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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성 블라시오 주교 순교자 / 성 안스가리오 주교

Berardus 2022. 2. 2. 21:22
 


2월  3일
성 블라시오 주교 순교자

St. Blaise of Sebaste
San Biagio Vescovo e martire
Born :Armenian
Died :flesh torn by iron wool-combs, then beheaded c.316

블라시오는 아르메니아의 세바스테아 주교였으며,
카파도치아의 총독 아그리꼴라우스의 명에 의하여 순교하였다.
이 때는 리치니우스의 치하였는데, 그는 부유한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나이에 주교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크리스챤의 박해가 시작되는 초기에는 은수자가 되었는데,
병자들을 치유하고 또 야생 동물들을 보살펴 주는 것을
목격한 어떤 사냥꾼에 의하여 아그리꼴라우스에게 끌려가 투옥되었다.
그러나 언제 주교가 되었으며 어떻게 활동하였는지를
밝히는 역사적 자료들은 거의 없다.

다만 8세기부터 블라시오에 대한 공경이 동방과 서방 교회에 두루 퍼졌다.
블라시오 축일에는 인후를 축성하는 예절이 전해 오는데,
이것은 그분이 목에 고기뼈가 걸려 사경을 헤매는
한 소년을 기적적으로 치료한 사실에 근거하며,
이 예식에서 초 두 자루를 사용하는 것은 그 소년의 모친이
옥에 갇힌 그에게 초를 가져온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온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터어키의 세바스테지방의 주교인 블라시오는
로마 제국 박해에 의한 최후의 순교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아주 서민적인 신앙은 목구멍의 축복과 같은
수많은 기적과 일화를 만들어 내었다.
그는 한때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려 고
통당하던 한 아이를 구제한 적이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4세기 아르메니아 세바스테의 주교였다.
중세기부터 그에 대한 신심이 전교회에 퍼졌다.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Guelferbytanus 32, De ordinatione episcopi: PLS 2, 639-640)

내 양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섬기셨고
또 우리에게도 이런 봉사자가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셨습니다."
즉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을 구속할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피와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해방되고,
그분의 겸손으로 말미암아 넘어져 있던 상태에서 똑바로 일어섰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몸의 지체로서 우리가 가진 것이 적다 해도
그것을 다른 지체들에게 바쳐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주님의 모범을 본받도록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사도 요한이 서간에서 우리보고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주님도 부활하신 후 당신 친히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댜?"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네,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세 번이나 물어 보시고 베드로가 세 번 대답했을 때
그때마다 주님은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양들을
잘 돌보아 줄 때가 아니라면 어떻게 보여 주겠느냐?
너는 모든 것을 나에게서 받았는네 나를 사랑함으로써
네가 너의 것으로서 나에게 줄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이냐?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곧 "내 양들을 잘 돌보는" 일이다.

한번 또 한번 그리고 세 번까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님은 물어 보시고 베드로는 그때마다
"네,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으며, 주님은 또한 세 번이나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으로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사랑으로 세 번 주님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침내 세 번째에 당신의 양들을 베드로에게 맡기신 후,
자신의 대답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두려움을 저주하고
지워 버린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가올 십자가를 알리시고
그가 받을 고난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위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잘돌보아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내 양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는 뜻이었습니다.
-(가톨릭홈에서)-


성 블라시오는 아르메니아의 세바스테아에서 태어났다.
의학을 연구해 그 고향 부근에서는 명의(名醫)로 이름이 높았지만,
또한 덕망으로도 유명해, 특히 겸손과 정결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이 열렬해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가 사제가 되자마자 고향의 주교가 서거(逝去)했는데,
그때 모든 사제들과 신자들은 그가 주교가 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그가 다만 덕행으로 출중할 뿐 아니라 두려운 박해가
일어난 그 당시 교회의 지도자로서는 제일 적당했기 때문이다.
박해의 주모자는 갈릴레오 황제였다.

