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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성 요셉 레오네사 / 성 안드레아 코르시니

Berardus 2022. 2. 3. 17:27

 

 

 2월 4일

성 요셉 레오네사


ST. JOSEPH OF LEONISSA - CAPUCHIN

San Giuseppe (Desideri) da Leonessa

8 January 1556 at Leonissa, Umbria, Italy as Eufranio -

Saturday 4 February 1612 at Umbria, Italy of cancer and post-operative problems

from surgery for that cancer

Beatified:22 June 1737 by Pope Clement XII

Canonized:29 June 1746 by Pope Benedict XIV

 

 움브리아의 레오네사 출신인 그는 18세 떄에 카프친회원으로 서약한 뒤,

요셉이란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지극히 겸손하고 순종적이었으며 영웅적으로 극기생활을 하였으니,

한번은 3주간 동안이나 물도 빵도 없이 지낸적이 있었다.

 

그는 항상 손에 십자가를 들고 설교했고,

끓어오르는 열정을 폭발시키는 듯한 자세로 열변을 토하였다.

1587년, 그는 터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페라로 파견되어 수많은 배교자들을 회두시키고,

모슬렘인들을 상대로 설교하였으므로, 두차례나 투옥되었다.

두번째의 투옥에서 그는 잔인한 죽음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556년 북 이탈리아의 밀라노 시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계승하는

 카푸친 수도원의 수사

페르토의 요셉이라고 하는 한 사제가 서거했다.

이사람은 유럽에 상당히 알려져 있는 40시간의 성체조배라는 신심을

 처음 주창한 분으로서 유명하지만,

그것은 그 이름과 같이 신자가 성당을 방문해 40시간 낮이나 밤이나 그침없이

계속 제대 위에 모신 성체께 대해 기도를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같은 해에 움브리아의 아시시에 가까운 레오니사라는 마을에

몇 년 후에 이 40시간의 성체조배의 신심을 성대하게 한

성인이 태어났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잇을 것이다.

 

그는 데시데디의 요한이라는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백작(伯爵)의 가정에서 태어나

세례 때에는 오이플라니오라는 본명으로 불렸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비델보 대학 교수인 백부의 슬하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천재적 두뇌는 오래지 않아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게 되었다.

백부는 장래 어떤 귀족의 딸과 결혼시키려고 했지만,

본인은 학생 시대에 여러 가지의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보존해 온 정결한 마음 그대로 세속적 명예나 가정생활을 원하는 기색은

 추호도 없으므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립한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가서

요셉이라는 수도명을 받고 남몰래 착복식까지 다 치렀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백부는 자기의 소망이 다 일그러진 것에 대해

대단히 분노해 폭력을 써서라도 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했으나,

요셉은 시종일관 수도원에 끝까지 머물러 있으면서 완덕의 길을 걸을 결심을 하고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본받아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행을 감행하고,

밤낮 제대앞에 부복해 열렬한 기도를 바치는 등

다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버리는 데 더욱 진력했다.

 

이와 같이 세라핌보다도 못지 않은 사랑을 지니고 있던 그는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본래부터 원하던 바이고,

1587년 커푸찬회 총장으로 부터 터키로 가라는 명령을 받자마자 기뻐하며

이교의 나라에 가서 콘스탄티노플에 노예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로하며 구출해 주었을 뿐아니라,

회교에 빠져 있는 터키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고,

특히 여러가지 환난에 못 이겨 배교한 신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며

개종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요셉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터키의 황제 멜렉 엘 가미르에게 복음을 전한

성 프란치스코를 모방하려고 어느 날 그 성을 방문했을때 ,

그는 즉시 수위병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후에 무서운 형벌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이 형벌은 날카로운 갈퀴로 그의 왼손과 오른 다리를 끼어서 공중에 매달고

40시간 동안이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33세였던 요셉은 예수께서 수난을 받으셨던 나이와 같은 나이에

주님과 같은 형벌을 받고 순교하게되는 영광을 즐거워하며

그러한 은혜를 내려 주신 하느님께 상처가 혹독히 아픈 중에서

도 찬미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형리들은 보다 더 그를 괴롭히기 위해 그를 달아매고

 그 밑에 불을 피워 놓고 그를 그을리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올라올 때 성인의 호흡은 시시각각으로 가빠져서

 이제는 최후라고 각오하고 있었으나

그때 황제는 사형을 면제하고 국외로 추방하기로 했다.

 

그 후 요셉은 고국에 돌아와서 이번에는 움브리아 지방을 순회하면서

불을 토할 듯한 열렬한 설교로 냉담했던 신자들의 마음을

다시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게 했다.

그 설교는 하루에 적어도 서너 번 씩 하고 어떤 때는 더 많이 했으므로

그로 말미암아 개종한 자의 수가 얼마나 되는 지 모를 정도이다.

이를 보더라도 그의 활동이 窄떨?눈부시고 또한 유효했던가를 알수가 있다.

