있는 여러 수녀들에게 동시에 나타났다.

 우리바노 8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07년 비오 7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재속프란치스코 한국 국가형제회홈에서)-


성녀 콜렛타의 개혁


성녀 콜렛타는 프랑스 Corbie에서 1381년 생겨났으며,

3회의 은수자 삶을 살았다.

1406년 그녀는 교회의 대분열 시기에 아비뇽의 교황이었던

 베테딕도 13세를 만나기 위해 Nice 로 갔다.

그는 그녀에게 2회 수도복을 주었으며 2회를 개혁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1447년 Ghent 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에 22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녀가 쓴 회헌은 1458년 비오2세에 의해 인준을 바았다.

이 개혁의 목적은 어떠한 소유도 없이 성 다미아노의 초기

가난한 자매들의 삶을 따르는 데 있었다.

성녀 콜렛타에 의해 개혁된 수도원들은 Colettine

개혁 수도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간추린프란치스칸 역사' 프란치스칸영성학교강의록 78쪽에서)-

 

 

프랑스 피카르디의 코르비에 사는 목수의 딸인 그녀는

1381년 1월 13일에 태어나 니콜레뜨라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흔히 콜레타로 불렀다.

17세 때 천애 고아가 되어,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프란치스꼬 3회원이 되었으며, 코르비에서 독수자로 생활하였다.

 

21세 때부터 콜레타는

 코르비의 원장이 빌려 준 은둔소에서 홀로 살아왔는데,

이곳에서 이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환시를 보았다.

이때 성 프란치스꼬는 당신의 가난한 부인회(글라라회)가

 엄격하던 그들의 원회칙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이미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가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글라라회의 개혁을 지시하는 환시에 응답하려고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서,

앙리 드 바움 형제의 권고에 따라 교황청 책임자인

 베드로 드 루나를 면담하기 위하여 1406년에 니스로 갔다.

드 루나 역시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가 글라라회의 입회를 허락하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위임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피카르디와 사보이의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으나,

 1410년 부터 앙리드 바움의 지지를 얻어서 개혁 사업은 점차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데르 지역 내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17곳이나 세웠고, 러 퓌이-앙-블레의 한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자주 탈혼에 빠졌고, 고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으며,

겐트 수도원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콜레타의 개혁 글라라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녀는 1807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다미아노 십자가 상의 예수님

 

성녀 클라라는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바라볼 것(관상)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의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통합(회복)하신 부활의 예수님이십니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의 예수님께로부터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는 “회복”의 소명을 들었습니다.

이 소명은 오늘을 사는 우리 프란치스칸들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작은형제회홈에서www.ofm.or.kr)-

 


노인이 될 때까지 자녀를 얻지 못한 부부가 열심히 하느님께 기도하여

자녀를 보게 된 이야기는 성서에도 몇 군데 기록되어 있지만,

성녀 콜레타의 양친도 그와 같이 오랜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져

 한 여아를 낳게 된 것은 어머니가 60세 때의 일이다.

그 콜레타라는 이름은 니콜레타 즉 작은 니콜레아의 약칭으로,

늘 성 니콜라오를 특별히 공경하던 양친이 그 성인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일부러 아이에게 지어준 것이다.

성 니콜라오 주교 축일:12월6일.게시판1508번.

 

그녀의 아버지는 목수로

 1831년 1월 13일에 프랑스 피카르디의 코르비에서 태어났다.

콜레타는 기도의 덕분으로 얻은 아이였음인지 어려서부터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기도를 잘하는 영혼에게는 반드시 순명, 정결, 겸손, 애인덕 등

 모든 것이 구비되는 법인데, 콜레타에게도 그와 같았다.

더욱이 그는 꽃과 같은 아름다운 자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종종 죄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는

근심하며 하느님께 보호를 구했던 바

얼마 안 되어 전연 딴 사람처럼 창백해진 얼굴 모양을 갖게 되었다.

그 후부터 콜레타는 다른 이들과 잘 친해질 수는 없는 인상을

남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 어릴 때인 17세 때에 양친을 잃고, 후견인(後見人)도 있었지만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고요한 은수 생활을 시작하다가

 마침내 프란치스코 제 3회에 입회했다.