불라시오가 주교가 된 후 2년만에 황제는 중병에 걸려 임종이 가까웠다.
이렇게 되자, 황제는 사후가 두려워서 칙령을 내려
즉시 박해를 중지시켰고 오래지 않아 콘스탄티노 대제가
전쟁에 승리를 거두어 황제가 된 후는
박해를 금지했을 뿐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교회를 보호했다.
이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즐거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 대제의 친척으로 동쪽 나라를 다스리던
리디니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참으로 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와 똑같이 간악한 아그리콜라우스라는 자를
아르메니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이 남자는 리디니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블라시오는 이 박해의 난을 피하기 위해 산속의 동굴에서 살기로 했다.
해발 4천미터나 되는 곳이어서 연중 내내 눈이 덮여
그의 생활은 여간한 고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블라시오 주교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로 신자들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동시에 그는 엄격한 고행으로 덕행을 닦았다.
전승에 의하면 맹수도 성인 앞에서는 벌벌 떨며 점잖아졌다고 한다.


그의 순교는 하느님의 성의였을 것이다. 316년 어느 날,
아그리콜라우스는 사냥을 가서 미리 몰이꾼을 그 산으로 파견했다.
그때 그들은 의외로 동굴 속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는
성인을 발견하고 무척 놀라며 이를 총독에게 알리니,
그가 즉시 끌어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몰이꾼들은 다시 산에 올라갔다.
블라시오는 계속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총독이 당신을 만나 보고자 합니다:하고 말하니,
성인은 즉시 그 뜻을 알아채고 "좋습니다. 즉시 떠납시다.
나는 어젯밤에 이미 앞으로 있을 모든 일을 꿈을 통해 보았습니다.
당신들은 참으로 기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세바스테아까지의 길은 멀고 험했지만,
많은 신자들이 마중 나왔기 때문에 블라시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어머니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가며 자기네 아이들을 위해
주교의 축복을 빌었으며, 그의 축복을 받고서 완쾌된 병자도 수명 있었다.
예컨대 어떤 어머니가 무척 귀여워하는 외아들이 목에 생선가시가 걸려
당장에 숨이 막혀 사경을 헤매자 성인께 눈물로써 애원하므로
성인은 그 아들의 목에 한 손을 대고 십자가를 그으니까 즉시 나아졌다고 한다.

전에 블라시오 축일에는 인후를 축성하는 예절이 있었는데,
이것은 목에 가시가 걸려 사경을 헤맨
한 소년을 기적적으로 치료한 사실에 근거하며,
이 예식에서 초 두자루를 사용하는 것은 그 소년의 모친이
옥에 갇힌 그에게 초를 가져온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온다.


블라시오는 세바스테아에 도착하자 곧 총독앞에 끌려나갔다.
총독이 일부러 친절하게도 "신들의 친구인 블라시오씨!"라고 외치자
주교는 아무 두려움 없이 "나는 신들의 친구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영원히 지옥 불에 타버릴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이것을 들은 총독은 대단히 분노해 성인을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블라시오는 태연히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모든 고통을 감수했던 것이다.


이튿날 그는 재차 총독 앞에 끌려나왔다.
총독은 "신들을 숭배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형벌과 고문을 당할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위협했지만,
주교는 "각하가 말씀하시는 신들은 목석이나 금과 철로 만든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것을 숭배할 수 없습니다. 내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다면
얼마든지 나를 고생시키고 생명을 빼앗아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에
전혀 두렵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겠습니다." 하고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총독은 다시 한 번 대노하여 형리에게 명해 그를 기둥에 잡아매고
철갈퀴로 그의 살덩이를 찢어냈지만 성인은 용감히 참아받으며
"이러한 고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천국이 다가왔습니다.
지상의 모든 것은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하고
소리치므로총독은 도리어 부끄러워하며 그를 참수형(斬首刑)에
처하라고 명령하고 일단 감옥에 다시 가두었다.


감옥으로 가던 중 신자인 어느 부인이 일곱 사람과 같이
성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손수건에 받고
각기 자기의 이마에 바르며 블라시오의 굳은 신앙을 본받으려고 했다.
물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법관 앞에 끌려나가
신들에게 제물 바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목을 잘려 순교했다.