 

사람들을 냉담과 죄악에서 구출하기 위해

그가 40시간의 성체조배의 신심을 보급하는데 전력을 다한 것은 이때였다.

그는 자신이 40시간 형벌을 받은 몸이란 것을 잊지 않고,

그때 자기 마음에 타오른 것과 같은 예수께 대한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신심으로써 격려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탈리아에서 22년 동안이나 사도적 활동을 계속한 뒤,

요셉은 병상에서 신음하게 되어 수술 받게 되었는데,

수술 중간에 의사가 그의 몸의 움직임을 염려해, 줄로 그의 몸을 수술대에 묶으려고 할 적에

그는 손에 쥐고 있는 십자가를 내 보이면서

"줄보다 이분이 더 강하므로 걱정 없습니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치료도 아무 효과를 보지 못해 1612년 2월 4일을 일기로

 그는 평안히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심한 병고 중에서도 항상 하느님께 대한 찬미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전구로 인해 무수한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1746년 그 당시의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요셉 레오니사를 성인품에 올리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2월 4일

성 안드레아 코르시니


ST. ANDREW CORSINI

Sant’ Andrea Corsini Vescovo

1302 at Florence, Italy -

6 January 1374 at Fiesole, Italy; relics at Florence, Italy

Beatified:1374

Canonized:29 April 1629 by Pope Urban VIII

Patronage:civil disorder, riot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성질이 고약하고 문제아였지만

갑작스럽게 마음을 고쳐 먹고 1316 년 플로렌스의 가르멜회에 입회하였다.

사제 서품 후 오로지 기도와 연구에 몰두하였지만

1360년 이탈리아 피에소레의 주교가 서거하자 다른 사제들과 신자들이

 그의 후임이 되어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는 남몰래 도망을 했지만

기도 도중 백의를 입은 한 아이가 나타나 "두려워할 것 없다.

나도 너를 보호하겠고 특별히 성모 마리아는 너를 도우리라"고 하여 돌아왔다.

그 후에도 그는 엄격한 생활을 그대로 계속했으며

 종종 단식과 자기 몸을 매질하기도 하였다.

 

분쟁을 조정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던 그는 볼로냐 시의 불안을 화해시키는

교황 사절로 임명되어 맹활약을 보였다.

1373년에 주의 품으로 올라간 그는 55 년 동안 수도 생활을 한 것이다.

1373 년 코르시니 가문 출신인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하여

로마의 성 요한 라테란 성당에 그를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다.

코르시니가(家)는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서 가장 높은 귀족인데,

1282년 이래 장군이나 대사, 주교나 추기경 등 중요한 인물이 많이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이는 성 안드레아 코르시니이다.

 

그의 아버지는 니콜라오, 어머니는 베레그리나라고 하는데,

결혼 후에도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섭섭히 생각하면서도 항상 기도하며 성모상 앞에서 서원까지 발한 일도 있었다.

그들의 열성이 하느님께 통했음인지 마침내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옥동자와 같은 남자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본명도 안드레아라고 이름지었다.

그를 낳기 전날 밤에 어머니는 늑대를 낳은 꿈을 꾸었다.

그러나 막상 낳고 보니 그 아들은 지극히 건강한 미남이었으므로

근심했던 만큼 어머니의 안심과 즐거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아들은 수년 후 학교에 입학해 비상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 행동이 난폭하기 짝이 없어 동생들을 줄곧 울리곤 했었다.

그리고 병정 놀이나 격렬하게 뛰고 노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

이와 같이 손을 댈 수 없이 철없는 아이였지만 그의 마음만은 극히 순진했다.

15세 때에도 난폭한 행동을 했으며, 부모가 부르시는데도

 꾸중을 들을까봐 좀체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어떤 때에는 부모에게 달려들어 심지어는 추태까지 부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보다 못해 눈물을 흘리며

 "얘! 너는 참으로 내가 꿈에 본 늑대와 똑같구나"하고 말하니,

안드레아는 정중히 "그것은 무슨 꿈입니까?"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그 꿈 이야기와 또한 그가 성모의 전구로 태어났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너는 성모님의 전구로 태어났으니 더욱 착한 아이가 되지 않으면

마리아께도 면목이 서지 않는다"하고 타일렀다.

 

이 한마디가 얼마나 그의 마음을 자극했는지 그 날 밤 기도로 밤을 세우고

어머니가 서원을 발했다는 성당을 참배하고 성모상 앞에서 2, 3시간 기도를 바치고

그 후 가르멜회의 수도원에 가서

 총장 예로니모 메리올라디스에게 입회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이미 부모의 슬하에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다.

 

총장은 소년의 결심에 탄복했지만, 다시 그의 양친을 불러 의논한 결과

그들도 아들의 회개를 의외로 즐거워하며 아무 이의 없다고 하므로

그때서야 비로서 안드레아의 소원대로 수도회에 입회할 수 있었다.

