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초대에 있어 위대한 교부들 중에 단연 두각을 나타낸 성 암브로시오는
340년에 독일의 트리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방 총독이었으나 그가 소년기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어머니가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로마로가 정성껏 세심한 주의를 해서 그들을 교육시켰다.
그 중 두 명은 장성하자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따라 관청에 취직했고,
암브로시오는 열심한 가톨릭 신자인 프로부스 재판소장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372년, 그가 32세 때 리그리아 및 에밀리아 두 주의 총독에 임명되어 그 수도 밀라노를 향해 떠날 때,
상사이며 좋으 벗이었던 프로부스에게 인사를 하러 갔던 바, 그는 암브로시오에게 타이르기를
"당신은 이제부터 법관이라기 보다 오히려 주교라는 기분으로 정치를 하는게 좋을 것이오’ 했다.
암브로시오는 밀라노에서 곧 인기를 얻고 존경을 받게 되었다.
실상 그의 통치 방식은 엄한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자애에 충만하고 정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374년, 밀라노의 주교 아우첸시오가 서거하자 그 후임 선출은 매우 혼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유로는 그 당시 아리우스 이단이 성왕했고, 그 교직자들이 가톨릭 주교의 선거를 방해해
드디어는 시내에서 폭동까지 일어날 기세였기 때문이다.
총독 암브로시오는 풍운이 급박하다는 소식에 몸소 그 장소에 달려가 격분한 군중을 무마했다.
그러자 어떤 아이가 "암브로시오님이 주교가 되어야 한다! 암브로시오님이 주교가 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이 소리를 들은 군중들은 마치 초자연적 계시나 받은듯이 이구동성으로
"암브로시오 주교님! 암브로시오 주교님!"하고 외쳤다.
이에 당황한 암브로시오는 그런 무리한 요구는 그만두라고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세례도 안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가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가져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중들은 도무지 멈출 줄 몰랐다. 거듭 주교 취임을 요구하며 점점 더 소란해졌으므로,
그도 당할 방책이 없어 하는 수 없이 한 친구 집에 숨어서 문제의 결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허사로 돌아가 곧 군중에게 발견되어 신자는 물론 부근의 주교,
사제들까지도 그의 출마를 권유하며, 황제도 국민들의 선출을 유효다하고 인정하게 되었으므로,
암브로시오는 할 수 없이 이를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교리 정도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단시일 내에 세례와 신품을 받아 사제가 되었고,
374년 12월 7일에 밀라노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 날 부터 암브로시오는 기도, 교리 연구, 자선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바른 신앙에 대한 열의를 보이고자 그리스교를 위해 추방당했던 전임 주교의 유해를
밀라노로 이송, 예의를 갖추어 정성스럽게 장례식을 지냇다.
그는 주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그를 따르기 위냈 침묵을 지키며 끊임없는 단식재와 기도로 날을 보냈다.
특히 성스러운 순교자들을 공경하며 열심히 공부해 얼마 후 대 신학자가 되었다.
그의 저서는 매우 많으며 무두가 영원 불멸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지금도 그의 학설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암브로시오는 신자들에게 교리에 대한 이해를 북돋우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고,
주일에는 반드시 강론을 했다.
많은 이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매일 같이 교훈과 도움을 청하러 그에게 찾아왔다.
그는 모은 이에게, 특히 죄인에게는 깊은 애정과 친절로 대했다.
성녀 모니카도 그에게 와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눈물로 청했다.
그래서 암브로시오는 그녀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그런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 예언은 적중되었으나, 얼마 후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설교를 듣고 그와 대화하는 사이에 회개해 뒷날 위대한 성인이 된 것이다.
그는 타인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게도 적이 없을 수 없었다.
하느님의 성자 예수께도 적이 있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암브로시오는 부정 불의한 일을 하는 이는 어떠한 권세, 지위의 인물이라도
주저 없이 책망하고 회심을 촉구했다.
그러니 때로는 그들의 반감을 산것도 피치 못할 일이었다.
이리하여 그런 종류의 적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책동해 그와 교회에 압력을 가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한결같이 인내하고 신앙을 옹호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은 것이다.
성 암브로시오가 테오도시오에게 처한 처사는 세상에 너무나도 유명하다.