블라시오는 다시 한 번 법정에 호출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나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을 죽이는 자를 겁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하고
말한 뒤 앞서 순교했던 산 부인의 두 아들과 같이 참살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2월  3일
성 안스가리오 주교 St.

Anscharius St. Ansgarius of Hamburg Sant’ Oscar
 (Ansgario) Vescovo 801 at Amiens, Picardy, France -
3 February 865 at Bremen, Germany; relics at Bremen,
Hamburg, and Copenhagen Patronage:Denmark,
Scandinavia, Sweden Benedictine

핏카르디아 지방에서 태어나
 베네딕도회 수도사가 된 오스카(안스가리오)는
 선교 분야에 있어서, 범상치 않는 목자적 재능과 감수성을 발휘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덴마크 왕 하랄드의 간청으로
선교사로서 다니마르카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를 ’북유럽의 사도’라 부르기도 한다.
 
함부르크의 제1대 주교로서
 북부 독일 지역에 믿음을 전파하고 확고히 하는데 전념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는 그를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파견하여
 그 지역의 복음화를 부탁하였다.
그의 뛰어난 설교는 많은 지역민들의 감동을 자아내어
 급기야 스웨덴의 국왕 올라프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하였다.
그러나 북유럽의 수많은 민족과 종족간의 문화적 연대감이
하나의 종교로써 이루어지기까지 수많은 세월이 지나야만 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북유럽(스칸디나비아)의 사도’는 성인이 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성인이 되었다.
그는 코르비에서 교육을 받고 베네딕토회 수사 신부가 되었다.
3년후 덴마크의 왕이 개종했을 때 그는
 그 나라에 가서 3년 동안 선교 활동을 했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평소 관심있던 스웨덴이 그리스도교 선교사를 요청하자
 안스가리오는 그곳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해적들에게 잡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년이 채 못 되어서 그는 다시 소환되어 코베이의 대수도원장 겸
함부르크의 주교가 되었고 교황은 그를 스칸디나비아 선교단의 사절로 임명했다.
 
루드비히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북부 지역 선교 활동 기금이 중단되었다.
 안스가리오는 함부르크에서 13년간 일한 후에 북방인들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이교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북쪽에서 새로운 사도직 활동을 지도했는데
그 자신이 스스로 덴마크로 여행하면서 다른 왕을 개종시키는 데 도구가 되었다
 제비뽑기라는 이상한 방법으로 스웨덴의 왕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되돌아오도록 허락했다.
 
안스가리오에 대해 연구한 역사가들은 그가 뛰어난 설교가요,
겸손하고 금욕하는 사제였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에게 헌신적이었으며,
그들의 발을 닦아 주고, 식탁에서 그들을 기다림으로써 주님을 본받았다.
그는 순교하고픈 그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독일의 브레멘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뒤 스웨덴은 다시 이교로 돌아가서 2세기가 지난 후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이교로 머물러 있었다.
 
역사는 누가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보다는
그가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을 기록한다.
그렇지만 안스가리오와 같은 사람들의 용기와 인내심은
 본래의 타고난 용기와 끈질긴 선교가 일치되어 있는
 든든한 바탕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안스가리오의 생애는 하느님은 구부러진 줄에다가
 똑바로 글을 쓰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사도직의 결과를 배려해 주신다.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도 자신의 순수성을 살피시는 것이다.
안스가리오는 자기 동료들 중에 하나가 성인들이 이루어 낸 기적들에 대하
여 자랑을 늘어놓자 이렇게 꾸짖었다.
’만일에 내가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자격이 있다면
 나는 하느님께 단 하나의 기적을 나에게 허용해 주십사고 청하겠다.
그것은 그분의 은총으로 나를 착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9세기 초 프랑스에서 태어나 코르비 수도원에서 교육받았다.
826년 덴마크에 복음을 전파하러 떠났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스웨덴으로 가 거기서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함부르크의 주교로 선출되어,
그레고리오 4세가 이를 확인하고 그를 덴마크와 스웨덴의 교황 사절로 임명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굳은 마음으로 이겨내었다.
865년 세상을 떠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에서 (Nn. 23-24)
그리스도의 신비를 확신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신앙을 전파할
 각자 응분의 의무가 부과되어 있지만,
주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제자들 중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사
 당신과 같이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을 선교를 위해 제민족에게 파견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당신 원하시는 대로 영을 나눠주시는
 성신을 통하여 주께서는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각자의 마음 안에 불어넣어 주시며,
동시에 또한 전교회의 책임인 복음 선포의 임무를
자기의 본임무로서 받아들이는 가지가지의 회를 일으키신다.
 