 

 

18세 되던 해, 어느 날 그녀가 기도에 열중하고 있으려니까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무척 슬퍼하시는 것만 같은 형상으로

 예수님과 성 프란치스코가 나타나셨다.

그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님을 향하여

“콜레타에게 죄인을 위한 보속과

 성녀 클라라 수도원의 개혁을 시키면 어떻겠습니까?”하고 말씀 드렸고

주님께서는 그를 쾌히 승낙하는 것이었다.

 

콜레타는 이를 자기 망상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와 고행에 힘썼다

.그런데 또다시 클라라회를 개혁하라는 묵시를 받았다.

그래도 아직 주저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눈이 보이지 않고,

입도 벌릴 수 없는 상황에서 “만일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코 너의 영혼도 구원을 못 받으리라”는 묵시를 받았다.

여기에서 콜레타는 클라라회의 혁신이 하느님의 뜻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에게 그런 대임을 완수할 힘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해 때때로 연약한 인간을 선택하시어

 친히 이를 인도하시는 때가 있다.

지금의 콜레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느님께서는 열심하고

 경험이 풍부한 한 사제를 그녀에게 보내주셨다.

 

이에 콜레타는 자신의 은수처를 떠나 로마에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

클라라회 규율을 성 프란치스코가 서술한대로 엄격하게 지킨다는 서원을 첨가하고

 이것으로 그 회를 개혁한다는 허가를 간청했다.

교황은 세밀한 조사를 한 후 그녀의 원의를 듣고

그녀를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을 위임하면서

 앞으로 설립하려고 하는 모든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했다.

교황의 축복을 받은 콜레타는 프랑스에 돌아와서 각지를 여행하며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오래지 않아 경건한 소녀들은 이 지극히 엄격한 수도원에 들어오지 위해서

 사방에서 모여 오게 되었다.

 

 

콜레타의 생애에는 종종 기적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일은 아무 재산도 없는 그녀가

 다수의 수도원을 세우고 또한 그 회의 수녀가 된 다수의 소녀들이

 모두 그녀의 정신에 살고,

엄격한 고행의 생활을 보내며, 그래도 어떻게든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실이다.

물론 그녀와 그녀의 사업을 반대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박해는 어떠한 좋은 사업에도 따라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시련으로 허락하심으로써 오히려 그녀의 사업은

 그로 말미암아 점점 더 견고해지고 점점 더 발전했다.

 

콜레타는 모든 덕에 있어서 수녀들의 거울이었다.

그녀는 원장이었지만 자신은 다른 자매들의 아래 사람으로 생각하고

 가장 천한 일도 기꺼이 하며 다른 사람이 부탁한 일은 얼마든지 해 주었지만,

자기 일은 절대로 남에게 시키려 하지 않았다.

 또한 겸손했던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은 양보하고 자신은 나쁜 것을 취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제일 작은 방에 살며 제일 천한 도구를 사용하고 제일 검소한 의복을 착용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한 가지 옷을 입었던지 떨어지면 깁고 떨어지면

깁고 해서 나중에는 처음 기지가 온전히 없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그녀가 병자를 위로한 점은 친어머니가

 자기 자녀에게 바치는 사랑보다도 더 뛰어났다고 한다.

 

수도 생활을 시작한 지 40년째 콜레타의 최후의 날이 다가왔다.

그녀는 그 날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바로 전에 겐트에 있는 자신이 세운 수도원에 가서

1447년 2월 원내의 수녀들을 전부 모아 놓고 최후의 훈계를 남기고

 3월 6일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녀 콜레타가 건설한 수도원은 프랑스와 플랑데르 지역 내에 17곳이나 세웠고,

 러 퓌이-앙-블레의 한 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했다.

성녀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했던 것이다.

콜레타의 개혁 클라라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녀는 1807년에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성녀 클라라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동정녀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오상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성녀 클라라 동정 축일:8월11일.게시판1312번.

 

제주 성 글라라 수도회

 

우리 수도회의 영성

 

성 클라라 수도회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교회 안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본받음을 생활양식으로 하고,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완성을 위해 봉헌된 관상 수도회이다.

성 클라라 수도회, 또는 가난한 자매 수도회라고 불리며,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를 이루고 있다.

본 수도회의 생활양식이란 교회생활, 형제애, 가난, 관상이다.