황제는 매우 독실한 신자요 평소에 암브로시오에게 경의를 품었으며,
암브로시오 역시 황제를 존경하는 터였다.
그런데 390년, 테살로니마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및 황후의 초상을 흙탕물 속에 집어넣고 갖은 모욕을 가한다는 소식을들은 황제는,
심히 격분해 곧 엄명을 내려 그 지방 사람을 유죄, 무죄 분별 없이 전부 처치해 전멸케 했다.
이 소식에 접한 암브로시오는 대단히 놀라 즉시 서한을 황제께 보내어
통회와 보속과 고행을 권유하며 아울러 당분간 성당에 나오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아첨하는 신하의 진언을 들은 황제는 주교의 명령을 엄중히 지킬 필요가 없다 생각하고
예수 부활 대축일에 성당으로 행차했다.
주교는 성당입구에 가로막고 서서
"폐하께서는 아직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중함을 충분히 못 깨닫고 계시는 것 같사오니,
청컨대 이 길로 궁으로 돌아가셔서 그런 대죄에 또다시 죄악을 거듭치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으니, 황제도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머금고 그냥 돌아갔다.
그러나 황제의 내심에는 아직도 반항심이 숨어 있었다.
성탄 축일이 되자 황제는또 성당으로 행차했다.
암브로시오는 이번에도 입구에서 황제를 만류하며
"황제께서는 어찌해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시려 하나이까?"했다.
이제는 황제도 그의 잘못을 마음으로 뉘우치고
"나는 죄의 용서를 얻으려 합니다. 주교여!
주 예수의 무한한 자비를 생각해 나를 성당에 들여보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하고
겸손한 태도로 간청했다.
이 말을 듣자 주교는 "그러시다면 보속으로 무엇을 하시렵니까?"하고 물었다.
"무엇이든지 주교께서 명하시는 대로!"
이 말에 암브로시오도 그의 통회의 정이 진실됨을 알고
가벼운 보속을 명하고 성당에 들어감과 성사 받기를 허락했다.
이런 일로 말미암아 암브로시오의 권위가 더욱 빛났고,
또 황제의 겸손지덕은 한층 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황제는 얼마 후인 394년에 승하했다. 그 후의 로마 제국은 쇠퇴 일로를 걸었다.
이를 보는 암브로시오의 마음은 매우 아팠다. 그러던 중 자신의 최후도 다가왔음을 예지했다.
"내 이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는지!
아!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치 마시고 저를 거절치 마옵소서."
이것이 그가 기록으로 남긴 말씀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암브로시오의 사은 찬미가
○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원하신 아버지를
온 세상이 삼가 받들어 모시나이다.
● 하늘의 모든 천사, 케루빔과 세라핌이
끊임없이 소리 높여 노래부르오니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 엄위하신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도다.
● 영광에 빛나는 사도들의 대열
무수한 예언자들의 대열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
아버지를 높이 기려 받드나이다.
○ 땅에서는 어디서나 거룩한 교회가
그지없이 엄위하신 아버지
친아드님, 받들어 모셔야 할 외아드님
위로자 성령을 찬미하나이다.
● 영광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아버지의 영원하신 아드님,
사람을 구원하시려, 몸소 사람이 되시고자
동정녀의 품을 마다하지 않으셨나이다.
○ 죽음의 가시를 쳐보리시고
믿는 이들에게 천국을 열어주셨나이다.
● 지금은 하느님의 오른편, 아버지의 영광 안에 계시며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 보배로운 피로써 구속받은 당신 종들
저희를 구하시기 비옵나니
저희도 성인들과 함께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다음 부분은 생략할 수 있다.
● 주님, 주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주님께서 차지하신 백성에게 강복하소서.
○ 당신 백성 주님께서 다스리시고
영원토록 이끌어주소서.
● 나날이 주님을 기리는 저희가
영원히 주님 이름 기리오리다.
○ 주님, 저희를 어여삐 여기시어
오늘 죄를 짓지 않게 지켜주소서.
●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주님께 바라는 영생을 얻게 하소서.
● 주님, 저희가 주님께 바라오니
부끄럼이 없으리이다, 영원히.
- (가톨릭기도서 88쪽.)-