사실 균형 있는 천성을 타고 났으며 마땅한 천품과
 재능을 갖고 선교의 임무를 받아들이기로 준비된 사람은
그가 방인이건 외국인이건 또는 사제이건 수도자이건 신도이건
 다 특별한 소명을 받은 이들이다.
그들은 정당한 권위자로부터 파견되어 신앙과 순명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로 떠나간다.
그들은 복음의 일꾼으로서 불리운 사명을 위해 선택 분리된 사람들이다.
이는 외교인들로 하여금 성신으로 성화되어 성의에 흡합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람은 혈육과 의논치 않고 복음 사업에 자기를 전부 바쳐,
 부르신 하느님께 응답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응답은 성신으로 말미암아 자극되고 굳세어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파견된 이는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명 안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는 일생 동안 자기의 소명을 지켜 내고
자기 자신과 전에 자기 소유였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되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또 그는 제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자기가 그 대리로 행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신빙성 있게 전하여 알게 할 것이며
십자가에 걸려 넘어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때에는
 아무 거리낌없이 말하여야 한다.
마음이 양순하고 겸손하신 스승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리스도의 멍에의 경쾌함과 그 짐의 가벼움을 드러내야 한다.
 참으로 복음적 생활에 의해 많은 것을 인내하며
 관용과 인자 그리고 거짓없는 사랑으로써 만일 필요하다면
 자기 피를 흘리기에 이르기까지 주께 대한 증거를 해야 한다.
 
그는 환난과 극심한 가난을 수많이 경험하면서도
즐거움이 거기 넘쳐흐르는 것을 깨닫기 위해 힘과 용기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것이다.
- (가톨릭홈에서) -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 대제가 313년에 가톨릭을
국교로 정한 후로는 지금까지 빠져 있던 이교의 암흑 속에서 벗어난
 그리스도교의 찬란한 진리와 은총의 빛을 받게 되었지만,
영국, 덴마크, 스웨덴 등 북쪽 유럽의 제국은 그 후도
오랬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촉하지 못해 참된 하느님을 몰라보고
 다만 허무한 신들의 우상이나 떡갈나무등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네딕토회의 선교사 성 보나파시오나 성 골롬바노 등이
 전교함에 따라 독일은 9세기에 백성의 거의 전부가 개종했고,
덴마크나 스웨덴도 10세기에 동일한 베네딕토 수사
성 안스가리오의 사도적 활동에 의해 교회의 교화를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독일의 사도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673 ? -754)
 축일:6월5일.게시판1197번 성 안스가리오는
북 프랑스의 코르비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들로서
 학식이 풍부하고 덕행도 또한 극히 높았으므로
그 수도원이 경영하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 후 독일 중부의 유명한 고르베이 수도원에서도 가르친 바 있다.
 
독일의 사도라고 부른 성 보니파시오의 씩씩한 활동에 감동한
안스가리오는 자신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일생을 보내기를 원하던 터에
826년 독일 황제 루도비코하고 하는 열심한 이가
 자신과 같은 해에 영세한 덴마크 왕 하라르도에게
 안스가리오와 그의 친구 알베르토를 선교사로 파견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기쁘게 이 신천지의 개척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초의 3년간은 그의 열심한 전교도 거의 헛수고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신자이던 하라르도 왕은 백성들의 반대를 받아 국외로 추방당하고
 친구인 알베르토는 병이 들어 귀국하게 되는 등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안스가리오는
하느님께 더욱 신뢰하고 끊임없이 전교에 열중했다.
그 후 스웨덴에서 독일에 사절이 와서 가톨릭 선교사의 파견을 간청했으므로
 황제는 안스가리오 등 두 사람을 그 나라에 파견했다.
 