 

우리 수도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모 마리아의 발자취를 따라 성령의 정배가 되어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가족적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은 삶을 살아가는 봉쇄 안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께 그 마음을 두는 관상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성자를 당신 마음에 꼭 들어하시는” 성부와 함께 산 위에서

 관상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마태 17,5)를 본받아 증거하며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이다.

 

침묵 안에 끊임없이 회개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과 사물과 모든 사건 속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되어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 찬미와 감사는 성체신비의 거행에서 절정을 이루며,

교회의 심장 역할을 다한다. 이로써 교회는 이 생명의 샘에서 한없이 새로워진다.

 

이렇게 자매들은 자신의 삶 전체로 온 누리의 찬미를 수행하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축제에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그 영광스러운 몸의 연약한 지체들을 받치는 받침대가 된다.

 

▒ 복음적 교회생활

성녀 클라라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절대 순명하며 교회에 종속됨을

 근본가치와 이 성소의 주춧돌로 삼았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심장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맥박이며 교회를 존재케 하고 유지시켜주는 전례,

 특히 성체성사에 이 공동체생활의 중심을 두고 있다.

교회의 딸로서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이

성체성사를 통해 한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으로 그의 신비체인 교회의

 전 지체와 일치함으로써 교회를 지탱시켜 나아가고,

특히 나약하고, 버림받고, 고통받는 지체들의 보조자로서

 영적 봉사를 하는 것이 본회의 주요 소명이다.

이에 교회에 충성함으로써 교회의 어느 지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교회정신과 완전히 일치하여 복음을 생활함을 기본원칙으로 한다.

 

 복음적 형제애

성녀 클라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울삼아

 상호 형제적 일치를 깊이 보존하며 복음 이상의

완성을 향해 나아감을 핵심으로 삼았다.

또한 이 심오한 자매적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전 공동체가 하나되어 전 지체,

교회에 형제애 일치의 표징이 되고 활력을 주며,

이로써 누리는 기쁨은 복음적 생활의 결실이며 참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자매애 안에 복음 정신은 구체화되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리스도 사랑 안에 모두 하나되는

 구원의 신비를 실현하게 된다.

 

 복음적 가난

성녀 클라라에게 복음적 생활은

 성령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절대적 가난의 생활이다.

가난은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법에 의한 복음적 가난이다.

즉 구유에서 가난하게 나셨고, 십자가 위에서 맨 몸으로 달리신

 가난한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생활로써 따름이 본 회의 영성에 근본을 이룬다.

 

순례자로서 단순과 겸손으로 온전히 주님께 의존하며 기쁜 마음으로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 살아가는 가난한 자,

작은 자의 생활이다.

즉 모든 것은 은총이며 하느님의 선물임을 의식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가난. 겸손)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성령의 자유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된 참된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 안에서 늘 감사하는

 참된 의미의 복음적 가난이다.

 

 복음적 관상생활

성녀 클라라의 복음적 생활양식은 관상이다.

봉쇄된 수도원 안에서 깨끗한 마음과 주님의 정신으로

철저하게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고요와 침묵의 기도 생활에 있어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는 이 고요와 관상적 고독의 모범이다.

관상 중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뵈옵고 추구하는,

특히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의 신비를 묵상하며

이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모든 것 위에 감사하며 기쁨과 평화 중에

 끊임없는 찬미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본 회의 사도직이며

이는 하느님의 영원한 만민 구원계획과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관상생활은 교회가 그 현존을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본질적 표징이 된다.

 

 활동분야

우리의 사도직은 관상생활이며, 사도적 활동은 없다.

 자급자족을 위한 한 수단으로 봉쇄 구역 안에서 소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나눔의 실천이며,

인근 주민과 같은 형태의 육체적 노동을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정신에 따라 택한 서민적 생활 수단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안에서 이 육체 노동은

낮은 자들의 수고를 함께 하는 것이며 고통 당하고 굶주리며

 억압 당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과 함께 실생활로써

이 낮은 자되는 어리석음을 받아들여 창설자의 정신으로

복음적 가난과 단순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지향적 삶은 육체적 노동에서뿐 아니라

각자의 소임과 고유한 분야 안에서도 한 맥이 되어

기도와 침묵으로 살아 움직인다.

-(제주글라라수도회www.jejucla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