 이 기적은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안드레아는 은총의 지도에 잘 순종했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의 노력으로 모두 이겨나갔다.

또한 그는 그렇게도 교만하고 무모한 플로렌스 명문의 아들이었지만 수도원의 청소나

부엌일 같은 천한 일까지도 기꺼이 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양친은 아들의 회개를 무척 즐거워했지만 그의 친척들은 안드레아가

천한 수도복을 몸에 걸친 것을 가문의 수치로 생각해 어떤 날

그가 장터에 나오는 것을 붙잡고 다시 세속에 나오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유혹에 빠지는 일 없이 단호히 자기의 신념을 시종일관 지켜나갔다.

 

그의 그러한 신념 때문에 모든 덕의 진보도 현저히 나타났으며

그 중에도 순명에 대해서는 형제들의 모법이 되었고,

또한 고신 극기에 있어서도 회의 규칙 이상으로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덕에도 출중해

가난한 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두터웠다.

 

 

수도 서원을 발한 후, 그는 오로지 기도와 연구에 몰두해 사제가 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신품 성사를 받았다.

부모는 자기네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성대한 첫 미사를 지내기를 원했지만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플로렌스에서 7마일 가량 떨어진 어느 고요한 마을의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이와 같은 겸손은 특별한 상을 받아 영성체 후

성모의 발현을 보게 되어 "너는 나의 일꾼이다.

나는 너를 선택하고 너로 인해 영광을 얻게 되리라"는 고마운 말씀까지 받게 되었다.

 

안드레아는 사제가 된 후에도 검소한 고해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의 명성은 오래지 않아 세상에 퍼져 사방에서 훈계를 받으러 오는 이,

힘을 빌리러 오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될 수있는데까지 그들을 위해 노력했고,

어떤 때는 그의 기도로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어느 날 친척이 되는 아비뇽 시의 추기경 베드로 코르시니에게

 일이 있어서 초대를 받은 때가 있었다.

그가 길을 걷다 보니 성당 문전에서 자선을 청하고 있는 한 소경이 눈에 띄었다.

 

가련한 생각으로 사정을 물어보니까

 금, 은(金銀)을 가르는 난로 앞에서 일하다가 실수하여

불덩이가 눈에 들어가서 눈이 멀었다고 하며

"자녀들은 아직 어려서 일할 수 없고 또 저는 눈이 보이지 않으므로

 사실 곤란합니다"하고 말했다.

안드레아는 몹시 측은한 마음에 눈물까지 흘리며

 굳은 신앙심을 가지고 성수를 뿌리면서

 ’전능하신 하느님, 이 불쌍한 죄인의 눈을 뜨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니

즉각 그의 눈이 보이게 되었음으로 그 사람은 소리 높여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기의 행복을 온 거리로 다니며

외쳤다고 한다.

 

 

1360년 이탈리아 피에솔레의 주교가 서거하자 다른 사제들과 신자들은

그에게 그의 후임이 되어 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남몰래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숨었다.

사람들은 그가 행방불며이 되었으므로 교회에 모여 할 수 없이 다른 이를 선출하려 할 때

돌연 거기에 참석한 3세 가량 되어 보이는 아이가

 "하느님께서는 안드레아 신부를 주교로 선택하셨습니다.

신부는 지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계십니다"하고 부르짖었다.

 이것을 들은 모든 이의 놀람은 대단했다.

 

마침 그 시간에 기도를 바치던 안드레아에게도 백의를 입은 한 아아기 발현해

"두려워 할 것 없다.나도 너를 보호하겠고

 특별히 성모 마리아는 만사에 너를 도우시리라"했다.

그가 아기 예수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주님의 뜻을 알고

 마침내 주교의 직을 맡게 되었다.

 

그 후에도 그는 엄격한 생활을 그대로 계속하고 포도가지를 깔고 그 위에서 자며,

종종 단식하고 편태하기도 했다.

그는 가난한 이와 불행한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하고 될 수 있는데 까지

그들을 위로하며 도와 주었다.

가끔 하느님께서는 성인을 위해 그들에게 베풀어주는 물품을 많게 해 주실 때도 있었다.

 

1372년 성탄 대축일에 성모의 성당에서 자정미사를 지내고 있을 때,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시어 그의 임종이 임박한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을 들은 그의 즐거움은 보통이 아니었다.

기쁨에 가득 차 미사 세 대를 드리고난 그는

 재차 청춘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용모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월 6일의 자정에 이르러 그는 임종의 병상에서

자기 교회의 사제들에게 호위되어 사도신경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오 주여, 당신 말씀을 따라서 안락한 곳으로 가게 해 주소서!" 하고

최후의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하늘에는 신성한 광채가 빛나고

그의 영혼은 주님의 품으로 올라갔다.

성인은 그때 70세였고 수도 생활 55년째 되는 해였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