그런데 그들은 가는 도중 불행하게도 해적을 만나
 일체의 물품을 약탈당하고 다만 간신히 생명만을 건지게 되었다.
스웨덴 왕 비요룬은 이런 고통을 당한 것을 가련하게 생각하고
정성껏 환영하고 여러모로 전교의 편의를 봐 주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의 전교의 노력의 결실을 맺어 북 유럽의 신자들의 수도
상당히 증가되었으므로, 교황 그레고리오 4세는 829년 함부르크에
 대주교좌를 설치하고 안스가리오에게 이를 맡기고
 또한 전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교황 사절로 정했다.
그 후 매년 많은 선교사들이 자진해 안스가리오의 지도하에 고난을 겪으며 덴마크,
스웨덴 양국의 교화에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백성들은 여간해서 쉽게 그리스도교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리어 선교사들을 미워하며 모욕하고 박해한 일도 적지 않았다.
원래 그들 게르만 인은 허약, 비겁함을 수치로 여기고
 무사(武士)의 정신을 존중하는 용감하고 과감한 민족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구세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비겁한 자라고 멸시하며,
 신자가 된 동포를 습격도 하고 교회를 불질러 없애버리기도 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기도 한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843년부터 3년간 계속된 대흉작이 안스가리오와
그의 동료들의 생활을 대단히 궁핍하게 한데다가 845년 해적이 침입해
 대주교좌 성당 및 수도원을 다시 태워버리는 등의 재난도 있고 해서
 전교상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안스가리오는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여전히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로써 부레멘 교구의 원조를 받으며
 자기 교구의 부흥을 완성했다.
안스가리오의 그러한 불요불굴(不撓不屈) 희생적 정신은
 위대한 대사도 성바오로와 통하는 점이 있었다.
그의 노력은 결국 보답되어 후에는
그 교세가 발전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여전히 검소한 선덕의 생활을 계속하며,
특히 가난한 자나 병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간절해
 매일 자기가 식사하기 전에 반드시 그와 같은
 불행한 자 3,4명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한다.
매우 바쁜 일을 하면서도 틈을 타서 기도와 독서 연구에 몰두해
 도금도 세월을 허송하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독실하고도 경건한 안스가리오 대주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품으로 들어간 것은 864년 2월 3일의 일이었다.
 
그는 “북부의 사도”로 불리며, 스칸디나비아의
 첫 번째 사도로 칭송받으며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아미앙 근교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안스가리오
는 피카르디의 옛 코르비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826년에 그는 덴마크로 복음을 설교하러 갔으나
스웨덴에 관한 관심이 더 커서 즉시 돌아오고 말았다.
831년에 그는 함부르크의 대주교로 축성되었고,
교황 그레고리오 4세는 스칸디나비아 백성들을 그가 돌보도록 명하였다.
 다네스가 845년에 함부르크를 파괴하자,
브레멘의 주교 임명장이 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수가 없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스웨덴과 덴마크로 돌아가서 놀라운 정열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사후에는 그 모든 일이 중단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아직
그리스도교회가 뿌리내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848년에 브레멘의 첫번째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후에 교황 니콜라오 1세에 의해 함부르크 교구와 통합되었다.
그는 또 다시 데마크와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명렬한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는데,
 유트랜드의 왕 에릭을 개종시켰다.
이같은 성공은 그의 뛰어난 설교력, 엄격하고 거룩한 생활
그리고 수많은 기적의 힘이었다.
그리하여 안스가리오는 "북부의 사도"로 불리며,
스칸디나비아의 첫번째 사도로 칭송받으며,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안스가리오 혹은 안스카리오(Anskar)라고도 한다.
- (부산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